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레이미] (악)취미학개론
[샘 레이미] (악)취미학개론
  • 배명현
  • 승인 2022.05.3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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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에 들어가기 앞서"

취향이 무기가 된 감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감독들은 드물다. 자신의 내적 세계가 그 밖에 있는 외적 세계와 공명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내면에서 외면으로, 외면에서 내면으로, 이 움직임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 이렇게만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취향을 무기로 삼는 감독들의 세계를 오히려 얄팍하게 만들 수도 있긴 하지만, 글쎄. 이보다 더 간결하고도 명확한 표현이 더 있을까. 

이런 면에서 '샘 레이미'(Sam Raimi)는 공명할 줄 아는 소수의 감독 중 한 명이다. 많은 이들이 그를 <스파이더맨> 시리즈(2002-2007)의 감독으로 기억하지만, 그의 '진짜'는 첫 상업 장편영화 <이블데드>(1981)에 있다. 나뭇가지 촉수와 고스트, 좀비가 합쳐진 이 작품은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작품이다. 물론 지금 보기엔 어설프고 클리셰스럽고 목각 인형 같은 연기가 눈에 밟히긴 하지만, 동시에 지금 보아도 흥미로운, '샘 레이미'라는 장르의 원형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맛을 알면서도 먹고 싶은 불량식품과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영화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샘 레이미를 이야기하는 걸까. 그야 물론 그가 오는 5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신작인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Doctor Strange in the Multiverse of Madness)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는 2013년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이후 9년만이다. 공포 영화계에서 대가로 불리는 그가 스파이더맨 이후 다시는 히어로 영화계에서 못 볼 줄 알았는데, 다시 마블로 돌아오다니. 그런데 심지어 공포 영화라니. 반가운 티를 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흥행과 심의를 제1 원칙으로 고수하는 디즈니에게 정통 호러를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그러나 샘 레이미는 그리 호락호락한 감독이 아니다. <스파이더맨 2>(2004) 속 닥터 옥토퍼스의 수술 장면(피가 터지거나 신체가 훼손되는 장면 없이 그림자와 소리만으로 공포를 극대화하는 연출)처럼 자신의 장기를 투영하기 위한 고집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기 전에 그에 대한 이해가 약간 필요할 것 같다. 이번 영화가 마블의 이전작들을 관람하지 않았다면 서사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디즈니의 말처럼, 샘 레이미의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영화를 관람하는 건, 서사를 넘는 손실일 것이다.

그는 분명 이번에도 자신만의 색을 넣었을 테니까. 호러의 방식으로.

 

ⓒ 영화 <드래그 미 투 헬>(2009) 스틸컷

샘 레이미의 영화는 늘 기묘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특히, 그가 늘 선호하는 방식은 '상황'이다. 특별한 상황에 들어선 인물들이 특별한 사건을 겪는다. 이는 "현실의 구체성으로부터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들어 올린 후 그 내부를 개성적이고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담고 있는 표현으로 감싼다"(로버트 맥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2002, 민음인, p.10)와 같은 흔히들 말하는 좋은 이야기와 반대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좋은 이야기의 반대편 자리에 서 있음에도 어째서 샘 레이미는 좋은 감독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답은 그가 B급 공포 영화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이유는 없다. 음침하고 음험한 매력을 추종하는 자들의 신화. 더 기괴한 것을 찾는 자들의 요구를 채워 줄 수 있는 감독. 그런 감독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훌륭한 감독이 좋은 교육을 통해서만은 키워질 수 없는 것처럼, 배드 테이스트(bad taste)를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감독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샘 레이미 보여준 공포영화는 일종의 장르의 원형이 되어, 그 이후의 공포영화에게 문법적 영향을 주었다. 80년대 미국은 경제적 호황기에 접어선 시간이었고, 희망이 팽배해져 있었던 시기였다. 아직 냉전이 한참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냉전 자체가 자신들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이런 시기에 어떤 사람들은 공포를 찾았다. SF영화가 보여주는 미래의 막연한 절망이나 희망이 아닌, 미국 공상과학 소설가 H. P. 러브크래프트가 말한 인간 근원적인 감정. 두려움, 그 자체를 찾아 헤맸다.

 

ⓒ 영화 <이블 데드>(1981) 스틸컷

그런데 샘 레이미의 공포는 어딘가 왜곡되어 있다. 그저 단순한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이블 데드>에서 인간이 어떻게 처음 좀비가 되었는지를 복기해보자. 숲속에서 알 수 없는 어둠이 여성에게 닥치고 나뭇가지들이 여성의 사지를 묶는다. 그리고 길고 단단해 보이는 나뭇가지가 사타구니를 향해 들어간다. 여성은 괴로움과 고통이 섞인 소리를 내지만 어쩐지 카메라는 관음하는 듯한 시각으로 피사체를 담는다.(약자의 죽음을 카메라가 절시 혹은 관음하는 것. 사실 이 관점은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공포영화의 문법의 기둥이다. 훌륭한 공포영화 감독들이 서사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고 성공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좀비는 균이나 상처에 의한 전염 같은 전형적인 좀비물과 달리, 악령에 씐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실제로 리메이크인 <이블데드2>에서 악령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러한 장르의 혼합은 신선했고, 실제 당시 관객들에게 호평받았다. 스플레터 느낌을 강하게 주는 1편과 블랙유머가 섞인 2편 모두 B급 영화가 주는 불량식품스러운 재미가 있다. 그는 B급 영화라 말하는 장르에 특화되어 있었고, 덕분에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스플래터 무비의 새로운 기록이 되었다.

데뷔가 이러한데 <스파이더맨>은 말해 무얼 할까. '스파이더맨'의 덕후인 그가 스스로 성덕이 된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소니의 개입이 강해진 3편을 제외하면 모두 훌륭하다. 특히 <스파이더맨2>는 오직 어린이만을 위해 존재했던 히어로 영화를, 하나의 오롯한 작품으로서의 영역으로까지 끌어 올린 명작이다. 어쩌면 지금의 마블을 만들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특히, 실신한 토비 맥과이어를 본 시민들이 스파이더맨을 연민하는 모습은 히어로의 인간적 고뇌를 히어로 장르에서 처음 등장시킨 순간이다. 분명 히어로의 깊이를 새롭게 썼다.

 

영화 <스파이더맨2> 속 배우 '토비 맥과이어'와 감독 '샘 레이미' ⓒ 콜럼비아트라이스타

물론, 그가 남긴 오점도 크다. <이블데드>의 악령은 강간으로 좀비를 전염시킨다. 그렇다면 이 악령은 남성임이 분명할 텐데, 이 악령은 <드래그 미 투 헬>(2009)에 가서는 여성으로 탈바꿈한다. <이블 데드>에서 남성의 성적 폭력성과 성병에 대한 은유가, 왜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드래그 미 투 헬>에선 여성이 되었을까. 의도된 선택이었을까. 그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성별이 아닌 '이 세계가 그 존재에게 어떤 공포를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표상이다.

어찌 되었든 샘 레이미는 자신의 영화에서 원형을 제시했다. 공포에서도, 히어로에서도. 그가 다시 히어로로 돌아아오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다시 또 어떤 원형을 제시할까. 그리고 그의 악취가 발동해 고어스러움이 들어갈까. <스파이더맨 2>를 만든 감독의 복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디즈니가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은 영화를 기대해본다.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새로운 원형이 등장할지.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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