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th JIFF]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 인생을 편집할 수 있다면
[23th JIFF]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 인생을 편집할 수 있다면
  • 이지영
  • 승인 2022.05.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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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현실과 픽션 간 경계의 다공성(多孔性)"

1. 죽지 않는 이야기

마르티카 라미레스 에스코바르 감독의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는 한때 필리핀에서 인기 액션영화 감독이었던 '레오노르'(실라 프란치스코)에 대한 이야기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그녀의 운명처럼 사경을 헤매고 있는 영화라는 픽션에 관한 이야기이다.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Leonor will never die)라는 제목은 좀 더 직접적으로 번역하면 "레오노르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미래형의 선언으로 읽힌다. 필멸의 인간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육신이 없다면, 레오노르가 환유하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생명력을 다하고 죽어버린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인가? 그것은 집에 전기가 끊기고 전구가 깨지는 일상 모습이 비유하듯, 창작자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더 이상 이어 나갈 수 없는 미완성의 서사를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현실적인 경제력의 문제로 인해 자본에 팔려 간 이야기, 그렇게 원래 창작자의 의도에서 벗어나 남의 손에서 완성된 텍스트일 수도 있다. 이와 정반대로 언제나 영원불멸할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영화는 이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내린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한 레오노르는, 아니 한 이야기는 죽음을 맞이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반대로 세대를 거듭할수록 계속 누군가가 말을 건다면 그 이야기는 영원불멸할 것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 전주국제영화제

2. 픽션에서 현실로, 다시 현실에서 픽션으로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는 반투명하고 침투할 수 있는 헐거운 경계를 가진 영화이다. 먼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그렇다. 레오노르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죽은 아들, '론왈도'(안토니 팔콘)의 혼령은 계속 그녀와 집 주변을 떠돈다. 론왈도의 모습은 마치 반투명하게 오버레이어(overlayer)된 것처럼 보이며, 유체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 옆에 드나드는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영화 초중반부에는 방 안에서 레오노르가 혼자 론왈도와 이야기하는 장면을 큰아들 루디(봉 카브레라)가 엿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론왈도는 레오노르의 상상이 만들어낸 환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루디와 아버지는 "몸이 투명한 건 무슨 느낌이야?"라고 론왈도의 환영에게 묻거나 말을 걸기도 한다. 이로써 죽음이 삶의 영역으로, 픽션이 현실의 영역으로 넘어와 넘실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에는 '현실'과 '허구'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영역으로 범람한다. 위에서 언급한 죽은 론왈도의 혼은, 영화 촬영 당시의 의상을 그대로 입고 있고 총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픽션 속의 인물이 그대로 현실로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말다툼을 하던 커플이 창밖으로 던진 TV에 레오노르가 머리를 맞고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다. 이를 기점으로 레오노르의 육신은 자는 것도 깨는 것도 아닌 선잠과 비슷한 상태에 빠지고, 정신은 그녀가 스스로 만들어낸 액션영화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마치 인간의 세계로 내려온 창조주처럼 극 중에 잠입하고, 선악의 대결에서 선한 인물들을 조력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루디 또한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TV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혀서 극중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이때부터 'TV'라는 스크린은 두 세계를 통과하는 매개가 되어, 비현실적인 불가사의한 일들이 현실에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레오노르가 누워 있는 병실에는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남자가 찾아와서 출산을 하기 위해 입원한다.

이러한 상호 침투가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의 원인은 무엇인가? 극 중 안에 잠입한 레오노르는 오직 한 씬, 단 한 쇼트를 위해 달려간다. 바로 그녀의 둘째 아들 론왈도가 영화 촬영 도중 '진짜’ 총기에 맞아 죽었던 장면이다. 달리 말하면,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원인은 아들에 대한 애도를 마치지 못한 레오노르의 죄의식과 연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재난영화나 공포영화, 액션영화를 스크린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당연히도 그 재난과 공포, 액션에서 벌어지는 살상들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프레임 안에 안전하게 갇혀 있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공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할 영화가 현실로 닥쳐올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회한이 따른다.

 

ⓒ 전주국제영화제

3. 3번의 리테이크(retake), 그리고 속죄

과거에는 픽션 속 세계가 현실로 찾아와 참극이 일어났다면, 이번엔 현실의 레오노르가 역으로 시나리오 속으로 들어가서, 마치 창조주가 인간사에 개입하듯 대안적인 결말로 서사를 이끌려고 한다. 특히 결정적인 장면, 조연이었던 론왈도가 시장의 총을 맞는 장면에서 레오노르는 총 3번의 리테이크를 한다.

1. 론왈도가 총을 맞고 죽는다.

2. 레오노르는 아직 살아있는 론왈도를 껴안는다.

3. 루디가 함께 영화 씬 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레오노르에게,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한다.

에스코바르 감독은 "인생을 편집할 수 없다"라고 극 후반부에 말한다. 이처럼 인생은 원테이크로 종결되기 때문에 이미 벌어진 일을 삭제 처리할 수도, 순서를 편집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변경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만은 같은 씬의 서로 다른 3번의 반복이 손쉽게 가능하다. 첫 번째는 실제로 벌어진 일을 상기하는 그의 아들의 죽음 장면을 재현한 씬이 나온다(1). 그다음은 레오노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들을 품에 안는다(2) 마지막으로 루디와 레오노르는 서로를 이해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3). 이 3개의 대안 시나리오 중 무엇이 영화에 쓰였는지 관객은 끝내 알지 못한다. 그러나 3가지 모두 레오노르의 영화가 다시 쓰이고,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를 함축하고 있다.

오래 방치해 둔 미완성의 시나리오가 모두의 도움으로 영화화되는 순간, 레오노르는 현실을 외면하고 거의 다 죽어가는 과거의 영화라는 세계로 도피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비로소 놓여날 수 있을 것이다. 론왈도는 죽었고, 아들 루디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떠나려고 하는 현실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환영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로부터, 그녀는 비로소 해방될 수 있다.

 

ⓒ 전주국제영화제

4. 영화 속 영화 속 영화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 안에는 총 4가지 층위의 레벨이 있다. 먼저 첫 번째 층위로는 좁은 화면비의, 조악한 감정 연기와 액션을 보여주는 마초 스타일의 액션영화가 있다. 두 번째 층위로는 레오노르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가 있다. 이 층위에서는 의식 불명인 레오노르를 깨우기 위해 다른 젊은 감독이 그녀의 시나리오를 동시대를 배경으로 재해석한다. 당시 과거 배우들의 나이와 비슷한, 현시대의 배우들이 기용되어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두 영화적 세계를 모두 관장하는 에스코바르 감독과 제작진이 있다. 마지막 네 번째 층위로 그녀가 나오는 장면을 화면으로 보고 있는 우리, 관객이 있다.

이 여러 층위는 서로 엄격하게 분리된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다공성 혹은 불투명성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엔딩 직전, 에스코바르 감독은 한 건물 옥상에서 자신이 만든 영화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에 대해서 인터뷰를 한다. 여기서 그녀는 인터뷰어에게, 아니 우리 관객에게 질문한다. '지금 여기서, 론왈도가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녀의 말에 따라서 론왈도가 세 번째 층위에 등장한다면, 그는 허구인지 실제 인물인지, 죽은 자인지 산 자인지, 혼선이 생긴다. 갑자기 3번째 층위에 나타난 론왈도, 그는 누구인가? 어디에도 뚜렷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이제 무의식에서 깨어난 레오노르는 좁은 4:3 화면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직접 열어젖힌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한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렇듯 기이한 구조를 가진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는 이면에 깊은 회한과 속죄, 끝나지 않는 애도라는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 마치 영화 <어톤먼트>(2007)의 주인공 브라이오니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세실리아와 로비 커플에게 현실과 다른 결말을 선사하면서 속죄를 대신했던 것과 비슷하게, 죽은 혼을 위로하는 역할을 '영화’가 대신해 주고 있다. 영화가 우리 인생의 과오를 편집해 줄 수는 없겠으나, 그 안에서 우리는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고, 속죄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여 가족들의 이해와 지지를 받으며, 마지막 한바탕의 춤을 출 수 있다. 그다음에 레오노르가 만들 영화가 무엇이든, 끝끝내 완성한 시나리오는 그다음의,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가게 해줄 것이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Monster Jimenez, Mario Cornejo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 
Leonor Will Never Die
감독
마르티카 라미레스 에스코바르
Martika RAMIREZ ESCOBAR

 

출연
셰일라 프란시스코
Sheila FRANCISCO
봉 카브레라Bong CABRERA
록키 셀럼바이즈Rocky SALUMBIDES
안소니 팔콘Anthony FALCON

 

제작 Monster Jimenez, Mario Cornejo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9분
등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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