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13구' 링크되어 있는 사람들
'파리 13구' 링크되어 있는 사람들
  • 이현동
  • 승인 2022.05.17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흑백 이미지와 앰비언트 음악이 공존하는 공간에서의 사랑이란"
ⓒ 찬란

그래픽 노블 작가 에이드리언 토미네의 세 가지 단편 작품을 각색하여 기획된 <파리 13구>(2021)는 세 명의 남녀가 사회, 문화, 종교가 다층적으로 혼재된 이민자의 도시라 불리는 파리 13구라는 독특한 도시에서 사랑의 표피를 벗겨내는 풋풋한 성인 멜로이다.

프랑스어의 본래 제목인 올림피아드(Les Olympiades)는 파리 13구가 축조된 배경과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착안한 제목이다. 파리 13구에서 10년 동안 거주한 감독은 이 도시가 다른 지역에 비해 모더니티와 고전주의가 동시에 교직된 도시라는 것을 체감하였다. 가장 최근에 도시개발사업으로 현대적인 도시가 된 파리 13구는 고층 건물을 비롯하여 촘촘하게 드러나는 주거용 타워들은, 이 영화의 성격을 가늠하는 최초의 이미지이자 공간에 함몰되어 있는 인간의 속성을 대변하는 거울과 같다.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흑백 이미지가 과거를 소환하는 고전주의의 향수인 것과는 반대로, 공간과 분위기를 구성하는 작곡가 론(Rone)의 EDM 사운드트랙은 온전히 디제틱한(diegetic) 음률의 조성으로 고전주의와 모더니티의 기묘한 결합으로 주어진다.

 

모더니즘 : 몸의 결합과 정신의 결합

<파리 13구>에서 단연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행위는 성관계 장면들이다. 몸의 관계와 정신의 관계에서의 정답을 요구하는 어떤 가학적인 이미지들의 연쇄는 관객들을 향한 두 가지 결합에 대한 의미론적 촉구로 구현된다. 영화의 단면을 최초로 묘사하는 오프닝 장면과 그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그렇다. 파리 13구를 샅샅이 살피는 카메라 앵글과 더불어 즉각적으로 관객이 맨 처음 맞이하는 장면은 에밀리(루시 장)와 카미유(마키타 삼바)의 나체이다. 모더니즘의 시각적 발원지인 도시에서 그들의 나체는 영화에서 너무나도 쉽게 발각되며, 이는 마치 모더니즘의 단면을 축소해놓은 듯한 인상으로 과잉된다. 근대에 이르러 모더니즘의 가장 상징적인 반응으로 종교적 이성관의 붕괴와도 결부된 첫 장면의 애정행각은 정신의 결합 이전에 선취되는 몸의 결합으로부터 드러난다.

 

ⓒ 찬란

중세적 사유의 표면을 파괴하고자 했던 사상가인 '니체'는 작은 이성인 정신은 큰 이성으로서의 몸을 벗어나서 따로 독립할 수 없으며, 정신은 그저 큰 이성으로의 몸의 발현 형태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시각적인 자극은 정신과의 유대가 깊숙이 도달하기 전에 신속하게 감각을 진동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일반적으로 영화는 이러한 자극을 다루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거듭한다. 대표적으로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님포매니악> 시리즈가 그렇다. 성이 주는 아드레날린 적인 요소가 극대화되면 될수록 그 결합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희의 요소로 변용되는 것처럼, <파리 13구> 또한 이러한 클리셰를 유사하게 차용한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일상의 이미지로 분절된 이 프레임들은 육체의 관능성으로 치환되지 않고, 도리어 이를 변주하여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가치관과 구조의 변화는 영화로부터 기술되는 이 도시의 급진적인 변화와도 결부되고, 또한 그 결합이 온전한 것인지를 묻는 데까지 나아간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섹스로 푼다는 남자 카미유는 자신의 욕망을 충당하기 위해 몸을 이용하는 모더니티적 사고관을 소유하고 있지만, 반대로 에밀리는 카미유의 욕망에 반응하면서도 그를 욕망의 대상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카미유는 도시에 규칙적으로 나열된 건물처럼 욕망을 순차적으로 정돈하고 절제하기도 하지만, 에밀리는 규율이 지배하는 통신사 상담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그와의 관계를 더욱 우선시한다. 가치관의 다른 두 사람의 태도는 '파리 13구'라는 다층적인 메타포가 존재하는 장소적 개념에만 사랑을 함몰시키지 않으며 도리어 사랑의 하모니를 이루는 방식에 관하여 지시한다. 영화에서 이 하모니가 절단되지 않고 유지하는 장치로 이용되는 통신수단들은 물성을 초월하여 정신과의 전선을 연결한다. 보이지 않는 선은 몸과 정신의 거리를 좁히면서도 이와 상응하는 신체와 도시라는 사회와 사유의 구조물 속에서 관계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 찬란

거리두기와 통신 시스템

카메라의 앵글은 관계의 공백을 밝히면서 이 간격을 은연중에 시사한다. 카미유와 에밀리, 그리고 노라(노에미 메를랑)와의 이성적 관계만으로 이 영화는 주제를 한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서로의 관계에서 이탈되기도 하고, 다시 밀착되기도 한다. 그러나 <파리 13구>에서 주제의 골격을 교정하는 건 이들이 속한 가족이자 노라의 외모와 유독 닮은 캠걸인 앰버 스위트(제니 베스)와의 만남 속에서 이뤄진다. 카미유는 자기 여동생인 에포닌이 스탠드 업 코미디를 한다는 이야기를 우습게 여기고, 에밀리는 치매와 건강 악화로 홀로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를 다른 이에게 대리로 맡기기도 한다.

단절의 프레임 속에서 모순적인 관계가 드러나는 건 노라와 앰버의 조우 속에서 벌어진다. 캠걸인 앰버의 생김새를 닮은 노라는 그녀가 트레이드 마크처럼 착용하는 금발 가발을 우연히 착용하고 학교가 주체하는 파티에 가면서 벌어진다. 노라가 캠걸이라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면서 그녀는 억울한 마음에 인터넷을 통해 앰버에게 대화를 요청하면서 둘은 누구보다 사랑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 세 명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관계가 드리블 될 때의 간격을 단순히 이성이란 범위로 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사실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자크 오디아르의 테크닉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연출은 흑백 이미지와 앰비언트 음악 사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파리 13구>의 미학적인 영화언어로 활용되는 '분활 숏'은 단절되지 않는 관계를 프레임에 담는 역할을 한다. 그래픽 노블을 연상시키는 분활 숏에서 대부분의 대화는 휴대폰과 인터넷을 통해 이뤄진다. 이는 사람의 관계가 물리적인 거리로 제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 영화의 모든 인물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소통을 상징하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의 메타포는 영화의 주제로 계속하여 사용된다.

 

ⓒ 찬란

카미유가 극적인 변화를 이룬다는 점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이를 직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후반부에 에밀리와의 재결합에서 그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사랑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몸과 정신의 두 가지의 온전한 결합이 아닌 성적 결합으로 치장되었던 것과는 별개로 인터폰을 향해 "사랑해"라는 말을 반복해서 듣고 싶은 에밀리의 요구를 들어주는 장면과 이에 반응하는 그녀의 환한 제스처는 어린아이의 첫 고백처럼 뭉클하게 다가온다.

이 장면에서 <파리 13구>는 성인영화가 아니라 어린이영화로 변주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순간 사용되는 매개체가 인터폰이라는 것과 줌인 되는 이 장면에서 들려오는 'Falling In Love Again'의 곡은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이자 어디서든지 우리가 연결된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는 훌륭한 장면이다.

<파리 13구>는 코로나19 펜데믹 기간 동안 촬영되었다. 모든 작품이 그렇겠지만 시대성을 극복하려는 방식으로 영화는 제작되기 마련이다. 관계에 대한 부재가 이 영화의 시대를 반영하는 징후이자 사례라면 이 영화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긴밀하고 친밀한 관계가 노라와 앰버 스위트라는 점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삶과 관계의 중개자역할을 하는 것이 유물론적 시스템이라면 이것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작품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는 커플이 노라와 엠버라는 점에서 이는 흥미로운 역설이다. 우리는 그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링크되어 있는 것일 테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찬란

파리, 13구
LES OLYMPIADES
PARIS 13TH DISTRICT
감독
자크 오디아르
Jacques Audiard

 

출연
노에미 메랑
Noemie Merlant
루시 장Lucie Zhang
마키타 삼바Makita Samba
제니 베스Jehnny Beth
스티븐 마나Stephen Manas
주느비에브 도앙Genevieve Doang
아나이드 로잠Anaide Rozam

 

배급|수입 찬란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5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2.05.12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