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프랑코] '에이프릴의 딸' 바다가 남긴 인상에 대하여
[미셸 프랑코] '에이프릴의 딸' 바다가 남긴 인상에 대하여
  • 김민세
  • 승인 2022.04.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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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바다가 된다"
ⓒ 엣나인필름

모든 일은 바다에서 일어난다. <에이프릴의 딸>의 첫 장면을 보면서 이 뜬금없는 명제를 떠올려본다. 클라라(호안나 라레키)가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외화면에 있는 존재를 의식하게 하는 두 가지 소리가 들린다. 방 안에서 남자 친구 마테오(엔리케 아리존)와 관계를 맺고 있는 발레리아(안나 발레리아 베세릴)의 소리. 그리고 집 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카메라조차도 문 뒤에서 바라볼 정도로 은밀한 둘의 순간에, 그것을 넘나들고 지배하듯이 등장하는 바다의 존재는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이미 미셸 프랑코의 전작에서 인상적인 바다의 이미지를 봐왔기 때문임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영화 <애프터 루시아>(2012)에서 또래 친구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알레한드라를 집어삼키는 파도를 봐왔기에, 그리고 딸 알레한드라의 복수를 하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에 사람을 집어 던진 로베르토와 그가 운전하는 보트가 만드는 물살을 봐왔기에, 충격적일 정도로 사실적이고 인상적인 바다의 이미지를 봐왔기에, <에이프릴의 딸> 전반에 넘실대는 바다의 존재는 그 의미를 넘어 촉각적 반응으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처럼 풍경이라는 거시적 시공간이 등장인물들을 압도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에이프릴의 딸>은 프랑코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등장인물들의 욕망에 따라 서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바다는 이들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입장과 욕망에 따라 해변의 공간을 오고 간다. 에이프릴(엠마 수아레스)이 클라라를 다이어트 시키기 위해 함께 달릴 때, 발레리아와 마테오가 갓 태어난 아기 카렌을 데리고 소풍을 나갈 때, 

<애프터 루시아>와 달리' 바다'는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마치 영화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인 것처럼 그 안을 차지하고 있다.

 

ⓒ 엣나인필름

물론, 후반부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 멕시코시티로 변하면서 바다는 영화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가 주고 있는 바다의 인상을 중심으로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에이프릴의 딸>에서 바다가 등장한다는 것, 또는 바다가 지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쩌면 첫 장면을 보고 불현듯 떠오른 그 명제가 영화를 제일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먼저, 이러한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다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첫 장면을 여는 4분가량의 롱테이크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클라라가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문 너머에서는 발레리아와 마테오가 관계를 맺는 소리가 들린다. 클라라가 잠깐 자리를 비우면 문을 열고 임신한 발레리아가 나온다. 집 밖에서 클라라가 엄마 에이프릴과 통화를 하고 있고 그 기척을 인지한 발레리아가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이를 팔로우한 카메라 너머로 창밖의 바다가 보인다. 그리고 마테오가 방에서 나온 뒤 서로가 대화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적인 롱테이크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은 두 가지이다. 첫째, 밖에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안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일을 하는 발레리아와 클라라. 둘째, 조금 전까지 관계를 갖던 발레리아가 사실은 만삭의 임신을 한 상태였다는 사실. 이러한 부분들을 단순히 성과 임신에 대해 무지한 미성년자에 대한 설명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이전의 맥락 없이 건조한 톤으로 그려지는 이 장면은 영화의 시작을 여는 어떠한 신화 또는 상징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약적이긴 하지만 이런 전제 안에서 발레리아는 관계 후에 바로 만삭의 임신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생명이 탄생하기까지의 관계, 착상, 수정, 임신, 그리고 그 후 수개월의 시간은, 상징적으로 이 한 장면에서 모두 일어난 것이다. 또 이 장면의 모든 시간 안에서 바다는 그 존재감을 뿜어내고 스스로 존재를 숨겼다가 드러냈다가, 다시 숨기기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양수의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는 이 바다는 발레리아의 딸 카렌이 탄생(출산을 제외하고)하는 순간과 함께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카렌을 시작하고, 사건을 시작하고, 영화를 시작한다.

 

ⓒ 엣나인필름
ⓒ 엣나인필름

두 번째 가정. 바다를 등지는 것은 욕망의 전이이다. 에이프릴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발레리아의 모든 것을 빼앗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먼저 바다를 등지기 (또는 등지게 하기) 시작한다. 카렌을 자신의 전 가정부가 있는 곳으로 입양을 보내고, 마테오를 멕시코시티에 불러와 유혹하며, 그곳에서 마테오와 가정을 꾸리기 위해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다. 그리고 발레리아가 바다에 남아있다. 에이프릴, 마테오, 카렌을 찾을 수 없는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고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그 이후로 바다를 등지고 멕시코시티로 향한다. 그때부터 발레리아의 새로운 욕망에 대한 여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마지막 가정. 바다는 모든 것의 끝이다. 에이프릴을 둘러싼 모든 일들이 마무리된 후, 발레리아는 카렌을 되찾고 마테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이때 발레리아는 바다로 놀러 가자는 식의 말을 하며 카렌을 달랜다.) 바다를 등진 멕시코시티에서 다시 바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는 그 순간, 발레리아는 아이를 들고 또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녀의 그런 돌발적인 행동은 마테오를 이용해 카렌을 되찾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자식을 사랑하는 마테오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발레리아가 복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카렌과 택시를 타고 떠날 때, 모성애의 자리에 욕망이라는 단어가 대체한다. 이렇듯 욕망은 에이프릴에서 발레리아로 옮겨간다.

'바다'는 모든 곳의 끝이지만 발레리아는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부터 '에이프릴의 딸'에서 '발레리아의 딸'이라는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된다. 마치 그가 찍은 일련의 두 영화들이 우리를 이야기에서 내릴 수 없게 하였듯이.

<에이프릴의 딸>을 두고 오가는 가장 많은 주제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속된 말로 '막장'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프랑코의 전작들에서 봐왔듯, 그의 영화는 결국 익히 알고 있는 서사를 관객과의 어떤 관계 안에서 진행시키느냐의 질문 안에서 작동한다. <애프터 루시아>, <크로닉>(2017)에 이어서 프랑코는 우리를 영화라는 실험, 영화라는 이야기에서 내려주지 않은 것일까. 이 작품을 통해 프랑코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고 멈추며 일련의 세 영화를 만들어 왔다고 느껴진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엣나인필름

에이프릴의 딸
April's Daughter
감독
미셸 프랑코
Michel Franco

 

출연
엠마 수아레스
Emma Suarez
안나 발레리아 베세릴Ana Valeria Becerril
호안나 라레키Joanna Larequi
엔리케 아리존Enrique Arrizon
헤르난 멘도자Hernan Mendoza
토니 댈튼Tony Dalton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제작연도 2017
상영시간 102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19.05.09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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