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프랑코] '크로닉' 이야기를 운반하는 육체
[미셸 프랑코] '크로닉' 이야기를 운반하는 육체
  • 김민세
  • 승인 2022.03.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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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미셸 프랑코의 <크로닉>(2015)은 간단한 설정과 시놉시스만으로 익히 알고 있는 한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2012). 아내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하는 자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티는 <아무르>처럼, <크로닉>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간호하는 호스피스의 시간을 따라간다. 삶과 죽음이라는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어쩌면 보편적인) 질문 위에 서 있다가 안락사라는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화두를 던지는 방식 또한 두 영화의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일어난 집단 폭력을 소재로 하고 있는 프랑코의 <애프터 루시아>가 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아이들로부터 시작되는 나치즘을 다루는 하네케의 <하얀 리본>(2009)과 함께 이야기될 수 있다는 가정을 세워 보았을 때, 프랑코가 차세대 하네케로 불리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동시대까지 닿을 수 있는 사회적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분명히 프랑코와 하네케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소재의 측면에서 봤을 때 <아무르>와 <크로닉>은 동시에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심지어 결국은 유사한 질문으로 서사가 귀결되는 것을 보았을 때, <크로닉>은 그저 <아무르>의 동어반복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크로닉>이 어떠한 서사로 향하는지, 또는 그 서사가 말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답하는 것은 <아무르>를 보고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크로닉>에 대해 유의미한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네케스럽다는 말을 반복하거나 의도적으로 그 언급을 피하는 것보다는, 해당 영화가 프랑코의 영화로서 어떠한 작가적 의식을 이어나가고 있는지 확실히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씨네룩스
ⓒ 씨네룩스

앞서 <애프터 루시아>의 비평(《'애프터 루시아' 영화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2022.02.09)에서 다루었듯이, 하네케의 영화가 역사를 서늘한 시선으로 관조하는 영화라면, 프랑코의 영화는 이야기라는 사회 실험으로 등장인물과 관객을 운반하는 영화이다. 인물을 만들고, 상황을 만든 뒤, 인물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영화와 우리를 운반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든다. <애프터 루시아>에서는 그 인물이 로베르토가 되었으며, 운반의 역할을 로베르토가 운전하는 자동차와 보트가 대신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감정이입 이전에 그저 함께 다가올 운명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안다고 생각했다가도 복수를 감행한 뒤의 로베르토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듯이.

<크로닉>도 그러하다. 주인공 데이비드(팀 로스)는 호스피스로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부담을 느낄만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 영화는 그의 감정에 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데이비드는 미끄러지는 기표처럼 보인다. 그는 성실하고 사무적으로 자신이 맡은 일을 처리하고, 간호하던 사람이 사망하면 다음 사람을 간호한다. 그리고 환자를 맡을 때마다 환자의 과거를 흉내 내거나 가족인 척하는데, 이 지점이 데이비드의 초현실적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런 비상식적인 데이비드의 행동들을 보고 있다 보면, 그는 실재하는 현존이 아니라 추상적 관념의 환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기표 또는 환유라면, 기의는 무엇이고 환유의 대상은 무엇일까. 그가 하는 행동을 단순히 누군가의 재현으로 설명하면 안 된다. 타자의 정체성을 흡수하여 거짓말하는 그의 행동은 재현을 넘어서서 상상적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군가를, 무엇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이비드의 기표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타자라는 기의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환유이다.

그때부터 데이비드는 그저 영화 속 등장인물을 뛰어넘는 존재가 된다. 앞서 언급했듯 <애프터 루시아>에서 이야기를 운반하는 것이 로베르토가 운전하는 자동차와 보트였다면, <크로닉>에서는 환자들의 고통과 남은 생을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데이비드가, 이야기 그 자체이자 이야기를 운반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크로닉>이라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은, 데이비드라는 이야기를 매개로 죽음 앞의 사람들과 관계 맺고 있다는 뜻이다.'

 

ⓒ 씨네룩스
ⓒ 씨네룩스

<크로닉>은 '이야기를 운반하는 것'이 전작 속 '로베르토의 운전'에서 '데이비드의 육체'로 되는 과정을 차례로 설명한다. 먼저, 첫 장면에서 데이비드는 차를 타고 누군가를 미행한다.(미행의 대상이 누구인지, 데이비드가 왜 이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애프터 루시아>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한마디로 <크로닉>은 첫 장면부터 자동차를 매개로 하는 운반의 운동을 보여주면서, <애프터 루시아>의 태도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사망한 환자의 장례식에서 돌아가는 길, 데이비드는 다짜고짜 차에서 내려 술집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아내를 잃었다고 거짓말한다. 이 순간 그의 거짓말이라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데이비드가 하는 거짓말(이야기)의 성격은 상상적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과거나 흔적들을 유추하는 방식으로 허구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죽음을 안고 있는 대상을 바꿔가며 죽음이라는 현실의 이야기를 무미건조하게 운반한다. 또는 삶이라는 각자의 이야기를 죽음 전까지 이어나가도록 돕는다. 그런 데이비드에게 새로운 선택 사항이 주어진다. 그가 맡은 환자 중 한 명이 자신에게 안락사를 부탁한 것이다.

이 선택사항은 단순히 그의 윤리적 고민만을 건드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운반하는 자, 혹은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자의 입장에 있던 그에게 이것은, '이야기에 개입해야 하는가',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동시에 '데이비드의 육체로 지탱되고 있던 영화가 언젠가는 멈출 수도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 씨네룩스
ⓒ 씨네룩스

결국, 그 환자가 데이비드를 협박하며 그가 투병생활을 하던 자기 아들을 안락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기표와 환유로서 존재하던 그의 존재는 지워지고 그저 죽음 앞에서 무엇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육체로 남는다. 그러므로 그것이 실질적인 육체가 아닐지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데이비드의 죽음은 그 순간 예견이 된 것이다. 그 이후로 구도는 변화한다. 영화를 운반하던 데이비드는 이제 영화와 맞선다. 거리를 달리다가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는 롱테이크의 결말이 이를 설명한다.

규칙적인 리듬으로 거리를 달리는 육체. 그리고 죽음의 운명을 어떻게든 미루고 싶어 시간을 생략하지 않는 롱테이크의 카메라. 그렇지만 죽음을 향해, 결말을 향해 흐르는 영화라는 시간. 영화는 더 이상 현실의 육체로는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다는 듯이 끊어져 버린다. <크로닉>이 <아무르>와 하네케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프랑코의 작품으로서 흥미로운 작가적 분석이 필요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씨네룩스

크로닉
Chrinic
감독
미셸 프랑코
Michel Franco

 

출연
팀 로스
Tim Roth
사라 서덜랜드Sarah Sutherland
빗시 툴로치Bitsie Tulloch
로빈 바틀렛Robin Bartlett
마이클 크리스토퍼Michael Cristofer
데이빗 다스트말치안David Dastmalchian
클레어 반 더 붐Claire van der Boom
테이브 엘링턴Tate Ellington

 

수입|배급 씨네룩스
제작연도 2015
상영시간 94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6.04.14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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