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독백이 걷힌 자리를 채우는 우화의 공기
[Interview] 독백이 걷힌 자리를 채우는 우화의 공기
  • 홍상현
  • 승인 2022.07.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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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유랑의 달> 이상일 감독
「유랑의 달」은 심사위원으로 전주국제영화제와 인연을 맺은 이상일 감독의 첫 초청작이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유랑의 달」은 심사위원으로 전주국제영화제와 인연을 맺은 이상일 감독의 첫 초청작이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나는, 당신들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어설픈 이해와 상냥함으로 나를 칭칭 옭아매는, 당신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 나기라 유, 『유랑의 달』 중에서.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

"얘가 여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떻게 아냐고. 세상에 부모를 골라 태어날 수 있는 사람도 있나? 다 좋아. 그래서 어쩌라고? 어차피 당신도 나도 3세 아니야? 부모가 어느 쪽인지, 언제 여기 왔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근 20년 전 어느 날 도쿄의 비어홀에서 조선학교 출신의 A가 폭발했다. 술자리에서 만난 동포 단체의 B에게 1965년의 한일 기본조약을 기준으로 분류하면 뉴커머인 필자를 "우리 같은 친구"라 소개했더니 술기운이 올라있던 그가 "거긴 일본이 좋아서 오신 분이니 (우리하고) 다르지"라고 첨언한 게 화근이었다. 올드커머와 뉴커머, 한반도라는 연고지는 같지만 특별영주자증명서와 재류카드라는 다른 신분증을 소지한 사람들. A는 B의 편 가르기에 '버튼'이 눌려졌다. 나중에 들으니 예의 꽉 막힌 태도와 유년기의 버팀목이던 큰형을 북송사업 끝물에 "공화국"으로 보내버린 부친의 모습이 겹쳤단다.

가게 문을 나와 역 앞 광장을 가로지르는데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뭔가가 사라진 느낌과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따라오던 A도 연신 눈가를 훔친다. 필자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운을 떼었다.

"저이는 최소한 다 이해한단 식으로 위선을 떨진 않았잖아. 아무튼 막차시간까지 좀 여유가 있으니까 어디 가서 한잔 더하자."

 

이상일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여느 일본영화와 차별화되는 아우라가 있다. 그는 이 원인을 자신의 뿌리에서 찾는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이상일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여느 일본영화와 차별화되는 아우라가 있다. 그는 이 원인을 자신의 뿌리에서 찾는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그렇다 하더라도 A의 모습은 이례적이었다. 일본인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격정. 왜소하고 마른 체격에 수더분한 인상, 어수룩한 성품의 A의 어디에 그런 에너지가 숨겨져 있었을까.

이 '에너지'를 다시 떠올린 건 우리와 동년배이며 A와는 호쿠리쿠 지방 태생에 조선학교 출신이라는 이력까지 닮은 이상일 감독의 <악인>(2010)의 연출력에서다. 데뷔작 <69 식스티 나인>(2004)이나 <훌라 걸스>(2006) 등에서 두드러진 코믹터치 휴먼드라마에서의 재능 때문에 '잠깐 콘셉트를 바꿔본 거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한 핏줄 영화'인 차기작 <분노>(2016)의 한국개봉 인터뷰에서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을 읽고 "자신도 어떤 감정인지 정리가 잘 되지 않은 눈물이 났다"고 토로한 대목을 접하면서 사라졌다. '사회의 틀을 벗어난, 혹은 사회로부터 튕겨진 이들'에 관한 주제로 거둔 감정미학(aesthetics of feeling)적 성취. 같은 작가의 비슷한 원작을 제제 타카히사가 영화화한 <약속의 땅>(2019,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과는 차별화되는 흡인력. 이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여느 일본영화와 차별화되는 아우라가 있다. 그는 이 원인을 자신의 뿌리에서 찾는다.

하지만 <분노> 이후 무척 오래 그의 작품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만 6년이 지난 올해, 정상개최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신작을 만났다.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동명소설 속 사라사의 독백을 걷어낸 자리를 우화의 공기로 전환된 특유의 '에너지'가 채우는 <유랑의 달>.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비 내리는 저녁 공원, 열아홉 살 대학생 후미(마츠자카 토리 분)는 비를 맞고 있는 열 살 소녀 사라사(시라토리 타마키히로세 스즈 분)에게 우산을 내민다. 사라사가 집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챈 후미는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사라사는 그곳에서 평화로운 두 달을 보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았고, 마침내 이 세상에서 있을 곳을 찾은듯하지만 얼마 후 후미가 납치 혐의로 체포된다. 15년 뒤, 외로운 두 사람은 세상의 낙인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재회한다.

 

「유랑의 달」에서 이상일 감독은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동명소설 속 사라사의 독백을 걷어내고 우화의 공기로 전환된 특유의 ‘에너지’로 그 자리를 채웠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유랑의 달」에서 이상일 감독은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동명소설 속 사라사의 독백을 걷어내고 우화의 공기로 전환된 특유의 '에너지'로 그 자리를 채웠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홍상현

장편상업영화 감독 데뷔는 2004년이라도 전주국제영화제에 오신 건 처음입니다. 게다가 오랜만의 신작이 초청되셔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이상일

지금까지 제 작품은 거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초청해주셨고, 전주국제영화제와는 심사위원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창작자로만 활동하면서 누구의 작품을 심사해 본 적은 없었던 지라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고, 전주라는 도시가 주는 느낌도 워낙 특별해서 '다음 작품은 꼭 여기서 상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바람이 마침 코로나19가 잦아들기 시작한 시점에 실현되서 너무나 기쁩니다.

 

홍상현

<분노>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게 2016년의 일이니까 한국관객과는 6년만의 재회인데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이상일

<유랑의 달> 말고도 몇 편의 작품을 기획하고, 개중에는 시나리오를 쓴 것도 있었어요. 하지만 <분노>라는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나니 차기작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할지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더라고요. 거기에 코로나 19 사태가 겹치기도 했고. 그렇게 이런저런 운과 타이밍이 맞아떨어지길 기다리다가 6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요.

 

홍상현

<악인>이나 <분노> 등에 매료되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비슷한 느낌을 기대했는데, 다르더군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요. (웃음)

이상일

전작과 이어지는 흐름을 기대하는 분들도 물론 계실 테지만, 감독인 저로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걸 추구해야 하니까요. (웃음) 어느 정도 공백을 거친 뒤인데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전작을 넘어서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6년 전 <분노>를 보신 10대 후반의 관객들이 이제 20대 중반입니다. 요즘의 10대 관객들이 <유랑의 달>을 보신다면 그때와 다른 감정을 느끼시겠죠. 이전에 제 영화를 보신 적이 있는 분이시라면 어떤 게 달라졌는지, 처음 제 영화를 접하시는 분이시라면 다른 감독들과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는 작품인지 주목하면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동명원작인 소설 『유랑의 달』은 2020년 한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동명원작인 소설 『유랑의 달』은 2020년 한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홍상현

그럼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소설 『유랑의 달』은 2020년 한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기도 했지만, 감독님이 이 작품을 굳이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결심을 하시게 된 데는 단지 대중적 인기 외에도 다른 포인트가 있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상일

방금 언급했듯이 <유랑의 달>이 다른 작가의 작품이니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는데요. 원작의 세계관이나 분위기가 전작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통되는 면도 있는데요. 바로 사회 속에서 어떤 불합리를 떠안고,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다룬다는 점입니다.

 

홍상현

다른 듯 같은, 그렇군요. (웃음) 서사에서도 확실히 '이상일이 아니면 포착해낼 수 없는 격정'이 느껴지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쓰시면서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셨는지요.

이상일

지금껏 늘 그랬지만 제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입니다.

예컨대 "I love you"라는 대사 한 마디로 끝날 수 있는 시퀀스일지라도 일반적으로 상정하는 것과 다른 방향의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유랑의 달>의 시나리오를 쓸 때도 단선적이고 직접적인 표현보다 애정이라면 애정, 분노라면 분노, 미움이라면 미음 등 쉽게 헤아리기 힘든 사람의 감정을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유랑의 달」은 이상일 감독의 작품 가운데 단연 최고의 시각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엔딩크레디트를 보니 촬영감독은 홍경표에 특수효과는 「기생충」으로 유명한 덱스터 스튜디오가 맡았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유랑의 달」은 이상일 감독의 작품 가운데 단연 최고의 시각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엔딩크레디트를 보니 촬영감독은 홍경표에 특수효과는 「기생충」으로 유명한 덱스터 스튜디오가 맡았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홍상현

<유랑의 달>은 아마도 감독의 작품 가운데 시각적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에는 홍경표 촬영감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계신데요. 두 분이 어떤 시각화 플랜을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상일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촬영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면서 촬영을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홍 감독이 일본에 오더라도 2주 동안의 격리가 끝나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로케지 영상을 줌으로 보여주면서 회의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촬영감독과 2, 3개월 전부터 같이 촬영장소를 물색하러 다니고 여러 가지를 협의하면서 비주얼 플래닝을 진행하는데 이번엔 그런 형태로 작업을 할 수가 없었던 거죠.

하지만 한계상황이 존재하더라도 작품의 완성도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되겠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작업형태를 바꾸는 시도를 해봤습니다. 현장에 가서 배우의 움직임이나 자연광을 포함한 노출의 상태 등을 그때그때 체크ㆍ고려해서 홍 감독과 의견을 모아나갔어요. 예컨대 사라사가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카메라가 터닝하면서 보여주는 게 있는데요. 먼저 공원 벤치에서 사라사가 책을 읽는 모습을 촬영한 뒤에 홍 감독과'시선'이라는 연계 고리를 통해 연결해보기로 하고 찍은 장면이었습니다.

 

홍상현

저도 기억에 남더라고요. 미장센이 놀랄 만큼 유려하면서도 느낌이 무척 사실적이더라고요.

이상일

감사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프리프로덕션에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역으로 생동감 있는 라이브의 감각을 보여드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 카메라의 역할은 단지 정보의 전달에 그치지 않으니까요. 또, 저뿐만 아니라 홍감독도 사람의 정서를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해 주셔서 진짜 든든했습니다.

 

한국영화 「오직 그대만」(2011)의 리메이크 작품 「유어 아이즈 텔」(2021)의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요코하마 류세이 배우(왼쪽)는 「유랑의 달」에서 파격적인 연기변신을 시도한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한국영화 「오직 그대만」(2011)의 리메이크 작품 「유어 아이즈 텔」(2021)의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요코하마 류세이 배우(왼쪽)는 「유랑의 달」에서 파격적인 연기변신을 시도한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홍상현

<기생충>의 시각효과를 담당했던 걸로 유명한 덱스터 스튜디오와의 작업은 어떠셨나요?

이상일

덱스터 스튜디오에 홍감독과 같이 가서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홍감독이 저 대신 작업을 하고, 내용을 이미지화시켜 보내주면, 제가 그걸 다시 일본의 스튜디오인 이미지카(IMAGICA)에 가서 확인하면서 줌으로 의견을 나누는 형태로 일을 진행했어요.

이런 상황이라 덱스터 스튜디오에서 홍감독이 작업하신 미묘한 색감이나 콘트라스트와 제가 이미지카에서 확인한 이미지가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지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완성된 결과물을 보니 서로 균형이 딱 맞는 라인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홍상현

주인공인 사라사로 분한 히로세 스즈 배우의 연기가 문자 그대로 '절정기'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일단은 <분노>이래 6년만의 신작에 다시 그를 캐스팅한 계기가 궁금한데요.

이상일

<분노>의 캐스트와 감독으로 만났을 무렵 히로세 배우는 17세였습니다. 당장 어떤 단계에 올라 있다기보단 앞으로가 기대되는 연기자였는데, 기회가 있으면 다른 작품으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시다시피 그는 다른 작품을 통해 많은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저 또한 줄곧 그 과정을 지켜보았던 터라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을 무렵 히로세 배우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어린 시절의 사라사로 분한 시라토리 타마키 배우는 영화의 초반부,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연기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어린 시절의 사라사로 분한 시라토리 타마키 배우는 영화의 초반부,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연기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홍상현

후미와 료의 앞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사라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디렉션(direction)을 하셨는지요.

이상일

세상 사람 누구나 진정한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면서 일상을 사는 건 아니잖아요. 진정한 내 모습은 어딘가에 미뤄두고 타인과 소통하면서 거리를 유지하고, 그렇게 어떻게든 자신의 사회적 삶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죠.

더욱이 <유랑의 달>의 사라사는 가족이나 친지 등 그 누구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외톨이에다 여성이기까지 합니다. 안 그래도 '나이 어린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참 만만치 않은 일인데 말이죠. 극 중에서 사라사와 료의 관계에서는 이런 상황의 부정적 측면이 극대화됩니다. 일단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히로세 배우에게 어린 시절 후미와 헤어지고 난 사라사가 어떤 경험들을 한끝에 지금의 삶의 방식을 형성시켜왔는지 꼼꼼하게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15년 세월을 내재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포인트도 짚어주었고요. 아울러, 후미와 함께 있는 순간에는 진정한 내 모습을 드러내도 좋다는 전제와 더불어, 이 차이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해 달라는 부탁도 드렸습니다.

 

홍상현

어린 시절의 사라사를 연기하는 시라토리 배우의 모습이 가슴을 파고들어 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역배우로서는 대단히 난이도가 높은 연기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상일

사라사의 아역 오디션에 무척 많은 시간을 들였어요. 처음에는 좀 더 어린 배우를 찾다가 도중에 연령대를 좀 높였는데요.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후미 역의 마츠자카 배우와 정서적인 소통이 가능해야 하고, 시나리오의 내용을 표현할만한 지성과 감성이 갖춰진, 아울러 심적인 성장 또한 이뤄져 있는 상태여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칠 경우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는 문제도 있었지요. 시라토리 배우는 이 모든 요수들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별한 캐스트였습니다.

 

「분노」에 이은 6년만의 신작을 통해 이상일 감독과 재회한 히로세 스즈 배우의 연기는 문자 그대로 ‘절정기’에 들어선 느낌이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분노」에 이은 6년만의 신작을 통해 이상일 감독과 재회한 히로세 스즈 배우의 연기는 문자 그대로 '절정기'에 들어선 느낌이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홍상현

연극영화학부에 다니던 시절 은사로부터 연기의 본질 중의 하나가 스스로 다른 사람이 되고, 그것을 타인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랑의 달>의 마츠자카 배우를 보면서 그때의 가르침을 실감했어요. 심지어 외모마저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 들어서 놀랐습니다.

이상일

그러게요 정말 대단하죠? 마츠자카 배우 본인도 캐스팅이 되면서 저한테 '어쩌면 지금까지 맡아 온 중 가장 어려운 역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답니다. (웃음)

<유랑의 달>에서 마츠자카 배우가 특히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 건 역할창조를 위한 몸만들기의 과정에서였는데요. 체중감량뿐만 아니라 후미라는 인물의, 구부정한 몸의 실루엣 연출을 촬영 서너 달 전부터 준비하더라고요. 여기에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즉,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빛을 더했는데 이 정도로 배역에 몰입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저도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촬영기간 중에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완벽하게 후미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했지만 정말 제대로 역할을 소화해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인제 와서 보면 이렇듯 실제의 마츠자카 배우 자신과 극 중의 후미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까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온 결과물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홍상현

게다가 마츠자카 배우는 사라사를 연기하는 두 배우와 공히 놀라운 캐미스트리를 보여주셨어요.

이상일

시라토리 배우와의 촬영은 일반적인 스케줄에 따라 이뤄져도 딱히 어려울 게 없었는데 문제는 어린 시절을 직접 연기하지 않은 히로세 배우와의 호흡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사라사는 후미에 대해 굉장히 강렬한 기억이 남아있는 심리상태여야 했거든요. 이 감정을 느낄 시간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따로 촬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극 중에서 사라사와 후미의 첫 만남이 이뤄지는 공원이나 두 사람이 지내던 방에 히로세 배우와 같이 가 보는 등 기억을 내면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촬영스케줄과 관련해서는 초기에 료(요코하마 류세이 분)와 함께 등장하는 신을 많이 찍었는데, 평소 자신을 억누른 채 살아가고 있는 사라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기 위해서였어요.

 

마츠자카 토리 배우는 후미의 역할창조를 위한 몸만들기를 촬영 서너 달 전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마츠자카 토리 배우는 후미의 역할창조를 위한 몸만들기를 촬영 서너 달 전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홍상현

작품을 만들 때마다 OST에 무척 공을 들이시는 감독의 스타일이 <유랑의 달>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OST의 콘셉트는 어떻게 잡으셨나요.

이상일

전작의 음악은 이른바 '거장'으로 불리시는 분들이 담당하셨지만. <유랑의 달>에서는 반대로 새로운 분을 모셔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 쪽 경험이 많지 않은 하라 마리히코 씨에게 음악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작업 방식은 <분노>에서 사카모토 류이치 씨와 작업할 때랑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충분히 대화해가면서 필요한 음악을 만들어 삽입했죠. 다만, 하라 씨가 무척 재능 있는 뮤지션이기는 해도 영화관련 경험이 많지 않은 만큼 혼란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반복해서 강조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홍상현

이를테면 어떤 거였나요.

이상일

'단순히 영상에 음악을 입히는 게 아니라, 배우가 언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각각의 신에서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을 법한 포인트를 잡아서 음악으로 만들어 달라'는 거였습니다. 이런 부분과 더불어 거리감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했어요.

 

“후미와 사라사처럼 연령, 성별, 인종과 같은 경계를 넘어, 어떤 이유 없이도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순간, 그런 진실한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랑의 달」을 만들면서도 이야기에 거짓됨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거듭했고요.” 이상일 감독의 술회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후미와 사라사처럼 연령, 성별, 인종과 같은 경계를 넘어, 어떤 이유 없이도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순간, 그런 진실한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랑의 달」을 만들면서도 이야기에 거짓됨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거듭했고요." 이상일 감독의 술회다. (C)2022 Wandering Film Partners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아울러 제 스스로 중요한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단순히 외로움에 대한 해결방안의 차원을 넘어서는, 진정으로 중요한 관계에 관한 사색 말이죠.

후미와 사라사처럼 연령, 성별, 인종과 같은 경계를 넘어, 어떤 이유 없이도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순간, 그런 진실한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랑의 달>을 만들면서도 이야기에 거짓됨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거듭했고요.

평소 제 작품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본영화와 다른 느낌이라는 평가가 많은데요. <유랑의 달>은 거기에 홍경표 촬영감독이 함께 해 주셔서인지 '일본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분위기'라고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이 더 많더라고요. 아마 한국 관객 여러분의 감상도 다르지 않으실 거로 생각합니다. 하드웨어 면에서 국제공동제작이라는 제작형태를 띠기도 했지만 소프트웨어적으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감성이 순수하게 섞여 있는 작품이에요. 기대해 주시고, 부디 시간을 내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입부에서 언급한 '6년이라는 시간'이 못내 미안하게 느껴졌을까.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나서도 이감독은 그간의 공백에 관해 부연을 이어갔다. '정말 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고, 기획단계에서 작품과의 '만남'이 이뤄지지 않으면 좀처럼 프로젝트를 구체화시킬 수 없는 스타일도 영향을 주었노라고. 다시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절대평가 하는 자세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면 관객 여러분도 작품에 대해 납득해주시지 않을 거라 믿는다고.

그의 선한 미소를 떠올리며 자판을 두드리다 결심한다.

앞으로는 '그의 작품을 다시 볼 수 없으면 어쩌지'하며 불안해하기보다 '보다 큰 보람'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기꺼이 감내해보기로. 물론 서울의 극장에서 개봉하는 <유랑의 달>을 한 번 정도 다시 보고 난 후에 말이다.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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