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4] '소설가의 영화' 진실된 언어, 진실된 영화
[홍상수 #4] '소설가의 영화' 진실된 언어, 진실된 영화
  • 이현동
  • 승인 2024.04.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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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과 다큐멘터리, 이 형식의 구분이 일상으로 매개되기까지"

인물들의 우발적인 경로로부터 이야기를 매듭짓는 홍상수의 영화는 최근 들어 배덕한 불륜과 남녀관계의 애증을 배제하고, 자기 성찰과 숙고의 목소리로 변용되는 경우들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전 작품들인 <인트로덕션>(2020) 이나 <당신얼굴 앞에서>(2020)가 보이스오버로 신의 이름을 호명하며 종교적 색채를 드러냈던 것은 감독의 자의식변화로 추정되는 상징적 징후인 셈일 테다. 그와는 별개로 이야기를 구현하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다. 특정한 사건 묘사 없이 기억을 재생하는 공간들과 이를 응대하는 일상대화들은 미세한 균열을 초래하며 관계의 가능성을 증폭하거나 감소시키는 특정한 그의 영화 언어는 <소설가의 영화>(2021)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그중에서도 가장 직관적인 증표인 자연주의의 성격을 갖고 인간관계의 위선을 분쇄하는 특권적인 작품이다.

<오 수정!>(2000), <북촌방향>(2011), <그 후>(2017), <강변호텔>(2018), <인트로덕션>(2020) 에 이어 홍상수의 6번째 흑백영화인 <소설가의 영화>는 '책의 색감과 질감을 소유한' 흑백영화이다. 책의 표면을 구성하는 흑색 언어들과 백색의 배경이 묘사하는 시각적 단조로움이 시대를 간직하는 영구적인 표현법으로 가동된다고 한다면, 흑백영화 또한 형식의 단면에 오랜 시간 부착된 어떤 원소적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시금 복권된 이 윤곽은 형식의 단면이 아닌 의식의 내부까지 침투하는 속성으로 진화한다. 외면의 형식들이 내면의 형식으로 깊숙이 도달하기까지 이 영화는 점차 규범을 전복하는 준희의 격양된 호소로 이 유희를 활성화한다. 소설가의 언어와 연기자의 언어가 등가적인 상태의 언어로 현시되기 위한 결정적인 단어는 '진짜'라는 단어이다.

 

영화 <인트로덕션>(2020) ⓒ 영화제작사전원사

진짜와 가짜

진짜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선은, <인트로덕션>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배우를 지망했던 영호가 나이 든 남자배우(기주봉)와의 대화에서 여자친구의 간섭 때문에 실제 연기를 집중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한다. 결국 연기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진짜 존재'에 대한 함구는 의식의 지평을 재확인하는 방식으로 해소된다. '진짜'로 도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그의 몸짓은 자연적이고 편안한 상태의 진짜 연기되는 셈이다. 서사를 설계하거나 서사를 연기하는 이들이 '진짜처럼'이 아닌, '진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들이 무엇인가 실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소설가의 영화> 속 '소설가'인 준희(이혜영)와 '연기자'인 길수(김민희) 또한 '진짜'와 '가짜'의 간극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재구축해야 하는 필연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글을 쓰지 못하고 있던 준희나, 연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길수, 둘 다 이러한 경계에서 온전하게 자신을 규정하지 못한 채 각기 다른 장소를 배회한다. 맨 처음 준희가 방문한 북 카페란 장소는 그녀가 여전히 소설가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예증하고, 이는 <소설가의 영화>에서 다시금 회귀하는 장소로 복권되거나 극복되는 장소로 위치한다. '어떻게 오셨냐'는 북 카페를 운영하는 후배 세원(서영화)의 물음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준희의 대답은 그녀가 소설가의 정체성이 공간적으로도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에 북 카페는 타인의 언어를 습득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준희는 연극영화과 출신의 북 카페 직원 현우(박미소)가 수화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날은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라는 문장을 수화로 번역해달라는 준희의 요청은 그녀의 자의식의 행방에 대한 단서이다. 부분적으로 수화를 학습하는 과정과 다시 반복해서 복습하는 과정에 이르러 준희는 안 들린다는 가정을 하고 소리 없이 동일한 수화를 해보자고 말한다. 언어가 소멸된 세계, 이 고요한 세계에서 이 흑백영화는 영화가 태동한 태초의 시대인 무성 영화의 시대, 뤼미에르적 재현의 시대, 곧 영상이 가진 시각의 즉물성이 오인되지 않는 진짜의 시대로 전환된다.

 

ⓒ 영화제작사전원사
ⓒ 영화제작사전원사

소설가인 준희는 존재를 지칭하는 위선적 환유를 부정한다. 하남에 위치한 유니온 타워에서 우연히 마주한 감독 효진(권해효)과 그의 아내 양주(조윤희)와의 대화에서 '카리스마'라는 단어와 '맑다'라는 관념적이고 추상화된 이미지의 단어는 온통 공허한 환유의 언어이면서 준희에게 있어 주관이 삭제된 가짜의 언어들이다. "뭐가 맑아졌냐"는 준희의 물음과 "영화를 만드는 마음이 달라졌다"는 감독을 향한 준희의 조소는 마치 홍상수의 영화를 조롱하는 메타적인 문장처럼 들린다.

'사는 건 개판이지만 영화만 괜찮으면 된다'인지, 아니면 '사는 것을 만족시키자'라는 것으로 바뀐 것인지를 묻는 것에서 홍상수 감독의 세계는 점차 가짜에서 진짜로 이행함을 지시한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홍상수의 카메라가 이러한 의식을 형상화하는 순간은 이 타워에서 감독 부부의 대화를 간과한 채 망원경을 통해서 산책로를 관찰할 때이다. 준희는 감독 부부의 위선적인 대화보다 자연의 풍광을 관찰하는 것에 자신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통상적으로 인물을 특정하여 줌인의 기법을 사용하던 그의 앵글이 자연으로 무대로 변용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 영화제작사전원사

아울러 <소설가의 영화>에서 가장 폭소를 자아내는 장면은 산책로에서 만난 감독 부부와 연기자로 활동했던 길수(김민희)와의 대화이다. 감독이 길수가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깝다고 언급할 때 준희는 발끈하고 뭐가 아깝냐고 묻는다. 그 인생을 존중해 주면 되는 것이고 이분보다 자기 인생을 사랑할 수 있냐고 길수의 삶을 옹호할 때 감독은 때가 있지 않으냐며 반문하는 이 이야기의 형체는 실제 김민희의 삶을 투영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것이 실제 연기자인 김민희의 삶을 투영하게끔 한 홍상수의 디렉션이 개입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없지만, 이 영화는 이전보다 진짜에 다가서는 이야기임은 분명해 보인다.

부부가 떠나고 영화감독을 희망하는 조카 경우(하성국)와의 만남에서 준희와 길수는 함께 영화를 만들자는 대화를 나눈다.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진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준희의 말에 경우는 '다큐멘터리'의 장르를 말하는 것이냐고 되묻지만, 그녀는 '이야기'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당혹스럽게 마주하는 그들의 영화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서사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흔히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브이로그처럼 촬영된 영상에는 결혼 노래를 부르고 신랑 없이 '신부 입장'을 읊조리며 꽃다발을 엮는 길수와 중년의 여성의 모습이 담겨있다. 흑백의 영상이 컬러로 전환되는 마지막 순간은 픽션과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이 붕괴되면서 시각적으로 이 영화는 진짜가 된다.

 

ⓒ 영화제작사전원사

<소설가의 영화>는 이처럼 본질적인 영화의 형식을 되짚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영상이 창작자의 의식을 간직하고 자증(自證)하는 서사의 덩어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더욱 진짜에 가까워진다. 홍상수의 대부분 영화에서 '영화감독'이 등장한다는 점, 이번 영화에선 특별히 그의 연인인 김민희가 '연기자'로, 그리고 감독 부부로 연기하는 효진(권해효)와 양주(조윤희)는 실제 부부라는 사실은 이 영화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요소이다. 소설이 비록 언어로 변환된 의식의 용어일지라도 시각적 용어로 변용된 영화가 갖는 위상은 동일한 것임을 지시한다. 만약 그가 지향하는 영화가 형상이 일상을 포획하는 것에서 '진짜'를 규정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은 그의 픽션의 한계를 초월하여 삶을 고지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일상은 그렇게 진실된 언어, 진실된 영화로 관객들에게 깃든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영화제작사전원사

소설가의 영화
The Novelist's Film
감독
홍상수
Sang-soo Hong

 

감독
이혜영
김민희
서영화
권해효
조윤희
기주봉
박미소
하성국
이은미

 

제작 영화제작사전원사
배급 영화제작사전원사, 콘텐츠판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4.21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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