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집' 한없이 죽음에 가까워지기
'축복의 집' 한없이 죽음에 가까워지기
  • 김민세
  • 승인 2022.03.16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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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 너머에 의미는 없다"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경험은 몸 일부를 통해 외부 세계를 감각한다는 말인데, 죽음이라는 것은 몸이 감각의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체험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죽음 그 자체의 순간에는 감각 자체가 정지하기에 이미 죽은 자조차도 죽음 직전의 고통까지 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가 봐온 죽음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그중엔 적어도 죽음을 재현하는 윤리에 대한 자의식이 있는 영화들은 죽음을 노골적으로 외면화하지 않는 방식을 택하곤 한다. 어떻게 보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체험하지 못했고 가늠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 필름다빈

죽음을 엿보는 시선. 어쩌면 그것이 영화가 죽음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그런데 <축복의 집>을 마주하고 나면, 뭔가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죽음 이후라는 것은 가능한가. 영화는 죽음에 얼마큼 가까워질 수 있는가. 질문이 변경한 노선은 이러하다. 계기적 사건이 아닌 절차의 문제. 윤리적 시선이 아닌 거리의 문제. 이러한 새로운 질문 앞에서 <축복의 집>은 죽음 이후의 절차를 가시화하고 한없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방식을 택한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후세계를 이야기하거나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시스템의 절차가 되어 연속체로서 존재하게 되었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축복의 집>은 그 지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작동하는 영화이다.

정확한 시간대나 인과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영화에서 해수의 엄마의 모습은 죽은 상태(시체)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섬뜩해지는 것은 그 죽음의 형상이 영화에 등장하는 타이밍이다. 엄마의 죽음을 확실히 전제에 두고 있으면서도 영화가 그것의 확인을 최대한 미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라는 사건이 죽음이라는 절차가 되었을 때, 죽은 자의 몸은 마치 서사와 카메라의 중심에서 멀어져 객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죽음이라는 계기적 사건을 제시하기도 전에,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의 행동과 정서를 외면화하기 이전에 시스템이라는 세계와 절차라는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 필름다빈
ⓒ 필름다빈

공장의 날카로운 기계 소리만 들리는 암전 된 화면. 그리고 그 위로 떠오르는 작은 화장실이 하나 달린 탈의실의 공간. 각기 다른 성별을 갖고 있음에도, 작업복을 벗고 드러나는 땀이 가득한 그들의 몸에서는 어떠한 에로티시즘의 가능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무언의 약속이 있듯이, 처음부터 너무 잘 알고 있었듯이 한 명씩 차례로 화장실에 들어가 작업복을 빨래할 뿐이다. 이것은 죽음의 반응이 아니다. 해수가 죽음의 고통을 짊어짐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참으면서 노동해야 하는 아이러니로 이 장면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또는 죽음의 공기가 해수가 존재하는 장소까지 묻어나고 있다는 식의 말은 뻔한 것이다.

이곳에는 상징이 없고 은유가 없으며 환유가 없다. 토요일이 끝나면 일요일이 오고, 일요일이 끝나면 월요일이 오듯이. 사람은 서류가 되고, 화장 전에 분칠한 얼굴은 뼛가루가 되듯이. 태어나자마자 국가의 것이 된 몸은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듯이. 그저 절차가 있다. 무색하게 다음 일이 일어난다. 절차에는 반응이 소거된다. 죽음 이후의 절차는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축복의 집>이 노동의 시간 또는 노동 이후의 시간을 통해 고집스럽게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세상은 사건으로 흘러가지 않고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듯이 절차로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선언을 받아들이고 그저 다음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보면, 정말 한없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에는 인물의 정서가 개입하지 않는다. 후회, 연민, 죄책감, 절망감 등 많은 단어가 떠오르지만, 해수의 얼굴, 등, 걸음, 손, 손톱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발인의 시간이 오면 카메라는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이 픽션이었다는 것을, 그 픽션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듯이 해수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린다. 고개를 돌리면 허구로써의 영화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극히 솔직하면서 고통스러운 죽음이 얼굴을 들이민다. 죽음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차라리 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라슬로 네메즈에게 보냈던 편지를 인용해 말하자면, 영화가 한순간 자신의 눈꺼풀을 내려버리길 바랬다.

 

ⓒ 필름다빈

<축복의 집>은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 그 모든 광경에서 한순간이라도 눈을 깜빡인다면 안될 것처럼 발인 과정의 모든 순간을 지켜본다. 지금까지의 영화들이 죽음의 순간에서 눈을 감았다면, 그런 것은 무책임한 것이라고 말하듯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신비성과 불확정성을 하나씩 들춰낸다. 허구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로만 존재하는 이미지의 나열은 우리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것밖에 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이 <축복의 집>이 만드는 우리와 영화, 우리와 죽음의 거리이다. 그리고 그 현실의 이미지가 주는 무력감에 압도되어 해수라는 허구는 변두리에서 무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가끔 죽음을 높은 수위로 다루거나 집요하게 탐구하려는 어떤 영화들을 보다 보면 이상하게도 무던하게 반응하게 될 때가 있다. 표현의 양식, 서사의 구조, 메시지 등에 따라서 무의식적으로 지금 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않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미지들은 상징이 되고 은유가 되고 환유가 되어 우리의 마음에 닿는다. 반면 <축복의 집>은 보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봄으로써 보는 것을 의심하게 한다. 더불어 죽음을 죽음 그 자체로 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미지들은 현실이 되어 우리의 눈에 닿고 살에 닿는다. 그런 지각 앞에서 할 수 있는 판단은 그 너머에는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축복의 집
Dust and Ashes
감독
박희권

 

출연
안소요
이강지
김나영
김재록
이정은
나종기

 

제작 고앤고필름
배급 필름다빈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79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2.24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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