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들을 수 있지만 무시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interview] 들을 수 있지만 무시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 홍상현
  • 승인 2022.05.0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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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국제음악영회제 초청작 <잠자는 벌레> 가네코 유리나 감독
「잠자는 벌레」는 「이십일세기 소녀」의 신인 감독 공모에서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세 번째 에피소드의 연출을 맡으며 영화계에 발을 들인 가네코 유리나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잠자는 벌레」는 「이십일세기 소녀」의 신인 감독 공모에서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세 번째 에피소드의 연출을 맡으며 영화계에 발을 들인 가네코 유리나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결혼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림과 동시에 머릿속을 채우는 멜로디가 있다.

신부ㆍ신랑이 입장하고 퇴장할 때 연주되는 조금 느린 박자의 행진곡. 원래 셰익스피어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의 극음악으로 사용되던 이 곡을 만든 사람은 시대를 풍미한 작곡가ㆍ지휘자ㆍ피아니스트로 라이프치히음악원(지금의 라이프치히음악연극대학교)을 설립한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 우리에겐 '멘델스존'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인물이다.

헌데, 2017년 여성의 날, BBC라디오가 멘델스존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던 "부활절 소나타(Ostersonate)"를 오랜 세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원제작자의 명의로 초연했다. 파니 멘델스존, 바로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다. 처음 곡을 기록한 원고를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거기 적힌 "F. 멘델스존"이라는 이름의 "F"가 "펠릭스"의 이니셜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멘델스존 연구가인 안젤라 메이스 크리스찬은 2010년 소장하던 원고의 글씨를 파니의 필적과 비교하고, 음표와 그 밖의 변경사항을 분석하는 한편, 페이지 번호를 파니의 음악앨범에서 누락돼있던 부분과 일치시킴으로서 두 세기 가까이 이어져 온 '거대한 오해'를 불식시켰다.

 

가네코 유리나 감독은 콘텐츠가 많은 사람과의 대화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매순간 실감하게 해주는 인터뷰이였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가네코 유리나 감독은 콘텐츠가 많은 사람과의 대화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매순간 실감하게 해주는 인터뷰이였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네 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이내 거장들의 작품을 능숙하게 연주해내 가족들을 감동시킨 파니는 남동생과 함께 정식 음악교육을 받았다. 열세 살 때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 수록된 전곡을 모두 암기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 되던 해부터 상황이 바뀐다. 집안에서 강요하는 이른바 '신부수업'을 받게 된 것. 음악교육이 병행되기는 했지만, 당시 유한계급 여성들에게 음악은 취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나마 파니의 아버지는 얼마 후 그의 모든 사회활동을 금지시킨다. 제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지라도 시대적 제약을 피해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벌어진 이 같은 일화와 완벽하게 역전된 사례여서일까. 전 세계에 팬을 거느린 괴수영화 <가메라>(1995) 시리즈와 한국에서도 히트했던 <데스노트>(2006) 시리즈를 만든 거장 가네코 슈스케 감독의 딸로, 오빠가 뒤를 이을 거라는 주변의 예상을 뒤집고 <이십일세기 소녀>(2018)의 신인 감독 공모에서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세 번째 에피소드(<projection>)의 연출을 맡으며 영화계에 발을 들인 가네코 유리나 감독이 '시장을 배반하는 노래를 만드는 여성동료(음악감독)'와 '남성이 욕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여성동료(주연배우)' 등과 함께 만든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초청작 <잠자는 벌레>(2020)는 더욱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스물여섯 살 가네코 감독은 기록매체에 보존돼있던 조모의 음성에서 "왠지 모를 두려을 느꼈다"고 한다. 산 사람의 그것처럼 공기를 가르며 피부에 와닿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집필에 들어간 시나리오에서 버스 안을 부유하는 노파의 흥얼거림과 귓가를 파고드는 카페의 속삭임은 <잠자는 벌레>의 판타지적 장치로 다시 태어났다.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버스 안, 합주실로 향하던 버스에서 귓가에 스며드는 멜로디. 시선이 멈춘 곳에는 작은 나무상자를 쥐고, 모자를 눌러쓴 채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노파가 앉아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녀를 주시하는 카나코(마츠우라 료 분), 어느새 한밤의 낯선 거리에 도착하는 버스. 그렇게 '망자'와 '소리'를 둘러싼 여름날의 여정이 시작된다.

다만, 유령에 관한 이야기일망정 <잠자는 벌레>의 풍요로운 사운드와 아름다운 미장센이 주는 느낌은 지극히 따뜻하다. 다른 세상에 속한 이들 간의 애잔한 소통을 보여주는 '으스스하지 않은 감성' 때문이다.

 

버스 안, 합주실로 향하던 버스에서 귓가에 스며드는 멜로디. 시선이 멈춘 곳에는 작은 나무상자를 쥐고, 모자를 눌러쓴 채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노파가 앉아있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버스 안, 합주실로 향하던 버스에서 귓가에 스며드는 멜로디. 시선이 멈춘 곳에는 작은 나무상자를 쥐고, 모자를 눌러쓴 채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노파가 앉아있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홍상현

장편 데뷔작으로 영화와 음악의 제전 MOOSIC LAB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고 아시아 최대 음악영화제인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까지 초청되셨습니다.

가네코 유리나

너무 큰 영광이에요.

<잠자는 벌레>는 음악을 영화의 숨결과 같이 취급한 영화입니다. 음악을 담당하는 뮤지션분들과 소통을 거듭하면서 내놓은 결과물이라 더욱 보람이 느껴지네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초청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홍상현

"홍상현의 인터뷰"를 통해 뵙는 분들께 늘 드리는 질문인데요. 평소 좋아하시는 한국영화 작품, 감독, 또는 배우가 있으신지요. 최근의 한국영화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가네코 유리나

홍상수 감독을 진짜 좋아해요!

평소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사람들의 시간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서는 사랑스럽게 떠오릅니다. 특히 <자유의 언덕>(2014)은 제 인생영화 베스트 10편에 들 정도로 좋아하고 DVD도 소장하고 있어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늘 가지고 있는 요시다 겐이치의 저서 『시간』도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다 보니 저로서는 '운명'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이지요.

그리고 최근 한국영화 가운데서는 김보라 감독 <벌새>가 좋았어요. 깊은 '상실'을 그리는 작품에 매혹되는, 충일하고 훌륭한 영화체험이었습니다.

 

홍상현

<이십일세기 소녀>의 감독 공모 당시 200대 1의 경쟁률을 뛰어넘은 실력파시지만 한국의 관객 중에서는 아직 가네코 감독을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가네코 유리나

처음 뵙겠습니다. 도쿄에서 태어난 25살의 영화감독이에요. 학창시절부터 독립영화를 찍기 시작했고요. 유령이나 식물, 돌이나 장소에 대한 기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관이라는 영화체험이 확장되는 공간을 아주 좋아하는데요. <잠자는 벌레>는 영화관에 어울리는 영화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앞으로도 영화관에서 볼 때 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유령에 관한 이야기일망정 「잠자는 벌레」의 사운드와 미장센이 주는 느낌은 지극히 따뜻하다. 다른 세상에 속한 이들 간의 애잔한 소통을 보여주는 ‘으스스 하지 않은 감성’ 때문이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유령에 관한 이야기일망정 「잠자는 벌레」의 사운드와 미장센이 주는 느낌은 지극히 따뜻하다. 다른 세상에 속한 이들 간의 애잔한 소통을 보여주는 '으스스 하지 않은 감성' 때문이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홍상현

영화관에 대한 애정을 따로 시간을 할애해 피력하시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웃음) 다음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일단 모두 여성의 주인공이며 핵심 등장인물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여성영화에 대한 감독의 기호를 반영한 거 아닌가 싶은데요.

가네코 유리나

그렇죠. 켈리 라이카트, 아녜스 바르다, 바버라 해머 등 좋아하는 여성감독이 많아요. 단지 여성 특유의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세밀함에는 저 역시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주인공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시키고 있는 것도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이를테면, 저는 제 의사와 관계없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성'이라는 젠더를 강요당했고, '유리나'라는 '여성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제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는 대부분 '카나코'라는, 역시 여성스러운 이름이 붙어 있지요.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이런 우리처럼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이름이 주어지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이름을 여러 번 다른 울림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홍상현

그리고 또 하나, 피아필름페스티벌에서 PFF어워드를 수상한 전작 <산책하는 식물>(2019)은 어느 날 갑자기 뿌리가 돋아나는 소년에 관한, 그리고 이번의 <잠자는 벌레>는 유령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단순히 판타지라는 장르를 좋아하시기보다 본인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해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네코 유리나

정확한 지적이신 것 같아요.

제게는 인간과 식물, 삶과 죽음 등 모든 경계를 융해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은유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네코 유리나 감독은 유령이나 식물, 돌이나 장소에 대한 기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가네코 유리나 감독은 유령이나 식물, 돌이나 장소에 대한 기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홍상현

슬슬 <잠자는 벌레>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타이틀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가네코 유리나

작품에 '빛'이 벌레처럼 부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이 빛은 '작은 영화'나 '기억'을 연상시키죠. 벌레처럼 곳곳을 부유하는 영화의 조각들, 이런 기억들을 언제든 잠을 자는 것만으로 깨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잠자는 벌레>라는 제목을 지었어요.

 

홍상현

전작과 마찬가지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셨습니다. 기획의 계기가 궁금한데요.

가네코 유리나

계기는 중학교 때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상을 어른이 되고 나서 보게 된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남긴 당신의, 과거의 '소리'가 제가 살아가는 오늘의 공기를 진동시키면서 다시 '소리'가 되는 것에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어요. 예컨대 유령이라면 성대가 움직이지 않을 텐데 어떻게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런 망자를 왜 산 자들은 굳이 '말을 하는' 존재로 만들었을까 생각하다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습니다.

 

가네코 유리나 감독은 기록매체에 보존돼있던 조모의 음성에서 “왠지 모를 두려을 느꼈다”고 한다. 산 사람의 그것처럼 공기를 가르며 피부에 와 닿는 느낌 때문이었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가네코 유리나 감독은 기록매체에 보존돼있던 조모의 음성에서 "왠지 모를 두려을 느꼈다"고 한다. 산 사람의 그것처럼 공기를 가르며 피부에 와 닿는 느낌 때문이었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홍상현

주관적인 느낌입니다만 <잠자는 벌레>는 작망자의 음성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사운드에 민감한 필름메이커, 즉, 가네코 감독과 만나면서 미학적 성취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네코 유리나

엄청난 칭찬이네요. 감사합니다. (웃음)

하루 종일 카페에 틀어박혀 무의식적으로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모르는 사람들의 대화를 타이핑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가 종종 있어요. 아마 남들보다 장소ㆍ소리에 조금 더 민감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참고로 <잠자는 벌레>는 음향설계를 너무 고집하다 보니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계신 관객에게 밖에 들리지 않는 사운드 등, 다양한 음향적 기교가 들어가 있는 영화입니다. 그 밖에도 앉아계신 자리에 따라 들려오는 소리가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영화관에서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홍상현

<잠자는 벌레>는 숨을 쉴 수 없으니 대기에서 공명할 수 없고, 따라서 존재자체가 불가능한 유령의 음성에 실재성을 부여합니다. 대단히 기발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저는 이것이 분명 누구든 들을 수 있지만 곧잘 무시되는 남성쇼비니즘 사회에서의 어린 여성, 그리고 나이 든 여성의 목소리를 상징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가네코 유리나

기획 단계에서 말씀하신 부분까지 생각이 미치진 않았어요. 단순히 제 할머니를 이미지하고 있었던 까닭에 '여성의 목소리' 정도에 머물러 있었죠.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보니 '유령의 목소리'란 사회적으로 무시돼 온 사람들의 목소리이기도 하잖아요. 따라서 역시 '여성의 목소리'와 '유령의 목소리'는 근저에서 연결되어 있지 않나 합니다.

 

촬영을 맡은 하라미 유코 감독에게 가네코 감독은 ‘압박감이 없는, 여백이 있는 그림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촬영을 맡은 하라미 유코 감독에게 가네코 감독은 '압박감이 없는, 여백이 있는 그림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홍상현

연출ㆍ각본에 편집까지 담당한 가네코 감독에 촬영을 담당한 히라미 유코 촬영감독, 그리고 토키요 음악감독까지, <잠자는 벌레>는 캐스트는 물론 핵심 스태프까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작품의 성격을 봐도 그렇지만, 저는 이것이 상당한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네코 유리나

스태프와 관련해서는 애초부터 최소화된 인원으로 구성한다는 방침을 둔 것 말고 딱히 특정한 성별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다만, 일본영화계가 워낙 남성 중심적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성 스태프에게 기회가 많지 않다고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잠자는 벌레>가 유능한 여성 스태프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다면 좋겠네요.

또, 하라미 감독에게는 압박감이 없는, 여백이 있는 그림 만들기를 부탁드렸습니다. 토키요 씨는 제작진으로 영입하기 전에 라이브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맑은 목소리에 압도되었고요. 제게 있어서 '영화를 위한 목소리' 그 자체였고, 해서 '여성의 목소리'여야 했습니다.

 

홍상현

주연을 맡은 마츠우라 료 배우를 보면서 쇼비즈니스 업계의 스테레오타이프를 뒤집는 독보적 이미지의 연기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네코 유리나

마츠우라 배우를 캐스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바로 그 이미지였습니다.

이전에 따로 연기를 본 적 없이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하고, 그 눈빛에 반해서 섭외하게 되었거든요. 결과적으로 순발력 있는 애드리브까지 포함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성공적인 캐스팅이었던 거죠. (웃음)

 

“작품에 ‘빛’이 벌레처럼 부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이 빛은 ‘작은 영화’나 ‘기억’을 연상시키죠. 벌레처럼 곳곳을 부유하는 영화의 조각들, 이런 기억들을 언제든 잠을 자는 것만으로 깨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잠자는 벌레」라는 제목을 지었어요.” 가네코 유리나 감독의 술회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작품에 '빛'이 벌레처럼 부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이 빛은 '작은 영화'나 '기억'을 연상시키죠. 벌레처럼 곳곳을 부유하는 영화의 조각들, 이런 기억들을 언제든 잠을 자는 것만으로 깨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잠자는 벌레」라는 제목을 지었어요." 가네코 유리나 감독의 술회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홍상현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이야기인 까닭에 연기의 디렉션도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가네코 유리나

카나코가 '대체 가능한 존재'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출에 임했습니다. 해서 배우에게도 '버스를 타고 유령의 목소리를 쫓아간 것이 꼭 나일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가 뒤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카나코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울러 카나코가 '유령의 소리'와 조우한 것에 관해서도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며칠 전 외계인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온갖 엉뚱한 일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세상일에 무덤덤한 사람의 느낌을 내 달라'고 부탁한 거죠.

 

홍상현

<잠자는 벌레>는 뛰어난 미학적 성취 외에도 평소 음악유닛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감독의 음악적 재능이 발휘되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몽환적인 사운드로 마니아 팬에게 사랑받고 있는 토키요 씨와의 협업과정이 궁금해지는데요.

가네코 유리나

토키요 씨와는 영화작업에 들어가기 전, 서로의 생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때 유령의 눈빛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예컨대 시나리오의 버스 장면에서 "손가락의 움직임이 리듬이 되어..." 같은,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디테일한 지문을 적어 놓았는데도 제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기대를 뛰어넘는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주연을 맡은 마츠우라 료 배우는 모델 출신으로 쇼비즈니스 업계의 스테레오타이프를 뒤집는 독보적인 이미지의 연기자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주연을 맡은 마츠우라 료 배우는 모델 출신으로 쇼비즈니스 업계의 스테레오타이프를 뒤집는 독보적인 이미지의 연기자다. (C)2020 The Sleeping Insect Film Partners

"혹독한 계절이 이어지는 탓에 한국에 직접 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한국의 극장에서 제가 만든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사실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직접 뵙고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는 없었지만, 혹여 <잠자는 벌레>에서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계셨다면 정말 좋겠네요. 아니, 꼭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 느낌이 아니더라도 뭔가 감상이 있으시다면 부디 SNS를 통해서라도 남겨놔 주시길 부탁드려요. 온라인 공간을 통해서라도 꼭 함께하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머잖은 미래에, 꼭 한국의 영화관에서 여러분의 곁에 앉아 함께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생각했다.

콘텐츠가 많은 사람과의 대화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매순간 실감하게 해주었던 이 크리에이터, 유별나다 싶어질 정도로 자립심이 강한 성격 때문에 혹여 '부친의 이름 덕을 보지 않았느냐'는 시선을 받게 될까 집에서 영화 좋아하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지내느라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을까.

영화를 향한 피 끓는 열정으로 동분서주하며 2천 2백만 원의 제작비를 모아 필사적으로 완성한 영화를 뒤로하고 다시 '제 머릿속엔 항상 언젠가 스크린을 통해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은 세계의 모습으로 가득하다'면서 춤추는 정원, 인류가 사라진 세상의 풍경 등에 관한 신작 구상을 펼쳐놓던 그녀에게서 코로나바이러스에도 꺾이지 않는 크리에이터의 열정이 전해졌다. 애처로우리만치 무모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코끝 찡하게 아름다운.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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