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82명이다. 오늘 우리는 1946년 시작된 칸영화제부터 현재까지 이 계단을 오른 82명의 여성 감독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다. 같은 기간 이 계단을 오른 남성 감독은 1,688명이다. (...) 우리는 카메라의 앞과 뒤에서 남성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케이트 블란쳇, 2018.05.12
최근 가장 열렬한 지지를 받는 서사를 뽑으라면 단연 여성서사이다. 단순하게 '여성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주인공이기에 가능해지는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건 '지금-여기'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봤던 것을 어제의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지금까지 외면했던지, 혹은 굳이 보려 하지 않았던지, 또는 보려 하지도 않았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이야기들이 (너무 늦었지만) 등장하고 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4), <캐롤>(2015), <쉐이프 오브 워터>(2017),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이 영화들은 비평적·상업적으로도 찬사를 받은 근래 만들어진 여성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가? 여성서사의 가장 높은 위치까지 간 이 작품들 모두 멜로영화라 점이다. 왜인가.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뭐 그럴 수도 있다. 이 작품을 만든 감독들이 '멜로를 만들어야 훌륭한 작품이 나올 거야'라고 생각하며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다시 묻건대, 왜 근래 나오는 다수의 다양한 장르 여성서사는 왜 이 영화들과 동등한 비교가 힘이 들까. 나는 여기에 이 멜로라는 장르에 여성서사가 위치할 수 있는 독보적인 위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멜로(melodrama)는 필연적으로 내밀한 이야기이다. 이 내밀성은 거대한 이야기와 전혀 다른 결을 가진다. '세계'라는 거대한 것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닌, 더욱 내밀한 것의 가치,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순간에 피어나는 어떤 반짝이는 순간. 이 내밀함이 결코 세계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오히려 이 내밀함이 세계의 가치와 대립항을 세우기에 세계와 분절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 내밀성은 세계와 대항한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기에 만들어지는 긴장상태가 존재한다. 이 긴장이 영화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많은 멜로(이성애 중심)의 대다수 작품이 대중친화적이었다면, 여성서사로 만들어진 멜로는 다른 곳에 자신의 위치를 가질 수 있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을 생각해보자. 테레즈(루니 마라)가 처음 캐롤(케이트 블란쳇)을 보았을 때, 그녀는 감정을 느낀다. 그녀가 본 건 그저 한 '사람'이 아니다. 사랑의 대상을 바라보는 눈빛이다. 연기만 이렇게 연기한 것이 아니라 극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표현되고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 멈추어버린 장난감 기차는 '사건' 그 자체를 의미하며 영화 중반부에 그 기차가 캐롤의 방에서 다시 달리기 시작하며 두 사람의 진행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여행은 어떠한가. 눈이 내리는 날 터널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담는 카메라는 초점을 일부러 틀어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더불어 디졸브로 화면을 연결시키며 환상적인 인상을 남긴다. 이제 두 사람이 시작하는 여행의 전반을 암시한다. 이때 두 사람을 촘촘히 연결하는 감정을 이루는 재제는 시선이다.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 서로 교환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시선. 이 시선에서 주체는 객체가 되고, 객체는 다시 주체가 된다. 우위의 관계가 아니다. 수평의 관계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여행은 여행일 뿐이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귀결이다.(그렇기에 장난감 열차는 궤도를 빙글빙글 돌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사랑은 세계의 영향으로 무너진다. 세계는 위계로써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계는 두 사람을 무참하게 짓밟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무결한 사랑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캐롤은 지난 여성서사의 비극적 주인공들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캐롤이 떠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간다. 그리고 바라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는 식당에서 오로지 캐롤에게만 초점을 맞춰 바라본다. 이때 우리의 시점은 테레즈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다시 130도 정도 뒤에 있는 캐롤을 향해 카메라는 다가간다.
이 순간이 우리가 관객이 아닌 루니 마라의 시선으로 캐롤을 보게 되는 기적과 같은 순간이다. <캐롤>은 두 사람의 시선을 넘어 관객의 시선을 영화의 인물 안에 집어넣어 보여주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어떠한가. 그녀의 영화도 '시선'으로 영화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더 용감한 선택을 했다. 설정 자체를 여성의 세계로 만든 것이다. 이 작은 세계는 남성의 권위로 만들어진 닫힌 세계이지만 이 안에서 여성들은 서로의 삶을 독자적으로 만들 수 있게끔 한다. 그리고 이 작동원리를 따라 영화 전체가 움직인다.
그림, 그것도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피사체와 화가가 가지는 시선의 교차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기묘한 긴장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형태를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을 2D의 형태로 구현해내는 것. 그러나 한계가 있다. 우리의 인식에서 화가는 어떤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고, 피사체는 객체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는 행동의 유무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이 영화의 시대성을 생각했을 때 권력 자체는 엘로이즈(아델 애넬)가 가지고 있지만, 그림을 그리는 행위로만 본다면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가 모종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옷을 고르거나 포즈를 요구하는 등) 느껴진다. 그 때문에 이를 뒤집고자 마리안느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를 주문한다. 이때 그리는 '결혼 초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여성의 세계 안에 있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매개이자 시간으로 존재한다.
영화 전체를 보더라도 수평적인 구도로 인물을 배치하고, 부감(high angle)이나 앙각(low angle)보다는 패닝(panning)과 틸트(tilt)로 인물을 다룬다. 시아마는 시선의 움직임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들을 '같은 위치'에 놓고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개인의 내밀한 사정을 넘어 이 작은 세계를 외부의 세계(남성)로부터 안온하게 포옹해주는 동시에 대립되는 항으로 존재하게 만들 수 있었다. 동시에 내밀한 개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인간의 내면에만 빠지지 않을 수 있게 한 거대한 작품이 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오직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닌 여성(들)의 서사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영화의 결말에서 엘로이즈와 그녀의 딸을 담은 그림을 본 마리안느의 시선이 28이라는 숫자(두 사람의 추억을 상징)에 고정되고, 그 다음 마리안느가 바라본 엘로이즈를 부감 클로즈업으로 당겨 잡으며 영화가 끝이 났을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영화의 시선'에 대해 생각한다.
<캐롤>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는 방식으로 시대성 안에서의 비극적 사랑을 긍정한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세계 안에서 이 이야기가 가지는 현실성을 직시하는 동시에 그림을 그리던 순간과 뒤바뀌어버린 위치가 가지는 전복성을, 그리고 두 사람의 내밀성 모두를 관객의 마음 안에서 폭파시킨다. 이 시선이 가지는 영화 내부에서 길어 올린 의미의 확장은 여성서사 그 자체의 영역의 확장이라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그어진 한계선은 다음 영화들에 의해서 다시 그려지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오늘의 영화를 보았고 이제, 내일의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 여성 서사의 이야기는 어떤 형태와 방향으로 나아갈까. 새로운 한계를 그리는 영화들의 등장과 82명 그 이상의 수를 기다린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