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움' 비일상의 빛, 진실의 빛
'하모니움' 비일상의 빛, 진실의 빛
  • 김민세
  • 승인 2022.04.13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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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부조화라는 조화 속에서"
ⓒ Comme des Cinémas

<하모니움>이 비밀을 감추고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은 어딘가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람을 죽여 징역을 살았다는 야사카의 고백은 생각보다 빨리 등장하고, 회개한 뒤 선인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던 그는 욕망에 이기지 못해 토시오의 가정을 파탄 나게 하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토시오가 야쿠자 시절 야사카의 살인 사건에 가담했다는 사실 또한, 반전이나 진실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그전부터 징조가 반복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부족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야사카라는 인물을 통해 시작되는 토시오 가족의 균열에서 '가족'이라는 단어의 힘이 깨져버리는 순간이 허무하게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과거를 청산하고 행복하게 살던 가족이 씻을 수 없는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오히려 <하모니움>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영화 안에서 지우고 시작한다.

남편 토시오, 아내 아키에, 둘 사이의 딸 호타루. 이들이 극 속에서 처음 대화를 가지는 장면은 식사하고 있을 때다. 그리고 그 대화는 아키에와 호타루를 중심으로만 진행되고, 토시오는 마치 그 속에서 배제된 인물처럼 그려진다. 심지어 그는 딸 호타루에게 '새끼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한 어미 거미가 천국으로 간다면, 새끼는 지옥으로 가는 것이냐'라는 유년기의 딸에게 하기에는 이상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하모니움>은 기성 영화들이 그랬듯이 가정 파탄의 비극적 정서를 강화시키기 위해 사건 이전의 행복한 가정이라는 설정을 만드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이 영화가 세팅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사랑도 느껴지지 않게 목적과 무의미로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가족의 형태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잘못된 접근의 방식을 고쳐 말해 보자면. 이 영화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의미하게 서로를 붙들고 있던 가족 공동체가 진실 앞에서 모두 제자리로 가게 된다.'

 

ⓒ Comme des Cinémas

<하모니움>은 토시오 가족에 야사카가 발을 들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야사카의 첫 등장은 영화를 본 모두가 흠칫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기이하게 찍혔는데, 그 컷의 구도와 빛, 카메라와의 애매한 거리는 촬영 기술적으로도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집 안 공장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과도한 카메라 노출의 차이. 심한 광량 안에 있으면서 피사체에 어떠한 집중도 만들지 못하는 흰색 셔츠. <하모니움>의 비일상의 분위기는 그 컷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야사카는 마치 토시오 가족의 일상에 비일상으로써 침투하듯이 그의 집에 들어온다. 그 장면을 보다 보면 그는 그저 토시오의 죄책감이 불러온 과거, 또는 모든 것을 뒤바꾸러 온 신적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야사카를 초현실적 인물로 설명했을 때, 그는 과연 선인인가 악인인가. 그가 호타루에게 오르간을 가르쳐주며 딸에게 애정이 없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거나, 아키에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며 아내에게 무뚝뚝한 남편의 역할을 대신하는 모습들은 선한 면모라고 할만하다. 그렇다면 아키에를 유혹하고 강간을 시도하거나, 그 시도가 실패하자 호타루를 살해하려는 그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그는 악인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를 선인 또는 악인 사이 둘 둥 하나로 정의할 수 없을뿐더러, 영화 자체도 그것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그가 선인인가 악인인가라는 질문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면에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만, 사실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질문을 바꾸어보자면. 우리는 그를 움직이는 욕망은 무엇이냐고 질문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야사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욕망이라기보다는 <하모니움>이 야사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만들어가고자 하는 결말, 즉 서사의 욕망이다.

 

ⓒ Comme des Cinémas

<하모니움>이 향하고 있는 서사의 욕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야사카의 등장으로 인해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는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아키에와 불륜을 저지르고 강간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우발적으로 호타루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는 비일상으로써 일상에 균열을 만드는 존재'인가. 다소 위험한 접근일 수도 있겠지만, 결과를 바라보는 시선을 우회해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 사이에 있는 본질을 보려 한다. 야사카는 호타루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이를 통해 그는 이 가정에 아버지가 없음을 증명했다. 야사카는 아키에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토시오와의 결혼 생활에서는 느껴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사랑의 감정을 일깨워 주었다.(그의 방법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를 통해 그는 이 가정에 남편이 없음을 증명했다. 그는 비일상으로 왔지만, 동시에 가족의 균열을 비추는 진실로서 왔다. 그의 첫 등장과 함께한 기이하고도 눈 부신 빛은 비일상의 빛이자 진실의 빛이다.

그러므로 야사카가 하고 있는 행동은 가족의 고리라는 환상을 끊고 모두를 제자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다. 휴일에 가족들과 함께한 소풍에서 넷이 나란히 행복하게 누워있는 장면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허위의식이라는 듯이. <하모니움>은 그저 숨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네 사람의 구도로 영화를 닫는다. 어쩌면 그 마지막 장면이 완성하고 있는 대구(對句)가 야사카가, <하모니움>이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이다. 그리고 말 그대로 말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묵묵히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호타루(또는 야사카의 아들 타카시)가 진실을 등에 업은 채 물속을 헤엄쳐서 밖으로 나온다.

 

ⓒ Comme des Cinémas

<하모니움>은 이 모든 과정을 마치 데칼코마니를 만들 듯이 진행시킨다. 무언가 결핍을 갖고 있는 토시오 가족과 야사카 가족. 야사카가 저지른 과거의 살인과 현재의 살인. 법정에서 스스로 뺨을 때렸다는 피해자의 유족과 타카시의 뺨을 때리는 토시오, 그리고 자신의 뺨을 때리는 아키에. 그리고 가장 행복한 순간과 비극적인 순간에서 대구를 이루는 누워있는 네 사람의 구도. 이런 부분들은 등장인물의 자각 안에서도 일어나고 서사가 갖고 있는 정보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는 비정상적인 가족 공동체가 미끄러지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외면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교묘하게 짜인 반복과 차이의 형식으로 설명한다.

이 데칼코마니를 <하모니움>이 만들고 있는 '하모니'(harmony)라고 설명할 수는 없을까. 공동체의 부조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조화로운 형식. <하모니움>이 비일상과 진실을 탁월하게 드러내고 있는 데에는 이 부조화라는 조화의 형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Comme des Cinémas

하모니움
HARMONIUM
감독
후카다 코지
Fukada Koji

 

출연
아사노 타다노부
Tadanobu Asano
후루타치 칸지Kanji Furutachi
츠츠이 마리코Mariko Tsutsui
시노카와 모모네Shinokawa Momone
나가노 타이가Nagano Taiga
미우라 타카히로Takahiro Miura

 

제작 Comme des Cinémas

제작연도 2016
상영시간 119분
등급 15세 관람가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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