'브로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한국식 가족 영화
'브로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한국식 가족 영화
  • 이현동
  • 승인 2022.06.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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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비명이 없다. 비극의 세태(世態)가 스크린에 힘껏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새 우리를 향해 도약하는 그의 영화는, 단순히 현실을 복제하지 않고 영민한 방식으로 현실을 전시한다. 그의 영화는 결코 어떤 것을 직선적으로 선언하지 않는다. 비극을 비극으로써 복제하지 않고, 오히려 비극을 다른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렌즈를 관객에게 쥐여준다. 특히나 감정이 그러하다. 등장인물의 제스처는 사회란 이름의 험준한 파도 앞에서 쉽사리 포효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을 선택한 남편 이후를 살아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환상의 빛>(1995), 엄마가 사라진 동안 동생의 죽음을 응시하는 처연한 형제들의 모습을 다룬 <아무도 모른다>(2004), 죽은 노인의 연금을 받아서 생활하기 위해 마당의 노인을 묻은 이야기인 <어느 가족>(2018) 등.

음울하고 부조리한 현실의 모양새를 찾아볼 수 있을지라도 도무지 감정만은 약탈당할 여지를 두지 않는 비상한 은유, 그것이 사회를 고상한 형태로 다루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실존이며 형태다. 또 한 가지의 렌즈가 있다면 그것은 풍경이다. 그는 감정을 소거한 뒤 풍광의 이미지들로 말을 한다. 개방된 공간과 축소된 공간의 그 어딘가에서 감독은 그 경계를 쉽사리 공언하지 않고 사유의 영역으로 밀어냄으로 관객들의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 ⓒ 디스테이션
ⓒ CJ ENM

이와 적합한 사례로 그의 초기작 두 편인 <환상의 빛>과 <아무도 모른다>를 예로 들 수 있다. <환상의 빛>에서 후반부에 우뉴라라는 항구마을에서 촬영된 시퀀스들이 주로 '바다'와 접합할 때, 인물들의 시선은 좀처럼 정서적으로 정렬되거나 서사로 안내하지 않는다. 감독의 시선 앞에 이야기는 무용해지고 그 공백을 채우는 건 대중들, 자신의 몫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이미지는 '방'을 시초로 고립되고 결여된 상태, 그리고 아이들의 삶의 형태를 낱낱이 클로즈업 한다. 엄마가 떠난 뒤에 시궁창이가 된 방, 여름에 냉방장치가 없어 살결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죽은 동생을 땅에 묻을 때의 손 등은 영화에서 아이들의 감정을 대신하며 흉포한 세계를 맵핑하는 오브제들로 작동한다. 감정이 소거되는 동시에 감정을 체감하는 대상은 오로지 관객들의 몫으로 전가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브로커>(2022)는 <아무도 모른다>의 완성형 같아 보인다. 아이들을 버리고 간 엄마가 결국 돌아오지 않을 때 발생하는 비참한 사건을 '아무도 모르는 일'로 명시한 이 제목의 황량함에서 <브로커>는 무엇이라고 응답하는 것일까. 다시 돌아온 엄마 소영(이지은)은 이를 번복하기 위한 캐릭터, 뚜렷한 목적성이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엄마 유는 표면적으로는 밝은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내비치지 않는 비밀스러운 캐릭터라면, 소영은 짙은 어둠 속을 배회하면서도 희망을 배제하거나 상실하지 않는다.

<브로커>는 정반대로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로 끝을 맺지 않고, 누구든 자각할 수 있는 이야기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영화의 목적성과 성질은 방출된다. 기존에 절제되고 단정한 성향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고려한다면 이례적인 일이다.

 

ⓒ CJ ENM

'가족'과 '베이비박스' 혈연과 자본, 그 사각지대에서

카메라 앵글이 최초로 포착하는 것은 비가 쏟아지는 거리와 오르막을 터벅터벅 올라가는 비옷을 입은 소영의 모습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경사진 공간은 감정의 굴곡을 재현하고, 이 감정은 소영의 얼굴을 클로즈 업하므로 충만하게 전개된다. 험악한 언덕길 위에 우화와 같이 펼쳐진 부산 '가족' 교회라는 이름과 조명으로 둘러싸인 베이비박스는 영화의 주제를 대변한다. 혈연관계가 지시되지 않는 가족이란 가능성. '가족'과 '베이비박스'의 우발적 연고(緣故)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와 <어느 가족>의 사이에 머무는 어떠한 것이다. 유사 가족이 혈연을 초월한 가족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감독은 아마 예라고 답할 것이다.

"버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파는 사람이 있는 거야"라는 동수(강동원)의 말을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소영의 모습에서 '베이비박스'는 자본주의라는 담론을 잉태한다. 자본주의로 오염된 세계에서 <브로커>가 발화하는 것은 소탈하면서도 끔찍하다. '다시 데리러 올게'라는 말을 편지로 적은 대다수의 부모가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브로커들의 대화와 상현(송강호)과 동수를 만나 우성이를 거래하는 과정에서 자본은 생명을 흥정한다. 생명이 자본이란 촉매와 반응할 때 생명은 수치로 계산된다. 이 영화에서 우성의 가치는 끊임없이 가족과 자본 사이를 왕복하며 잠재된 형태로 기능한다. 처음에 소영은 브로커들의 거래에 동조하면서도 결국에 가족을 긍정함으로 영화는 모범적인 가족영화의 형태로 자리한다.

 

ⓒ CJ ENM
ⓒ CJ ENM

해진과 바다

일본 영화감독 겸 배우 '기타노 다케시'는 바다를 이렇게 설명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 영혼의 불안을 잠재우는 안식처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사람이 죽으면 바다로 간다고 믿는다. 바다로 둘러싸인 장소인 일본에게 바다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고 밀접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도 삶과 죽음을 단번에 목격할 수 있었던 바다의 존재는 죽음이 언급되고 그로부터 연쇄되는 이야기인 <환상의 빛>,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브로커>는 더욱 직접적으로 '바다'의 이미지를 직설적으로 구축한다는 지점에서 위의 언급을 명확하게 추정하게 한다.

바다 해(海), 나아갈 진(進)이란 뜻을 지닌 해진은 <브로커>에서 공간을 명시하는 역할을 한다. 바다로 나아감은 등장인물들의 연고지와 더불어 삶의 시작과 종착지를 표명하는 메타포이다. 로드무비를 방불케 하는 영화의 장소의 변환이 주로 바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는 진행형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지역들이 대부분 바다와 밀접한 곳인 부산, 영덕, 울진, 월미도라는 지정학적 측면은, 그들이 태어난 장소이자 가족이 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합하는 공간으로 조립된다. 상술했듯이 이 영화의 앵글은 클로즈업으로 강퍅한 인물들의 표정을 지정하면서도 바다라는 공간을 통해 감정은 해방된다. 해진은 바다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냄으로 영화의 리듬을 한결 느슨하고 유쾌하게 만들고, 이 영화의 성질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브로커>는 그간 차용해왔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법하고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대사는 과잉되어 있으며 인물들에게 주어진 역할에 관한 설정 자체도 관습적으로 작동한다. 가령 브로커를 쫓는 관찰자 시점인 수진의 시선(배두나)은 상투적이다 못해 평면적으로 느껴지며 대사는 피로한데, "엄마가 저러면 안되는 것 아니냐"는 수진의 말이 변용되는 일련의 과정 또한 의도적이라 그의 기존 화법을 좋아했던 대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다.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목적성, 심지어는 감독이 추구해왔던 영화의 정체성마저 의심이 들게 한다. 

무수히 이어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한번 자문해보자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다른 면모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필자는 <브로커>가 가진 순수한 가치들을 뇌리에 담을 수 있었다. 마지막 종결되지 않는 식별되지 않는 시선이 아직도 진행형인 가족이란 이름의 사각지대를 탐사하는 그의 지적 호기심의 반영이라면, 이 영화는 어찌 됐든 목적 달성에는 성공했음이 분명하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CJ ENM

브로커
Broker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Hirokazu Koreeda

 

출연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이지은
이주영

 

제작 영화사 집
배급 CJ ENM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29분
등급 12세 관람가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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