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 돼지의 영화는 클래식이 될 수 있는가
'피그' 돼지의 영화는 클래식이 될 수 있는가
  • 김민세
  • 승인 2022.03.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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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도시가 영화가 되고 돼지가 영화가 되는 것"
ⓒ 판씨네마

<피그>의 첫 시퀀스가 가리키는 시대는 모호하게 비틀려있다. 근대화 또는 도시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숲과 강의 풍경. 그런 풍경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친환경적인 '롭'(니콜라스 케이지)의 거주지. 시골식 버섯 타르트라는 소박한 요리. 시각적으로도 촉각적으로도 그것들과 어떠한 부조화도 느껴지지 않는 롭의 의상과 육체. 그리고 자급자족(인 것처럼 보이는)의 방식. 영화는 롭을 둘러싼 의식주와 경제활동 방식에서 동시대를 지워냄으로써 마치 시대극을 보는 듯한 감상을 안긴다. 그래서 우리는 첫 시퀀스의 일련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도시와는 단절된 시골이라는 장소와 동시에 먼 옛날이라는 모호한 시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오인된 시대성은 아미르(알렉스 울프)의 스포츠카가 그 공간에 침투하며 제 방향을 찾는다. 차체의 곡선과 노란색의 색상이 숲의 풍경과 부조화를 일으키며, 동시대를 지목하는 것이다. 또 시골에 도시의 징후를 운반해온다. 나아가 이러한 스포츠카의 운동을 모더니티의 예술인 영화라는 운동으로 읽어내면 비약일까. 물론 시골에 스포츠카가 등장한 것을 뤼미에르의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오는 것과 동일한 볼륨으로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수많은 영상매체에 적응한 이 시대에는 말이다.

그러나 <피그>는 대도시와 함께 등장한 영화 이미지 지각의 특성들을 시각적으로 재현해내면서 그러한 사유의 연결을 가능하게 만든다.

 

ⓒ 판씨네마

도시와 영화를 연결하기 위해 19세기와 20세기에 논의되었던 영화 이미지 연구들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19세기 유럽에 대도시가 등장하자 독일 사회학자 짐멜은 대도시로 인해 도시인의 지각 작용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를 주목한다. 그는 19세기 말에 빠르게 밀려드는 대도시가 도시인들에게 부단히 변화하는 '이미지의 홍수'를 겪게 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사물과 사람을 개체성이 배제된 균질적 요소로 인식하게 만드는 화폐경제의 특성으로 인해 도시인들은 그런 이미지들에 이성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고 본다.(김호영, 『영화이미지학』, 문학동네, 2014, pp.52-54)

독일 철학자 벤야민은 아케이드와 교통수단의 발달에 주목하며 짐멜의 사유를 이어나간다. 백화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케이드는 화려한 볼거리들을 동시다발적, 표피적으로 제시하며 대상에 대한 단편적인 지각만을 가능하게 하였고, 철도를 통한 이동의 경험은 창유리 밖의 대상을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적 이미지로만 지각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런 도시인들의 지각적 특징을 ‘파노라마적 지각’으로 명명하면서 이를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것이 1초에 24프레임의 운동을 하는 영화 이미지라고 주장한다.(위와 동일한 서적, pp. 59-62)

 

ⓒ 판씨네마

다시 <피그>로 돌아와서. 자신이 키우던 트러플 돼지를 도둑맞은 롭은 푸드 바이어 아미르의 차를 타고 돼지를 찾으러 마을 곳곳을 다닌다. 결국 마을에서 돼지를 찾지 못한 그는 도시로 가기로 결심한다. 시골에서 도시로의 이행. 롭이 아미르의 차를 타고 도시로 갈 때, 도시의 빌딩과 빛은 트래킹 샷의 촬영과 디졸브의 편집을 통해 기이하게 재현된다. 지금 여기에서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미지는 눈앞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대체되고, 혼란스럽게 겹쳐진다. 그리고 롭이 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차 안에서 창밖으로 지켜본다.

이런 이미지들의 연속은 앞서 언급한 벤야민의 '파노라마적 지각'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아미르의 스포츠카가 이동한다는 것은 모더니티로서의 영화가 운동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뿐만 아니라 지하의 파이트 클럽은 교환가치로 물화된 인간이라는 짐멜의 논의를 불러오고, 유명 레스토랑을 운영해 큰돈을 벌기 위해 계절별로 요리 콘셉트를 정하는 셰프는 추상적으로 또는 은유적으로 아케이드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피그>는 롭이 도시로 이동할 때, 또는 도시를 거닐 때 등장하는 각기의 기호들을 통해 도시인들의 생활과 모더니티로서의 영화의 지각적 특성을 재현해낸다.

반면 첫 시퀀스가 내포하는 시골의 지각은 성격이 다르다. 나무를 본다는 것, 돼지를 따라간다는 것. 순간의 이미지가 아닌 하나의 대상, 또는 주체를 쫓는 것. 운동을 통한 분절이 아닌 운동을 통한 연속. 그리고 흘러가는 강물을 본다는 것. 자연의 운동은 무한하고 시골의 시간은 분절되지 않은 채 연속적으로 흐른다. 마치 <퍼스트 카우>(2019)가 화물선의 거대한 운동을 강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소박한 소의 운동으로 지워냈던 것처럼. 분명 <피그>는 <퍼스트 카우>와 어떤 방식으로든 공명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퍼스트 카우>가 화물선의 운동을 지우는 소의 영화라면, <피그>는 도시의 영화가 넘치는 곳에서 돼지의 영화를 찍는 한 남자의 영화이다.

 

ⓒ 판씨네마

아미르가 스포츠카를 몰고 도시의 이곳저곳을 다닐 때,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일관된 주제의 라디오 방송이 나온다. 방송의 내용은 클래식에 대한 내용이다. 200년이 지나도 미적으로 유효하며 지속성이 길다는 클래식의 특징. 그리고 그것을 롭과 아미르가 차 안에서 듣는다. 그러므로 그 라디오 방송은 영화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운반되고 있는 도시의 영화와 돼지의 영화에 대한 질문이다.

무엇이 클래식인가. 또는 돼지의 영화는 클래식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필자는 롭의 트러플 돼지가 죽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파이트 클럽에서 몇 대의 주먹을 맞고도 꿋꿋이 서 있던 롭의 다리가 휘청이는 카메라와 함께 주저앉을 때,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화는 모더니티에 굴복하고 마리라는 단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주먹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맞는, 원수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급 요리를 대접하는 대안적인 영웅은 이 시대의 영화에서 유효할 수 있을까.

롭은 다시 시골로 돌아간다. 무한히 흐르는 강의 이미지를 보고 그 물에 손을 넣어 얼굴을 씻는다. 그리고 죽은 아내가 녹음했던 테이프를 틀고 노래를 들으며 부츠를 하나씩 벗는다. 왠지 모르게 이 장면은 <피그>의 어느 장면보다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가 부츠를 벗는 것이 포기가 아니라 잠깐의 휴식, 또는 재정비처럼 보였기 때문일까. 그가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돼지의 영화를 응원하고 싶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판씨네마

피그
Pig
감독
마이클 사노스키
Michael Sarnoski

 

출연

니콜라스 케이지Nicolas Cage
알렉스 울프Alex Wolff
아담 아킨Adam Arkin
니나 벨포트Nina Belforte
데일른 영Dalene Young

 

수입|배급 판씨네마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1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2.23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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