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벤느망' 사건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레벤느망' 사건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 이현동
  • 승인 2022.03.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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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간과 사회, 그 시스템의 정면에 서서"

임신 중절을 소재로 한 영화인 크리스티안 문쥬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데에 이어 동일한 소재와 시대적 배경을 공유하는 오드리 디완의 <레벤느망>(2021)가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다시금 근대적 여성관을 다루는 것이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여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1975년 프랑스에서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 법이 통과되기 전에 여성들은 가혹한 현실과 마주하며 원치 않았던 임신을 두 가지의 방법으로 처리해야 했다. 출산과 낙태라는 두 가지 방법 중에서 낙태는 근대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멸시, 그리고 그 의무에 착상하는 어쩌면 종교적이라 할 수 있는 '보편성'을 두둔하며 생성된 비이성적인 가치체계였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을 원작으로 하는 <레벤느망>은 임신 중절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토대로 당시에 진행되었던 참혹한 낙태의 현장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감독은 아니 에르노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여자들이 임신 중절을 결심하게 된 순간에 체감하게 되는 공포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3인칭 관점에서 낙태를 관찰하였다면, <레벤느망>은 1인칭으로 좀 더 근접하여 그 경험의 중심에서 방황하는 안(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의 감정을 1.37:1의 화면비로 스크린에 가득 담아낸다. 이 활용은 감독의 의도와 부합하는 장치로서 그녀의 몸짓과 표정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요소이자 관객들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자연스럽게 이끌면서 한편의 현장르포와 같은 직관적인 작품으로 다가온다. 특히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자막인 (임신) 주차는 생명과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기이한 몸의 형체에 대해 골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 왓챠, 영화특별시SMC

시스템의 끈

프랑스라는 나라는 철학자인 부르디 외의 말대로 '구별 짓기'가 통용되는 나라이다. '구별 짓기'는 구별을 형성하는 생성 원칙이 일정한 계급과 맺는 관계의 체계들, 즉 교육, 문화, 권력, 위계 등이 사회 구조를 축조하고 이러한 구조적 양상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활 속에 체화됨을 의미한다. <레벤느망>에서 안에게 시스템은 그녀의 결정을 촉구하는 배경이 된다. 감독의 말대로 그녀는 비교적 자유로운 노동자의 계층이자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한 사람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대학은 중산층의 분위기와 엄숙한 규율과 규칙이 팽배한 장소로 묘사된다. 이 혼재된 구별 속에서 그녀가 겪는 임신은 궁극적으로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가 의사로부터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고 불법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낙태를 희망하는 건 결국 시스템의 죽음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영화 초반 안은 문학을 전공하며 교수의 질문도 거리낌 없이 대답하는 촉망받는 수재이지만, 점차 고통의 몸부림치면서 교수의 질문을 온전히 대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시스템의 막강한 파괴력 앞에 고군분투하는 그녀와 더불어 자궁안에 잠식하는 생명과 죽음의 형태는 <레벤느망>의 주제의식을 형상화한다. 대표적으로 나열되는 공간들인 부모의 카페, 기숙사, 클럽, 화장실, 병원, 불법 수술실은 '겉(out)'과 '안(in)'의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은밀하게 전개되는 낙태라는 사건이 어떠한 함의를 담고 담론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한다. 영화에서 특정하여 임신의 계기로 추정되는 실제적인 관계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건이 은연중에 찾아올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공간은 안의 감정이 시스템의 끈에서 자유 할 수 없음을 드러내며, 더 나아가 여자의 신체라는 시스템이 마주하게 될 아픔을 보여준다.

 

ⓒ 왓챠, 영화특별시SMC

소리를 통해 '본다'

안에게 공포와 불안을 유일하게 배출하는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스템에 접촉하지 않는 화장실이라는 장소이다. 화장실이라는 배출의 공간은 비밀스러운 일들이 자행되던 장소이자 생리적인 욕구가 수시로 해소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자신의 치욕을 들키지 않는 것이다. 그녀에게 외부적으로 발설되지 않아야 하는 규칙이 있다면 바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다. 먼저 안은 기숙사에서 불에 달궈진 쇠막대기로 소리를 입안에 머금고 중절을 시도하며, 그다음 불법 수술을 받게 될 때도 의사는 그녀에게 외부적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출산의 고통을 입 밖으로 소리 낼 수 없는 시스템의 억압은 임신의 숭고함을 제거하면서 관객들이 느끼는 청각을 더욱 시각적인 영역으로 관망하게 한다.

잔뜩 찡그린 안의 표정 사이로 얕은 신음들은 그런 의미에서 청각을 삭제한 호러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항상 불안과 공포에 쫓기며 거의 웃음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소리의 역할이 극대화된 '봄'(see)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레벤느망>에서 소리는 내부적으로 그녀가 혼자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는 장면과 클럽의 소리는 안에게 '겉'으로 횡행하는 무의미한 소리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소리는 내부적으로 침몰하고 있는 감정을 부각시켜 관객들로 하여금 안의 감정의 상태를 체험하게 한다.

 

ⓒ 왓챠, 영화특별시SMC

우리는 종반부에 화장실에서 그로테스크한 낙태 장면에서 여성의 고통을 곧바로 응시한다. 변기의 통로와 질이라는 통로 사이로 잉태가 아닌 배출되는 핏덩이를 통해 잔재하는 이러한 시스템의 '끈'은 이전에 임신을 하고 있는 안에게 '임신했으니 안전하잖아'라고 말한 남성의 의식이 당시 혹은 현재에도 잔류하고 있는 것인지를 묻게 한다. 시스템의 블랙홀 사이로 결국 끈이 잘리는 것도 오로지 여성의 몫이며, 그것은 여전히 불합리하다는 점을 은연중에 의식하게 한다. 이는 세포 하나를 때어내는 수준이 아닌, 캐릭터뿐만 아니라 서사를 온전히 때어내는 혼돈으로 몰입하게 한다.

<레벤느망>이 갖춘 이미지의 몽타주의 밀도는 데쿠파주의 엄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가 언젠간 마주하게 될 죽음이 이동하는 경로를 끊임없이 전시할 뿐, 극적으로 서사를 조율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귀속된 아이가 주차를 거듭해갈수록 몸집이 비대해지는 것처럼 그녀의 고통의 크기 또한 비례적으로 상승한다. 전 과정에서 서사를 주도하는 건 안의 몫일 테다.

종합해 보면 시대적 배경과 소재 자체에 의존하는 <레벤느망>의 특성은 형식적이라기보다 감각적이며, 감각적이기보단 사건적이라는 사실에서 이 영화가 갖춘 파괴력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실로 복권된 궤적 중 하나이다. '안'은 시대에 항의하는 한 명의 개혁자이자 자유인, 그리고 착취당하길 원치 않는 인물이다. 한 개인이 주체적으로 자신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 승리를 차지하는 이 영화는 과거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없었던 근대의 암흑 속에서 다시금 떠올려선 안 될 기억으로 누군가에게 기억될 것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왓챠, 영화특별시SMC

레벤느망
Happening
감독
오드리 디완
Audrey Diwan

 

출연
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
Anamaria Vartolomei
캐이시 모테 클레인Kacey Mottet Klein
루아나 바야미Luana Bajrami
루이즈 오리-디케로Louise Orry-Diquero
루이즈 셰비요트Louise Chevillotte
피오 마르마이Pio Marmai
상드린 보네르Sandrine Bonnaire
아나 무글라리스Anna Mouglalis
리오너 오버슨Leonor Oberson
파브리지오 롱기온Fabrizio Rongione

 

수입 왓챠
배급 왓챠, 영화특별시SMC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00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3.10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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