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th JIFF] '새벽과 새벽 사이' 여전히 움직이는 것
[23th JIFF] '새벽과 새벽 사이' 여전히 움직이는 것
  • 이현동
  • 승인 2022.05.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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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생략하지 않고 여전히 우리에게 물어오는 물음"

자본주의로 발생하는 인간성의 퇴행을 리얼리즘이나 풍자의 형태로 진술한 영화들은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여 모든 이에게 심문의 대상으로 위치하기 마련이다. 시대를 갱신하기 위해 크든 작든 시도된 영화의 주제로 자본주의를 긍정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엔 모든 이가 체계로부터 심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장처럼 새겨진 자본주의의 유령은 지속해서 응시의 대상으로 결합된다.

이것이 해소되길 갈망하는 건 이 왕국을 건설한 인간의 책무를 스스로 봉합하기 위한 일종의 반복적이며 모순적인 작전을 거듭하는 아이러니에 기인한다.

시스템은 그렇게 회귀하며 관성처럼 출몰한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 폴리스>(1927)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 비토리오 데 시카의 <움베르토 D>(1952)와 같이 고전으로 분류되는 작품뿐만 아니라 다르덴 형제의 대표작인 <로제타>(1999)와 같은 작품들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교착된 개인과 집단이 여전히 체계의 희생양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목격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경유지에서 나름의 기법을 갖고 연출한 '셀만 나자르' 감독의 영화 <새벽과 새벽 사이>(2021)는 하루 사이에 발생한 사건들 속에 발생하는 관료주의와 자본주의의 민낯을 건조한 톤으로 관조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앙드레 바쟁이 네오리얼리즘의 정의를 언급할 때와 그 유사한 형식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양식을 복권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바쟁은 네오리얼리즘이 예술적 재창조를 위해 현실을 '요약'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현실을 '관찰'과 '주시'의 대상으로 놓는다고 설명했다.

이는 <새벽과 새벽 사이>가 주력하고 있는 주제를 대하는 태도와 그 관련성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셀만 나자르는 이 영화를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서사로 결말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호소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어, 이 영화가 추동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쉽사리 지적하지 않는 어느 적막한 상태로 유보한다.

또한, <새벽과 새벽 사이>의 카메라 앵글은 등장인물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클로즈업 등에 쇼트를 할애하지 않고, 앵글의 움직임마저도 부동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 부동한 앵글을 통해 유일하게 그 유동성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사건의 전말을 발견하면서 변화하는 카디르의 감정이다. 더 나아가서 영화에서 유일하게 반응하는 감정의 변화도 도덕과 윤리로 치환할 수 없는 어떤 비정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이 일은 현실의 상흔처럼 대중들에게도 실제 하여 상기된다.

결론적으로 <새벽과 새벽 사이>는 움찔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에 봉착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응시'하는 영화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우리는 맨 처음에 <새벽과 새벽 사이>의 전망을 예고하는 듯한 장면을 첫 번째 쇼트에서 볼 수 있는데, 관료주의와 자본주의가 혼합된 공장이란 세계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한 인물로부터 이 이야기는 노동의 수단으로 전복된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자금을 축적하기 위해 고객을 응대하고 사업을 확장하고, 그리고 물품을 납품하기 위해 기계를 작동시키는 이 순환의 과정에서 인간은 기계처럼 움직인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1936)에서 공장에서 일하다 강박에 빠져 정신 병원에 가는 그 일련의 과정처럼, <새벽과 새벽 사이>에서 한 직원이 사고를 당하는 것은 이와 유사하게도 과부하 된 노동에 관한 또 하나의 사례로 지시되지만, 영화는 이 지점에서 정체하지 않고 카디르의 시선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섬유공장의 창업자인 아버지 이브라힘(위날 실버)과 경영자인 두 아들 할릴(베디르 베디르)과 카디르(무카히트 코카크)는 공장의 운영방식에 대한 문제점을 그동안 제시하지 못하다가 결정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사고로 인해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목소리로 분열된다. 직원이 사고를 당한 후에 병원으로 이송될 때, 직원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카디르와 할릴은 직원의 안부보다 보험의 유무가 더욱 중요하다. 공장의 대표로 아버지와 형을 대신해 카디르는 변호사를 찾아가 함께 이 사건을 잘 마무리하고자 한다.

변호사와 함께 카디르는 병원에 찾아가 직원 무라트의 아내 세르필(네자케트 에르덴)을 안심시키기 위해 작은 사고라고 말한다. 세르필의 염려와는 무관하게 아버지의 말에 따라 무라트의 면회가 내일부터 가능하다고 말하는 카디르의 굳은 믿음은, 이와 반대로 그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의심도 하지 않는 또 다른 부주의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회사의 입장에서 돈을 주어 사건을 일단락하려는 의도를 세르필은 간파하기는커녕 그녀는 남편의 안부를 뻐꾸기처럼 묻는다.

이 과정에서 변호사는 생각대로 반응하지 않는 그녀에게 오히려 남편이 술을 먹고 일을 했다며 그의 부주의에 대해 성을 낸다. 다시 돌아가 변호사와 가족이 모여 이 사건을 의논할 때 사건 당시에 술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이 인정하는 서명을 받는다면 이 일이 잘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라트가 만약 죽는다면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는 이 말에는 개인뿐만 아니라 공장 운영에 있어서도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는 말로도 환원된다.

 

ⓒ 전주국제영화제

카디르는 홀로 병원에 찾아가 무라트의 가족과 마주하며 서명을 위한 진술서를 읽을 때, 무라타의 동생은 '술 문제로 자주 지적을 받았으며'라는 대목에서 의문을 품고 공정하지 않다며 항의한다. 결국, 합의가 결렬된 상태로 정신없이 여자친구의 집에 방문하는 그는 모든 것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자친구 부모의 요구에 마지못해 악기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 또한 구조에 굴복되어 기계처럼 감정 없이 행위 하는 노동자로 비친다. 직물공장에 다시 나온 카디르는 사고 난 기계가 납품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 돈 때문에 수리를 하지 않는다는 관리자의 말에 분노하면서도 가족이라는 명분 때문에 엄습하는 그의 감정의 상태는 이 영화의 엉킨 무력하고도 공허한 의식들이다.

면회를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는 무라트의 가족을 뒤로한 채 카디르는 무라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의사에게 그의 상태를 묻는다. 의사는 그는 죽었으며 알코올 농도가 높지 않았고, 사건 시점을 기준으로 훨씬 이전 것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수술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으나 방관했던 아버지는 카디르에게 "양심에 거리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윤리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가를 떠나 서두에 언급했듯이 자본이 정복한 세상에서 아버지의 결정은 모든 이가 회피할 수 없는 심문이자 물음이기도 하다. 결국, 사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 카디르는 징역살이를 피하기 위해 도피를 권하는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 전주국제영화제

 

카디르는 아침 일찍 세르필에게 찾아가 사실대로 술을 안 마셨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세르필은 여전히 무라타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이처럼 <새벽과 새벽 사이>는 수리를 하지 않은 기계와도 같은 무라트의 행방을 여전히 지속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노동의 현실로 반영하면서도, 그 현실을 악용하는 악덕 업주에 관한 통상적인 클리셰를 활용하지 않는 시선의 영화이다.

이처럼 기계화된 인간의 형상은 현실이란 토양에 깊숙이 정박한다. 특별히 마지막 쇼트를 축조하는 기계들의 반복적인 운동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료주의조차도 삭제된 폐허를 목도하는 이 장면은 노동의 환경이 갱신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며 이미 기계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인간의 비명이 목소리로 들리는 듯하다. 심연으로 침전된 '새벽과 새벽 사이'를 오가며 노동자들의 행방보다 납품이 소중한 이 현실을 우리는 무엇이라 칭해야 할까. 그렇게 오늘 새벽에도 기계는 작동하고 있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Kuyu Film, Fol Film, Karma Films

새벽과 새벽 사이
Between Two Dawns
감독
셀만 나자르
Selman NACAR

 

출연
무카히트 코카크
Mucahit Kocak
네자케트 에르덴Nezaket Erden
위날 실버Ünal Silver
베디르 베디르Bedir Bedir
부르쿠 게다르Burcu Gölgedar
에르뎀 세노카크Erdem Senocak
무스타파 쇤메스Mustafa Sönmez
시하트 수바리오글루Cihat Suvarioglu

 

제작 Kuyu Film, Fol Film, Karma Films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1분
등급 G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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