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영화'에 대한 개인적이고 질척이는 단상들
'소설가의 영화'에 대한 개인적이고 질척이는 단상들
  • 김민세
  • 승인 2022.05.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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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홍상수의 러브레터"
ⓒ 영화제작사전원사

최근 홍상수의 영화에는 이전에 볼 수 없던 '기이한 이미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세 공간을 잇는 산의 이미지(<도망친 여자>(2019)), 등장인물을 따라 화면 밖의 존재를 응시하는 이미지(<인트로덕션>(2020)), 멀찍이서 인물들을 다시 바라보며 객관화하는 이미지(<당신얼굴 앞에서>(2020)), 이것은 분명히 누군가의 시선으로 읽힐 수 있다. 동시에 그 시선의 주체를 명확히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것은 등장인물의 시선인가. 카메라의 시선인가. 홍상수의 시선인가. 영화의 시선인가. 아니면 영화라는 시선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도망친 여자>의 '감희'는 이러한 질문을 회피하듯이 영화 스크린으로 도망쳤다. <인트로덕션>의 '영호'는 바다라는 스크린에 뛰어들었다. <당신얼굴 앞에서>의 '상옥'은 꿈이라는 영화에게 질문했다. 각 영화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시선에게 '보는 것', '감각하는 것', '다시 질문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러한 시선이 주는 질문과 그에 조응하는 듯한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영화가 우리에게 어떻게 질문하고 대답하는지, 혹은 우리가 영화에게 어떻게 질문하고 대답하는지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 슬퍼지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영화를 보고 있어도, 냉정하게 말해 영화는 우리를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사되는 빛에 홀린 듯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아도, 영화는 2시간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눈을 감아버린다. 그저 우리의 얼굴을 한없이 비추다가 백색의 스크린을 드러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에게서 무엇이라도 보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영화관 좌석에 앉는다.

그러므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닿지 못하는 일방적인 사랑을 운명으로 하고 있다. 홍상수의 최근 세 영화들에서 등장한 기이한 시선들은 그 사실 아래에서 간신히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영화제작사전원사

이런 질문들을 지닌 채 <소설가의 영화>라는 제목을 들여다본다. 소설가의 영화. '소설가'와 '영화'라는 다소 미끄러지는 두 기호. 그렇기에 '소설가의 영화'라는 말은 영화라는 대상에게 소설가라는 주체가 손을 내밀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소설가 '준희'(이혜영)가 영화를 찍겠다고 한 결심은 그런 의미이다.

준희에게 영화라는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원(서영화)의 서점으로 제시된다. 서점 안 별도의 공간은 영화에서 초반부와 후반부에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장면의 전반적인 대화 주제는 주로 준희와 주변 사람들의 작가 활동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영화를 읽어낼 수 있는 이유는, 그 대화의 주제가 결국은 영화(영화의 은유와 준희의 영화)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초반부의 장면에서 준희는 서점 직원 현우(박미소)에게 수화를 배운다. 이는 소설의 언어를 쓰던 준희가 몸짓과 운동으로 작동하는 영화의 언어를 배우는 것의 은유나 다름없다. 후반부의 장면에서는 준희가 길수(김민희)와 영화를 찍기로 한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어지는 만수(기주봉)와의 대화 속에서 준희의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극영화와는 다를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세원이 현우에게 호통을 치는 바람에 준희의 첫 서점 방문이 실패했던 것을 포함했을 때, 준희는 영화라는 문을 총 세 번 두드린 셈이다.

 

ⓒ 영화제작사전원사

그렇다면 준희는 왜 소설이 아닌 영화를 결심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영화가 이미 한번 준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영화감독 효진(권해효)이 준희와의 영화 작업이 무산된 것에 대해 사과한다. 준희는 이에 대한 서운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그의 렌즈로 산책길을 본다. 최근작에서 볼 수 있던 정체 모를 이미지로 재현되는 준희의 시선. 영화가 준희를 거절했을 때, 그녀는 다시 한번 영화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 산책길에 당도해 만난 길수와 함께 영화를 구상한다.

여기서 말한 영화들(준희를 거절한 영화와 준희가 응시한 영화)은 '영화'라는 같은 단어로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이다. 가정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영화이다. 첫 번째는 효진의 영화. 효진은 제작사 측의 문제로 준희의 소설로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사실 그 영화는 무산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드는 영화는 애초에 준희의 영화가 아니고 어쩌면 효진의 영화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영화는 불특정 다수에게 돈을 받고 보일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 영화는 돈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준희의 영화. 준희는 자신이 만들 영화에 대해 '카메라와 배우가 자연스러운 관계 하에서 작동할 것이며, 그렇기에 영화는 배우의 자연스러운 진짜 모습을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녀는 영화에서 '무엇을' 찍을 것인지 이전에 영화를 '어떻게' 찍을 것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니까 준희가 설명하는 것은 소설가의 '영화'보다는 '소설가'의 영화인 것이다. 그 순간 이미 준희는 (영화감독으로서) 작가가 되었다고 느껴진다.

 

ⓒ 영화제작사전원사

준희가 영화를 완성하고, 영화는 온전히 길수를 위해 상영된다. 길수가 홀로 영화관 좌석에 앉아 스크린을 쳐다볼 때, <도망친 여자>의 엔딩 장면에서 속 감희와 겹쳐 보인다. 그 일렁이는 바다의 스크린을 보면서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던 그녀는 이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전작들에서 등장했던 정확히 닿지도, 주체를 정확히 알 수도 없던 시선들은 배우 길수가 감독 준희의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상황 안에서 어떻게 재현될 것인가.

이제 길수(김민희)는 꽃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다가온다. 카메라 뒤에 있는 감독(홍상수)에게로, 스크린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에게로. <소설가의 영화>는 "영화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혹은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영화는 그 안에 있는 진짜 존재는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위로이자 고백 같은 영화이자, 영화를 짝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홍상수의 선물. 또는 영화를 향한 러브레터이다.

영화 상영이 끝난 후, 길수가 로비로 나오지만 준희는 보이지 않는다. 크레딧 뒤에 나온 이런 엔딩에 당황스러워지다가도, 영화가 주었던 용기와 희망을 믿기에 이 균열과 엇갈림의 엔딩을 어떻게든 봉합해보려고 한다. 이 엔딩을 현실 세계에서 준희와 길수의 엇갈림으로 본다면, 이전에 있던 그들의 영화적 만남이 영화 세계 안에서는 고유하게 지켜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그 소중한 만남을 지켜내기 위해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들듯이. 이렇게 극단적 가정까지 밀고 가서 희망을 보고 나니 <소설가의 영화>는 그의 어떤 작품들보다 영화라는 매체를 긍정하는 영화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P.S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영화 연출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얼마 전 첫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소설가의 영화>를 일부러 개봉 직후에 보지 않고 뒤늦게 봤다. 준희가 길수에게 '어떤 영화를 찍을지'에 대해 신나게 설명할 때, 스스로 계속 되뇌던 말이 홍상수(준희)의 언어로 재현되자 뭉클해졌다. 준희의 그 말이 잊히지 않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영화는 누구의 영화가 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섣부를지 몰라도 이제는 영화가 나를 바라보길 바란다. 다가오길 바란다. 내 카메라 안에 있는 존재를 믿는다. 영화에게 고맙다 말하고 싶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영화제작사전원사

소설가의 영화
The Novelist's Film
감독
홍상수
Sang-soo Hong

 

감독
이혜영
김민희
서영화
권해효
조윤희
기주봉
박미소
하성국
이은미

 

제작 영화제작사전원사
배급 영화제작사전원사, 콘텐츠판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4.21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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