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th Venice] '일 부코' 하강의 무브 판타지
[78th Venice] '일 부코' 하강의 무브 판타지
  • 이현동
  • 승인 2022.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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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탐험, 의미의 탐험, 그 경계의 현존 속에서"
ⓒ Doppio Nodo Double Bind

이탈리아어로 '동굴'(Il Buco)이란 뜻을 가진 <일 부코>는 탐험의 영화이자 오감이 발동하는 체험의 영화이다. "동굴이란 특유의 공간이 파생하는 어둠을 즐기기에 최적화된 공간이 영화관"이라는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의 소개는, 이 영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남부 칼라브리아 내륙에서 시작되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동굴인 비푸르토를 탐사하며 진행된다.

<일 부코>의 스타일은 전적으로 '자연'이란 형식에 의존한다. 맨 먼저 우리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시각과 청각을 진동하는 광경들을 목격한다. 새벽과 아침으로 이어지는 달과 해의 풍광들과 지저귀는 새소리, 귀를 울리는 파리 소리, 사뿐히 귀속에 속삭이는 바람 소리 등에서 발화하는 자연이란 성질은 결국 미메시스의 경계를 넘어 실제로 소묘되는 회화적인 영화로 점유한다. 또한, 음조 있는 사운드트랙이 침입할 여지가 없이 의도된 영화이기도 하다. 게다가 카메라 앵글의 움직임도 미미한 이 정태적 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메타적인 구술로도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 Doppio Nodo Double Bind
ⓒ Doppio Nodo Double Bind

필자는 <일 부코>를 보며, 우연히 조우하게 된 오다 카오리(Oda Kaori)의 영화, 그리고 <퍼스트 카우>(2019)의 켈리 라이카트가 언급했던 피터 휴튼(Peter Hutton)의 영화가 동시에 떠올랐다. 광산의 깊고 어두운 공간을 작업하는 광부들의 하루 동안 일어난 일상을 다룬 오다 카오리의 <Aragane>(2015)과 자신의 딸에 대한 찬사를 자연의 풍경으로 묘사한 피터 휴튼의 <Landscape>(1987). 다큐멘터리 혹은 실험영화를 가정한 이 두 작품들은 내러티브와 사운드트랙을 의도적으로 소거하거나 희미한 상태로 배열하면서, 통상적으로 영화가 간과하고 있었던 근본적인 '형식'(뤼미에르식 실사묘사, 실재의 완벽한 재현)을 포착하는 것임을 직시하게 한다.

<일 부코>는 이 두 종류의 영화, 그 중간에 위치한다. 유일하게 대사가 등장하는 과거를 표상하는 흑백 장면의 플롯을 제외하고는, 인물들의 대사는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프레임을 교란시키는 노인의 등장과 죽음은, 광활한 산맥 아래의 마을을 배경으로 한 외부와 반대로 외부와 차단된 동굴 내부의 상관관계를 끊임없이 침범하는 어떤 두 가지의 기호로 침식되어 있다. 특히, 대부분의 카메라 앵글은 위에서 아래를 지시하는데, 대표적으로 수평이 아닌 수직구조로 형성된 '동굴'이라는 장소를 탐사하는 과정임을 미뤄보았을 때, 이것은 명증하게도 주제의식과 교직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일 부코>는 이 모티브를 통해 이 영화의 형식이나 서사가 단순히 동굴을 탐험하는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또 다른 공간인 인간을 탐사하는 의미론적 통합을 꾀하는 제법 훌륭한 영화가 되는 것이다.

 

ⓒ Doppio Nodo Double Bind
ⓒ Doppio Nodo Double Bind

'상승'과 '하강'의 모티브

동굴의 틈새에 침식되어 있는 역사의 흔적만큼이나 <일 부코>가 교차하여 확장시키는 건 인간의 노화와 죽음이 기억하는 풍광의 흔적들이다. 이를 압축하면, 인간의 역사와도 결착되어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표상될 수 있는 무언의 역사일 것이다.

1961년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역에 위치한 681m 깊이에 달하는 비프루토 동굴 탐사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일 부코>의 흥미로운 초반 시퀀스를 관찰한다면, 우린 '상승'과 '하강'이라는 이 모티브가 이 영화를 훌륭하게 직조하고 있음을 묵도하게 될 것이다. TV를 통해 흑백 화면으로 방영되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마천루인 피렐리 타워를 취재하는 이 장면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건물을 조명하는 진행자와 유럽의 최고층이라 알려져 있는 건물 꼭대기에서 틸업(Tilt-Up)되며 종료된다. 이는 마치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였던 욕망의 기원인 '바벨탑'을 건축하는 것과 유사하다. 아울러 1960년대의 도시를 흑백으로 묘사한 것과는 다르게, 자연이 색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일 부코>의 시대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생동감을 부여한다.

'상승'과 반대로 '하강'을 방향으로 하는 동굴의 탐험 과정은 이러한 양극단의 대조를 통해 의미를 창출하게 된다. <일 부코>의 시점 쇼트는 프레임의 정면을 위치하지 않고, 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쇼트를 유지한다. 기차역과 바다, 자욱한 안개아래 초원들, 산과 등대, 산 아래에 옹기종기 모인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들, 가톨릭교회에서 교독문을 따라 하는 교인들, 노인이 나귀와 소와 알 수 없는 의성어로 교류를 나눌 때, 그리고 그 마을을 향해 이동하는 탐험가들의 모든 경로들과 탐사를 위해 정착한 야영지들은 앞서 언급한 앵글로서, 이 영화의 여정을 반영하는 주체적인 요소로 관철된다. 이러한 관측은 전체의 카메라를 조율하는 방향이 하강을 지향함을 면밀히 드러낸다. 

그 탐사가 끝난 뒤의 종국에 발생하는 노인의 죽음과 동굴의 지형도를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상승'에서 '하강'의 방향성은 인간의 실존을 알레고리로 표현한 흥미로운 사례로 회자될 것이다.

 

ⓒ Doppio Nodo Double Bind
ⓒ Doppio Nodo Double Bind

동굴의 지형과 인간

동굴에서 발견되는 역사의 흔적들은 노쇠한 노인의 모습과 병렬적으로 등장한다. 특별히 중·후반부에 교차로 등장하는 이 장면은 특정한 의미를 명시화하지 않지만, 시적인 의미로 동굴의 지형과 인간을 의미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 부코>에서 자연 풍경으로 표시되는 외부를 촬영할 때는 주로 익스트림 롱 쇼트 또는 롱 쇼트가 그 주를 이루지만, 동굴은 양옆 거리의 한계 때문에 불가능한 방식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노인의 얼굴의 클로즈업이 교접하고 있는 지형도가 흡사함을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이 과연 의도적인 진술인가를 추측하기 이전에, 동굴에 함몰되어 있는 그 역사의 흔적들을 발견할 때, 우린 단순히 <일 부코>가 시각과 청각을 필두로 한 탐험 영화의 부류로만 제한하거나 가정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동굴의 지형도에서 발견되는 JFK가 새겨진 도서, 축축한 상태로 버려진 오래된 잡지들의 발견은, 동굴의 깊이만큼이나 역사를 함의하고 있던 장소라는 점을 진술한다.

유일한 클로즈업인 노인의 얼굴 주름, 그리고 마치 인간의 내부를 형상화하는 듯한 동굴 지도와 은폐되어 있는 이 지형의 지정학적 특수성은 <일 부코>의 의미 대상을 지시하는, 즉 과거와 현재의 신비로운 역사가 인간과 공간에 오밀조밀하게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둠이 강제되는 동굴을 구석구석을 탐험할 때, 우리는 이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의 흔적을 즉물적으로 체감하는 신비적인 쾌감에서 묘한 재미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일 부코>가 가진 은유적인 의미를 제외하더라도, 서두에 언급했던 이 영화의 일차적인 특징이 체험의 영역이라는 점은 감독의 의도와 훌륭하게 부합한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우린 지형의 경계를 넘어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 '이 가능성의 영화'를 관찰할 때, 영화의 또 다른 영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Doppio Nodo Double Bind

 

일 부코
Il Buco
감독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Michelangelo FRAMMARTINO

 

출연

클라우디아 칸두소Claudia Candusso

파올로 코시Paolo COSSI
자코포 엘리아Jacopo ELIA
데니스 트롬빈Denise TROMBIN
니콜라 랜자Nicola LANZA

 

공개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4분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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