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리쉬 피자'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리코리쉬 피자'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 배명현
  • 승인 2022.02.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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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반가운 신작인 <리코리쉬 피자>는 <팬텀 스레드>(2017) 이후 5년 만에 개봉한 작품이다. 필자가 그에게 기대한 것은 단 하나. '개쩌는 것'. 이는 그이기에 가능한 기대이다. 글의 서두에서 이런 호들갑을 떠는 것부터 알 수 있듯, 필자는 이 영화가 올해 상반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기록될 만하다 자부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전작 <팬텀 스레드>에서 보여준 왜곡된 애정은, 그 형태를 바꾸어 <리코리쉬 피자>로 도착했다. 전작에서 퇴행적 애정 갈망과 지배, 소유 욕구가 영화를 움직였다면, 이번 영화는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이 영화를 움직이는 핵심 코드가 아닐까 싶다.('성장'이라는 단어를 보고 누군가는 벌써 “엥? 아닌데!”라고 반기를 들 수 있지만, 잠시만 참아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하는 바이다. 이 영화가 성장 영화인 것이 아니라는 데 나도 동의하니 말이다.) 이번 영화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인물들은 그가 다룬 인물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이 나이는 그가 지금까지 다루어온 왜곡된 인물의 형태와 엮어 들어가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 유니버설 픽쳐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를 움직이는 인물들은 늘 왜곡되어 있었다. <부기 나이트>(1997), <매그 놀리아>(1999), <펀치 드렁크 러브>(2002),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더 마스터>(2012), <인 히어런스 바이스>(2014), <팬텀 스레드> 그리고 <리코리쉬 피자>까지. 그가 다루는 인물들은 우리의 눈으로 보았을 때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었고, 또 그렇기에 그들은 살아있었다. 이 살아있는 캐릭터를 구축할 줄 아는 그는 영화의 서사를 '자연스럽게' 숏과 씬 그리고 시퀀스로 연결시겼고, 영화를 완성시켰다. 그런데 왜인지 이번 영화는 이 연결을 자꾸만 분절시킨다. 캐릭터는 살아있었지만, 연결과 연결이 이어지지 않았고 자꾸만 그 연결을 나중으로 혹은 그다음 장면으로 유보시켰다.

우리는 <리코리쉬 피자>의 초반을 기억한다. 두 사람의 첫 만남. 이 만남은 기묘하다. 개리(쿠퍼 호프먼)는 왜 알라나(알라나 하임)에게 말을 걸었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15세인 개리가 갑자기 치기를 발휘해 말을 걸었는지 아니면 본래부터 알라나를 눈여겨 보고 있다가 겨우 말을 걸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분명 두 사람은 처음 대화를 하고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개리의 노골적인 플러팅은 다음 시퀀스와 연결된다. 두 사람은 펍에서 다시 재회한다. 알라나는 첫 대화에서 내내 개리에게 "꼬맹이와는 데이트하지 않아"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번복한다. 그녀는 개리와 만나 이야기를 한다. 이때 스크린 안에 흐르는 긴장감은 어딘가 야릇하다. 그 분위기를 이어가듯 개리는 어린이가 보는 쇼에서 알라나를 위한 농담이랍시고 '그걸' 한다고 지껄이고는 방송에서 잘린다.

그러다가 곧 전화기를 붙잡고 서로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드러낸다. 이 감정의 고저의 낙차는 관객에게 혼란을 준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밖으로 널뛰며 관객에게 '그저 지켜보기'를 요구한다, 우리에게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재미'를 느낀다. 이 재미는 어떤 유머의 요소 혹은 흥미진진한 긴장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두 사람의 행위가 이해할 수 없는 위태로움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남의 집 불구경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 유니버설 픽쳐스

개리와 알라나의 감정은 서로 이어지지 못한 채 빙글빙글 돈다. 마치 두 은하가 충돌했을 때 일어나는 중력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처럼 서로 합쳐지는 동시에 파괴되고 붕괴된다. 이 불안한 움직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이를 보여주는 건 역시 씬과 씬의 연결이다. 너무나 명징하게 씬과 씬은 분절되어 있다. 거의 서사가 중단되어버린 듯 단절된 그 자리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붙어버린다. 이 단절을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두 사람의 불안이 중간을 비워 버렸다고. 마치 어떤 기억은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듯.

이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단연 대사이다. 두 사람의 대사는 대사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하는 일상적 대화에 가깝다. 이 대사를 뱉는 순간은 너무나 가볍지만, 동시에 내면 그 자체를 읽을 수 있을 만큼 투명하다. 그렇기에 이 대사들이 끝난 순간, 그 대사들의 전체 뭉텅이가 '의미'로 다가올 때,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심지어 물침대를 팔기 위해 알라나가 전화기에 '섹시'한 말을 하며 개리를 쳐다볼 때도. 이 두 사람은 대화를 매개로 서로 가까워지려 한다기보단, 오히려 점점 더 서로 연결될 수 없음을 증명하려는 도구로까지 보이게 한다. '물'침대에는 액체적 성질의 성적 은유가 가득하지만 두 사람은 '하나'로 이어질 수 없고, 그렇기에 키스만 한다. 대사는 두 사람을 물침대라는 액체의 속성을 다른 곳으로 옮겨 '기름'으로 데려간다.

기름이라는 속성에는 성적 은유가 아닌, 사회적 배경이 녹아있다. 베트남 전쟁과 미국의 위기와 불안. 경제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 15살의 개리는 알지도 못하는 세계의 원리 때문에 알라나와 연결될 수 없고, 알라나는 이 세계의 원리를 알기 때문에("15살과 나는 어울릴 수 없어") 개리와 연결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에 노이즈가 낀다. 베니 사프디가 연기한 조엘 와치스와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존 피터스, 두 사람도 물론 그러한 노이즈이다. 존 피터스는 물침대를 샀고(문학적 은유로 보자면 개리의 욕망을 구매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름(세계의 논리)을 원한다. 존 피터스는 모든 여자와 연결되고 싶어 한다. 조엘 와치스는 사랑보다 대의가 중요한 사람이다. 이런 두 사람이 두 사람을 방해하는 건 당연하다.

 

ⓒ 유니버설 픽쳐스

하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심지어 극장의 매표소 앞에서. 왜냐고? 알 수 없다. <리코리쉬 피자>는 끝까지 두 사람의 불안과 불연속적 선택을 카메라로 담는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성, 그것이 이 영화의 정체이며 폴 토마스 앤더슨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는 세계를 '사고'(Accident)로 바라본다. 조금 더 희망적인 입장에서 '사건'(Event)으로서의 사고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필자는 두 사람의 사랑 고백을 그렇게 보기 어렵다.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들의 불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하지만 이 사랑이 다른 의미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리고 결국 일상의 대화를 닮은 대사를 계속 반복해서 말할 것을 생각해본다면, 아마 낙관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이 꼭 비극적 결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것이 청춘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너진 방향 속에서도 그다음을 찾아 움직이니까. 우리는 갈 곳을 모르더라도 계속해서 움직일 것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어른으로서의 안정 이전에 누릴 수 있는 청춘의 불안이니까. 그리고 필자는 이 부조리한 과정을 '성장'이라 말하고 싶다.

※ 이 기사의 제목인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는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문학과지성사, 2014)의 제목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유니버설 픽쳐스

리코리쉬 피자
Licorice Pizza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Paul Thomas Anderson

 

출연
알라나 하임
Alana Haim
쿠퍼 호프만Cooper Hoffman
숀 펜Sean Penn
톰 웨이츠Tom Waits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
베니 사프디Benny Safdie

 

수입|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34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2.16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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