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파스트' 낭만적 진실과 영화적 사실
'벨파스트' 낭만적 진실과 영화적 사실
  • 배명현
  • 승인 2022.04.02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뷰] "오늘-과거-오늘 그리고 미래"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를 비추며 시작한다. 평화로운 항구도시인 이곳의 고즈넉한 풍경을, 영화는 보여준다. 배경음악에서 나오는 코러스와 마을의 동상이 서로 싱크를 맞추며,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영화는 벽을 넘어 69년에 있었던 분쟁을 회상한다. 

오늘의 벨파스트를 본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지만, 69년의 벨파스트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였다. 천주교와 기독교 두 분파로 나뉘어 폭동이 매일같이 일어난다. 상점을 털고 이웃집 사람들을 협박한다. 군이 투입되고 순식간에 마을은 혼돈으로 빠져든다. 이 혼란 한 가운데 '버디'(주드 힐)가 있다. 아직 꼬마인 버디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불량한 누나에게 꼬드김을 당해 도둑질을 하고, 반협박식 참여로 가게 강탈에 참여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이 가장 소망하는 건 같은 반 친구인 캐서린과 결혼 하는 것이다.

 

ⓒ 유니버설 픽쳐스

이 귀여운 친구 '버디'에게 이 마을의 혼돈은, 거대한 세계 그 자체이다. 그의 욕망은 그저 '캐서린과 결혼하는 것'과 같이 그 나이에 어울리는 '작고 소중한 소망'이지만, 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계에게 '개인'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거대한 힘과 약자. 질서와 카오스, 욕망의 부추김과 왜곡, 호의와 불의, 친밀함과 거리감, 작은 것과 큰 것, 내 편과 네 편. 기독교와 천주교. 세계는 흑과 백이다.

69년의 벨파스트는 흑백이다. 이 사이에 끼어들 틈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버디)에게 세계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폭음이며 충격이고, 예측의 불가능성이며 공포이다. 이 공포는 실재하는 공포이다. 무형의 추상이 아닌, 오늘 내가 피부로 겪는 공포. 그렇기에 이 아이는 살고자 한다. 나름의 방법으로, 주관의 합리적 논리로, 아이의 방식으로. 하지만 이 불균질한 세계에 작고 소중한 것들이 통할 리가 없다. 어른의 논리는 언어의 형태로, 힘의 방식으로, 구체화된 욕망이 재림하는 형태로 세계를 구축해두었다. 이 단단한 성벽에 아이가 끼어들 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버디는 이 세계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이곳, 벨파스트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캐서린과 결혼 하는 것. 몇 년만 지나면 얼굴조차 잊어버리게 되겠지만, 그는 남으려 한다. 철이 없는 아이의 행동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아이의 논리이다. 주관적 합리는 세계 앞에서 작아지지만. 개인에게 버틸 이유를 만들어준다. 또 살게 할 이유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여기서 버디는 선택한다.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생이 나아갈 방향이라기보다, 욕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는 그 스스로가 되어 캐서린과 결혼하려 한다.

 

ⓒ 유니버설 픽쳐스

프랑스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는 그의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2001)에서 '삼각형의 욕망'을 제시한다. 그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이렇게 바라보았다. "돈키호테는 이상적인 방랑 기사가 되고자 하지만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 도달하지 않고, 아마디스라는 전설의 기사를 모방하며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한다. 욕망이 수직선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 이상적 존재를 경유하여 자신의 욕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라르는 이를 주체와 대상 사이에 있는 중개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이를 주체와 대상 사이에 일어나는 '간접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이를 삼각형의 욕망이라 불렀다.

<벨파스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어른들은 이미 구체화된 '세계'안에서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두 파로 갈라진 곳에서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닌, 자신과 비슷한 타인을 경유해 안전한 이상에 도달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간편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모방함으로써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닌, 연극적 세계일 것이다. 69년의 벨파스트도 지금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버디는 다르다. 그는 직시한다. 자신의 욕망을 사선이 아닌, 직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시도한다. 그녀와 관계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화시키기 위해. 여기서 필요한 건 약간의 어른들의 도움이다. 예컨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조언과 같은 것들. 어린이의 논리를 용인해주는 가족이란 울타리. 어른이란 이 양가적인 입장에 놓인 이상한 것들이다.

이 어른들 사이에서 자란 버디는 2022년 오늘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 수많은 버디들과 캐서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이들은 '모이라'처럼 되어버린 건 아닐까? 대부분은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소수의 몇 명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 증거가 이 영화이다. 누군가는 자라면서도 그 시절을 어린이의 방식으로 기억했다. 이 사실은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퓨어한 영역에 있다는 걸 가리키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중간계라도 지키고 있을 수 있음이라는 그 가능성을 의미한다. 가능성은 언제나,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희망을 내포한다.

 

ⓒ 유니버설 픽쳐스

벨파스트에서 쓰여진 이 작은 역사는 스크린 위로 옮겨져 우리에게 도달했다. 이 영화가 초반에서 보여준 벨파스트의 낭만적인 풍경이 영화의 엔딩에서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겹쳐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케네스 브래너는 오늘-과거-오늘의 형태로 이야기를 재봉합하며 오늘날의 갈등을 다시금 톺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69년의 작은 역사들이 만들어낸 조그마한 평화들을, 우리는 오늘 다시 기억함으로써 괜찮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단언컨대 힘들다.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미 어른이지 않은가. 영화의 낭만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미 우리가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떤 진실의 편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생각하게 할 수 있다고.

그렇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케네스 브래너가 스크린 위에 기록한 것은 영화적 사실이지만, 이 영화적 사실은 낭만적 진실을 내포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렇기에 그가 남긴 이 영화는 일종의 유산이다. 시간이 있었기에 남길 수 있었던 것. 시간을 머금은 소중한 것. 시간의 더께 속에서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던 것. 벨파스트가 도달한 지점에서 우리는 미래를 기다린다. 무수히 많은 삼각형 사이에서도 빛날 직선들과 함께.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유니버설 픽쳐스

벨파스트
Belfast
감독
케네스 브래너
Kenneth Branagh

 

출연
주드 힐
Jude Hill
카이트리오나 발페Caitriona Balfe
주디 덴치Judi Dench
제이미 도넌Jamie Dornan
시아란 힌즈Ciaran Hinds
콜린 모건Colin Morgan
라라 맥도넬Lara McDonnell
제라드 호란Gerard Horan

 

수입|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8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03.23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