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산>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전설 속의 산을 찾는 여정을 그린 소설 『마운트 아날로그』(1952)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내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원작 소설은 프랑스 작가 '르네 도말'의 죽음 때문에 미완으로 남게 되었고, 소설의 내용은 탐험가들이 여정을 떠나기 직전에 끊어져 버렸다. 이에 따라 르네 도말이 상상한 유토피아는 결론이 없는 가능성의 세계로만 존재한다.
존재하지만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의 세계. 또는 애초에 닿을 수 있는지조차 확정 지을 수 없는 확률의 세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이것은 영화 속 여정의 주인공 '투오모'와 감독이자 촬영감독인 '벤 러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산>이라는 '영화 자체'가 궁극적으로 목표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전의 재현이자 환상의 예술로서 영화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니까 이 영화에서 투오모와 벤 러셀이 보이지 않는 산을 찾으러 고행 같은 걸음을 지속하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거나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아낸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 행위는 창조가 아니라 재인식이다. ‘보이지 않는 산은 존재한다’는 추상적 명제를 몸이라는 구체로 감각하고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 사유를 확장해 보자면, '추상으로서의 영화라는 개념을 구체로서의 영화적 요소를 통해 성찰하는 것'이다.
우선, <보이지 않는 산>의 구성은 크게 두 흐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르네 도말의 소설 속 산을 찾기 위한 투오모의 여정. 이를 위해 투오모와 벤 러셀은 핀란드에서 그리스까지 이동했으며, 그 과정에서 각 나라의 가장 높은 산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올림피아 스플렌디드라는 핀란드 출신 밴드의 연주. 얼터너티브 록 기반의 음악을 하는 이 아방가르드 밴드는 악기와 목소리를 정형화된 음계가 아닌 그저 일종의 추상적 신호처럼 사용한다. 그리고 영화는 서로 큰 연관 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를 교차 편집하며 진행된다.
감각을 위한 여정에서 <보이지 않는 산>은 시청각 매체로서의 두 가지 영화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시각적 운동 이미지를 대변하는 걸음. 청각적 추상 신호를 대변하는 음악. 걸음은 투오모의 육체가 지탱하고, 음악은 올림피아 스플렌디드가 지속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는 벤 러셀의 카메라는 투오모의 여정과 밴드 연주의 두 가지 감각 경험 사이를 진동한다. 이런 요소들은 직렬로 교차하며 편집되기도 하지만, 병렬로 겹쳐지기도 한다.
벤 러셀은 무언가 하나를 명확히 정해두고 영화를 시작하지 않았다. 완성되지 못한 원작 소설처럼 결말을 정해두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를 어떻게 찍을 것인지, 무엇을 찍을 것인지, 지금 찍고 있는 장면이 단지 메이킹 필름인지 실제로 영화에 삽입될 푸티지인지, 심지어 찍고 있는 푸티지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산>이라는 하나의 영화를 위한 것인지조차 정해두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제작되는 방식 자체가 그러하기에 영화는 기술적으로 연속적이지 못하다. 뜬금없이 투오모와 영화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감독이 비치기도 하고, 산을 오르던 투오모가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이 밴드의 공연 리허설을 지켜보고 있기도 하다.
영화 전체를 작동시키는 투오모의 걸음을 영화의 서사, 전반적으로 흐르는 밴드의 음악들과 연주 장면들을 영화의 배경이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산>의 서사와 배경은 분리되고 서로 침투하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사의 중심과 변두리. 카메라의 안과 밖. 허구와 실재. 그 경계 사이를 문지르고 지워낸다. 나아가 산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의 이미지와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사운드의 이미지. 아날로그와 디지털. 자연의 형태와 순수 기하의 형태. 컬러와 흑백. 이런 이항대립에서 미끄러지고 빠져나간다.
이러한 무질서한 구조, 콘티뉴이티의 파괴, 모호한 경계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준다. <보이지 않는 산>이 주는 혼란함을 그저 자극적인 시청각 요소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전위성으로 보아야 할까. 또는 해석에 곤란해하는 관객들을 보고 묘한 희열을 느끼는 불친절한 예술가의 장난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항대립 상에서 최소한의 선택도 하지 않는 이 영화는 완성조차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보이지 않는 산>은 그 어떤 영화보다 명확하고 순수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의 시도 중 하나는 '증명'이다. 미완 소설이라는 추상 텍스트와 영화라는 구체적 이미지. '보이지 않는 산은 존재한다'는 추상 명제와 걸음이라는 구체적 행위. 시네마라는 추상과 개별 영화라는 구체. 이 추상과 구체 사이는 그 어떠한 선행 명제도 동반하지 않은 '믿음'으로만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행위는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에서. 이 영화가 주는 체험을 두고 '영적 체험'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이것 때문일 것이다.
은유적으로, 실제적으로 보더라도 <보이지 않는 산>은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벤 러셀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를 찍고, 투오모는 '영화한다'는 개념을 걸음의 방식으로 지속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모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영화를 두고 '완성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서는 안된다. 영화, 여정, 질문, 사유는 '지속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결국 영화는 보이지 않는 산은 있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투오모의 여정과 영화의 여정도 끝내지 않는다.
벤 러셀은 엔딩에서 등장하는 투오모의 걸음을 디지털 그래픽으로 재현한 이유에 대해 "미완의 원작 소설처럼 영화가 확정된 답을 내리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했다"라고 말한다.
과연 '영화한다'의 개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할 수 있을까. 70여 년 전에 쓰인 소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과거로부터 온 영화이고, 우리에게 닿아 어떤 방식으로든 개별적인 사유를 일으킬 것이므로 미래를 향한 영화이다. 거기에 영화는 질문의 진동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자생하고 스스로 자의식을 확장시켜 나간다. 무한한 지속. 무한의 영화. 아직도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보이지 않는 산
The Invisible Mountain
감독
벤 러셀Ben RUSSELL
출연
투오모 투오비넨Tuomo TUOVINEN
제작 Faliro House Productions, Vsbl Mtn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83분
등급 G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