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국내영화제 취재기①] 초여름 전주, 품 안에 들어온 여유
[2022 국내영화제 취재기①] 초여름 전주, 품 안에 들어온 여유
  • 문건재
  • 승인 2022.05.2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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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 문건재 기자=코아르CoAR
ⓒ 문건재 기자=코아르CoAR

계절의 겨드랑이에 돋아나던 깃털은 매년 찾아오지만, 매번 다른 느낌을 준다. 올해도 나는 전주를 찾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많지 않은 취재일정과 쌓여가는 경력, 더해지는 나이, 공간의 익숙함 등 여러 이유가 더해져 생긴 '여유'는 내게 포근함을 건넸다. 이번에는 유독 이른 아침 전주에 도착했다. 올해 개막작인 <애프터 양>(감독 코고나다) 티켓을 손에 넣고 말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비록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밀려 티켓을 얻지 못했지만, 새벽녘에 고개 들던 전주의 모습은 아쉬움을 달래기에 부족함 없었다.

영화제 현장을 찍기 위해 들린 전주돔에는 내리쬐는 햇빛과는 다르게 꽤 쌀쌀했던 날씨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리했다. 그러다 우연히 작년 평창국제영화제에서 매체 편집장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던 한 감독님과 마주했다.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넸고,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하고는 서로의 길을 나섰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나지만, 작은 연을 맺은 사람을 향한 반가움은 그것을 이겨냈다. 매체 편집장을 기다리던 난 객리단길에 한 인생 네 컷 사진관에 맘이 이끌려 들어섰다. 사진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나지만, 혼자 처음 찍어보는 사진에 묘한 긴장이 들었고, 결국 얼굴에 다 드러났다. 누군가와 함께 할 땐 하지 못했던 표정과 몸짓으로 사진을 채웠다.

 

ⓒ 문건재 기자=코아르CoAR
ⓒ 문건재 기자=코아르Co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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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매체 편집장을 만나 팔복예술공장 이팝나무홀에서 진행 중인 '100 Films 100 Posters' 포스터 페스티벌을 찾았다. 전시장 한 면에는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 중 100편을 골라 100명(팀)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만든 포스터로 가득 메웠다. 팔복예술공장 바로 옆 철길에는 수많은 꽃들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눈에 들어온 풍경을 열심히 찍고 있던 나는 어느 아주머니들의 눈에 띄었는지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들에게 추억을 담아드렸다. 이후 '오마주: 신수원, 그리고 한국여성감독' 취재를 위해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을 찾았다. 오랜만의 취재에 설렘을 안고 도착한 그곳엔 많은 관객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마무리 후 숙소로 향했다.

편집장과 함께 늦은 저녁 겸 하루의 피로를 달래는 맥주 한 잔을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대부분은 웨이팅을 걸고 기다려야 했다. 같은 동네를 몇 바퀴 돌고 돌아 빈자리가 있는 어느 한 술집으로 향했다. 영화, 사랑, 인생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술잔은 꽤 많이 비어 있었다. 2차로 다음 장소를 찾기 위해 나와 걷던 밤의 온도는 꽤 차가웠다. 마침 분위기 좋은 와인바를 발견했고,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마감까지 1시간도 채 남지 않았지만, 이미 취해버린 우리에겐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와인 1병을 다 마시며, 우린 마음 깊은 곳에 숨겨뒀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날 그와의 1시간은 내게 많은 영감을 줬고,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을 정돈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숙소를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서로의 길을 가기 바빴다. 그러면서도 바로 옆에 숙소를 두고도 크게 한 바퀴를 돌만큼 여유가 발걸음에 담기었다. 다소 쌀쌀한 날씨 탓인지 숙소를 향하는 넓은 대로변에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간 후, 나는 몇 마디 말만 나누고 잠들었고, 편집장은 남아있는 맥주를 끝까지 해치웠다. 다음 날 숙취가 없던 나와 달리, 그는 뒤집어진 속을 달래기 위해 계속해서 국물을 찾았다. 한 우동집에 들어간 우리는 대화도 없이 음식을 먹었다. 이후 그는 인터뷰 취재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섰고, 오후 현장 취재밖에 없던 난 전날 들렸던 카페로 가 어제와 다른 원두의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즐기지 못했던 '여유'를 마저 즐겼다.

 

ⓒ 문건재 기자=코아르CoAR
ⓒ 문건재 기자=코아르CoAR

마지막 일정인 J스페셜클래스 <큐어>(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취재를 위해 영화의 거리에 위치한 씨네Q 1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하필 영화시작 1분 전,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누구보다 다급하게 뛰어나갔지만, 심한 길치인 내게 내 차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몇 분을 돌다 차를 찾고, 새로 주차를 한 뒤 극장을 향하는 내겐 아침에 뿌린 향수보다 땀 냄새가 그윽하게 자리했다. 허리를 반쯤 접고 들어간 극장 속 스크린에 흐르는 영화는 흐르던 땀마저 식게 할 만큼 싸늘했다.

취재를 끝내고 극장 밖으로 나와 길가에 오가는 인파들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매해 조금씩 바뀌는 자신을 보며 '잘한다'는 위로보단, '더 잘해야 한다'는 채찍질하던 지난날, 생계, 사랑, 우정, 학업, 가족 등 많은 것들에 치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던 과거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월의 풍파를 견디는 일, 스스로 터득한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일이지 않나. 이해되지 않는 과거의 행동에 잠 못 드는 밤도 있었지만, 세상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투성이기에, 미래를 빌릴 순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 있음을 알기에, 초여름 전주에서 오랜만에 품 안으로 들어온 '여유'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글 문건재, ansrjswo@ccoart.com]

문건재
문건재
《코아르》 운영위원 및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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