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기억과 기적이 있는 집으로
'스펜서' 기억과 기적이 있는 집으로
  • 이현동
  • 승인 2022.03.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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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센이 강화하는 서사의 밀도"
ⓒ 그린나래미디어·영화특별시 SMC

<스펜서>(2021)라는 직관적인 제목은 <재키>(2016), <네루다>(2017), <에마>(2019)에서 이어지는 파블로 라라인의 형식적인 특성을 대변하는 제목들이다. 자유와 해방을 갈구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면모를 강조한다는 점은, 그의 영화에서 공통으로 존립하는 소재이자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특별히 위계로부터 신화화된 공간들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몸짓은 기억의 작용으로 구획되는 것이다. 결국 기억을 회복하는 길로 도달할 때, 그 경계는 허물어진다고 할 수 있다. 왕실이란 폐쇄적 공간에서 망상에 시달리는 스펜서의 그늘진 눈빛과 철창을 경계로 폐허가 된 본가를 진입하려는 그녀의 방향에서 이 기억의 지표를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스펜서>를 메타적으로 드러내는 미장센을 관찰하면서 이 영화에서 조율된 몇 가지의 고유한 형식들을 관찰하고자 한다.

 

미장센의 변주들

실화를 토대로 연출된 <스펜서>는 단순히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실존 인물의 연대기를 재해석하거나 재확인하려는 시도로만 구축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시작으로 3일의 시간이 소요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생활세계는 온통 그녀를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이들로 가득한데, 이는 3일이라는 간략한 시간만큼이나 감정과 배경의 이미지의 리듬을 급박하게 지시하며 나아간다. 특히나 외부와 내부 사이의 미장센을 대조하는 측면에서 그 형식적 특성이 발현된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전작인 <재키>에서도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 일주일을 그려낸 것과 마찬가지로, 사건이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이 경험하는 그 찰나의 감정들을 포착하면서 이 이야기는 감정의 상태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발굴하는 데 주력한다.

맨 처음 다이애나는 기억나지 않는 것인지 혹은 본래부터 뇌리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던 것인지 크리스마스마다 찾아가는 샌드링엄 별장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채 배회한다. 주유소 휴게소에 들어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라는 그녀의 말은 단순히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아니 정신적인 혼란 속을 방황하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 그린나래미디어·영화특별시 SMC
ⓒ 그린나래미디어·영화특별시 SMC

<스펜서>는 두 가지 공간을 상정하면서 기억을 투사한다. 거시적으로는 외부와 내부이며 미시적으로는 혈육과 가문이다. 통상적으로 외부와 내부를 다룰 때 카메라앵글은 그녀의 정서를 반영하듯 대조를 이룬다. 외부에서는 익스트림 롱 쇼트나 롱 쇼트로 그 광활한 자연 배경을 멀리서 동경하듯 묘사하고, 내부에서는 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클로즈업으로 공간과 인물들이 갑갑한 방식으로 스크린을 점거한다. 대표적으로 오프닝 장면에서 초원과 주방의 시야는 개방과 폐쇄적인 양상으로 두 부류의 공간 활용을 주목해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왕궁의 공기조차 냉기로 가득 차 있는 영화 전체의 질감은 세계를 표현하는 내밀한 기조들이다. 또한, 별장에 배치된 인물들은 기계적으로 내부를 점검하고 감찰하는 카메라들이다.

표면적으로 <스펜서>의 공간은 탈출해야 할 곳으로 유도된다. 지각을 용납하지 않는 왕실의 분위기와 위계로 점철된 적막한 식사 자리, '조용히 일하라'는 셰프는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슬로건으로 요리사들을 훈계하고 양육하며, 파파라치가 있으니 커튼을 치라는 왕세자, 외부 스케줄에서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왕실 모자와 진주 목걸이를 착용해야 하는 왕실의 그 뒤편에는 다이애나가 서민적인 삶을 추구했던 것과는 큰 괴리가 있었음을 시각화한다. 그녀의 표현은 후반부를 제외하고 보통은 간접적으로 그 모습을 은연중에 나타내는데, 입는 옷이 그러하다. 그녀는 왕실의 규칙을 따라 매일 변화하는 드레스 차림을 억지로 착용하면서도 청바지 차림의 캐주얼한 옷을 입는 등 지속적인 변용을 통해 그 공간의 변용을 다이애나의 정서와도 밀착시킨다.

 

ⓒ 그린나래미디어·영화특별시 SMC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부부관계와 각자의 성격을 가장 잘 반영하는 장면은 당구대 앞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에서 명시된다. 당구대에 놓은 공의 배치를 보면 왕세자 앞에는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고, 다이애나의 앞에는 공들이 퍼져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공간적 배치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녀에겐 자유와 해방을, 그에겐 국가에 충성을 말이다. 찰스 왕세자(잭 파딩)는 왕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다이애나에게 "국가를 위해서 두 가지 모습이 있어야 해"라며 그녀가 '의무'에 충성해야 함을 말하지만, 그녀는 그가 주는 검은색 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떨어뜨린다.

이런 대조는 시각적인 요소로만 배열되지 않는다. 은밀하게 이러한 대조를 표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운드트랙에서도 묘사된다. 왕실과 어울리지 않는 재즈의 사운드트랙이 나온다던가, 엔딩곡인 마이크 앤 더 메카닉스의 'All I need is a Miracle'에서 왕실의 클래식(음악)에서 그녀는 자유와 해방을 쟁취했다는 표현으로 음악이 곧 '언어'로 변주된다는 점에서 그 관습에서 벗어난다. 이제는 다이애나가 자신을 스펜서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결론적으로 공간은 일정한 전통으로부터 관습적으로 사유된다. 다이애나는 전통과 투쟁하고, 정교하게 배치된 공간에서 탈주하는 이 이야기는 그 동기에 집중하지 않고 감각적인 미장센의 변주만으로도 서사를 굳건하게 지탱한다.

다이애나가 감정을 배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그녀의 의상을 담당했던 매기(샐리 호킨스)와 그의 혈육인 두 아들이라는 점은 이 전작인 <에마>(2019)에서 결속되었던 공동 가족이란 희망을 다시금 복권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이애나를 상징하는 '꿩', '허수아비', '앤 불린'은 전부 다 폐쇄적으로 기능하는 구조 속에서 그 위치를 옮길 수 없는 속성들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꿩'은 사육당하고 왕실의 취미생활에 불과한 사냥의 대상이 되며, '허수아비'는 다이애나의 본가를 지키는 기억의 수호신처럼 그 자리에 위치하고, '앨 불린'은 영국왕실의 역사 중에서 모함을 당해 비극적으로 사망한 여자이다.

 

ⓒ 그린나래미디어·영화특별시 SMC

그러나 이러한 점들은 결코 대중들이 알고 있는 다이애나 스펜서의 죽음과 상응하지 않는다. 왕세자는 아들들에게 꿩을 쏨으로 왕실의 구성원으로 임하기를 주문하지만 다이애나는 꿩 사냥을 나가는 이들에게 달려가 본래 총을 쏘기 싫다던 그의 말을 실현하기 위해 사냥을 막고, 허수아비에 걸쳐있던 아버지의 코트를 가지고 와 과거의 기억을 재현하고 복권하며, 앨 불린의 참혹한 과거에 굴종하지 않고 자신의 주체성을 공포한다.

그녀를 옭아매던 진주 목걸이가 분쇄되는 것이 폐허가 된 생가라는 것, 갯벌에서 뛰어노는 메기와 다이애나는 밀물과 썰물의 시간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 3일이란 시간의 경과 속에서 다이애나의 공간은 그렇게 사냥을 하러 모인 사람들에게 외쳤던 그 대사와 엔딩을 장식하던 마지막 곡의 반복적인 가사와 그녀의 미소가 절절하게 아직까지도 기억 속을 울려댄다. (총을 쏘려던 아들에게) "엄마랑 집에 가자" "내가 필요한 건 오직 기적, 내가 필요한 건 오직 그대"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영화특별시 SMC

스펜서
SPENCER
감독
파블로 라라인
Pablo Larrain

 

출연
크리스틴 스튜어트
Kristen Stewart
샐리 호킨스Sally Hawkins
티모시 스폴Timothy Spall
숀 해리스Sean Harris
잭 파딩Jack Farthing
잭 닐렌Jack Nielen
프레디 스프라이Freddie Spry
스텔라 고넷Stella Gonet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배급 영화특별시 SMC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1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3.16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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