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저를 키운 것은 한국의 여러분"
[interview] "저를 키운 것은 한국의 여러분"
  • 홍상현
  • 승인 2022.02.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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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레드> 프랑스 개봉 앞둔 미시마 유키코 감독
가와세 나오미, 니시카와 미와와 더불어 일본영화계의 대표적 여성감독으로 회자되는 미시마 유키코 감독은 자신을 키운 요람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의 영화제’를 꼽는다. (C)FILT
가와세 나오미, 니시카와 미와와 더불어 일본영화계의 대표적 여성감독으로 회자되는 미시마 유키코 감독은 자신을 키운 요람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의 영화제'를 꼽는다. (C)FILT

불행했던 어제를 넘어, 아름다운 내일을 일군 인류문화사의 대표 사례로 국제영화제만 한 게 없을 것이다.

'많은 영화 작품을 모아서 일정 기간 내에 연속적으로 상영하는 행사'로 정의되는 이 이벤트의 효시는 1932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까지 베니스 비엔날레의 일부로 진행되다 이듬해 독립한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시대배경 상 무솔리니 정권의 체제선전 도구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반증하는 대표적 사례가 1938년 당시 최우수상(무솔리니 컵) 수상작 선정 갈등이다. 심사위원단이 만장일치로 미국 출품작을 선정했지만 트로피를 거머쥔 건 추축국 독일의 나치 선전용 다큐멘터리 <올림피아>였다. 영화인들은 격분해 베니스를 떠났고, 심사에 참여했던 프랑스 예술부의 필림 에를랑제는 본국으로 돌아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화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9년 9월 1일부터 알프마리팀 주의 바닷가 휴양도시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된 게 오늘날 베를린국제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국제영화제로 불리는 칸영화제다.(그러나 결국 1회가 개최된 것은 전쟁이 끝난 1946년. ※ 주)

 

3월 9일 프랑스에서 개봉하는 「레드」 포스터. 배급사는 ‘여성의 자립’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타이틀을 「더 하우스 와이프」로 정했다고. (C)Art House Films
3월 9일 프랑스에서 개봉하는 「레드」 포스터. 배급사는 '여성의 자립'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타이틀을 「더 하우스 와이프」로 정했다고. (C)Art House Films

매년 세계 각지에서 100개 이상 개최되고 있는 국제영화제는 영화예술 콩쿠르로서의 성격 외에도 영화무역의 장을 제공하는 필름마켓으로서의 성격, 영화인 간 교류·국제 공동제작 촉진 등의 기능을 한다. 그러나 나름 다양한 위치에서 국제영화제를 경험해 본 필자가 생각하는 핵심기능은 역시 참신한 크리에이터의 발굴·육성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차례로 창설된 부산국제영화제부천국제판타스틱영회제, 그리고 전주국제영화제는 세계진출을 꿈꾸는 아시아 영화인들의 등용문이 되어왔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미시마 유키코 감독도 한국의 국제영화제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온 인물이다.

가와세 나오미, 니시카와 미와와 더불어 일본영화계의 대표적 여성감독으로 회자되는 그는 자신을 키운 요람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의 영화제'를 꼽는다. 동갑내기인 가와세 나오미가 칸영화제, 후배인 니시카와 미와가 시카고국제영화제 등에 자주 초청되어 존재감을 어필해왔던데 비해, NHK의 휴먼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활약하다 다소 늦게 영화감독에 데뷔한 미시마 감독은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국제무대에서의 기반을 다졌다.

첫 번째 해외초청작인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2015)은 전주를 거쳐 상하이국제영화제에 갔고, <친애하는 우리 아이>(2017)는 전주를 거쳐 몬트리올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 밖에도 한국과 인연이 깊다. 장편상영업화 감독 데뷔 이후 내놓은 작품 중 단 두 편을 제외한 모두가 한국에서 개봉했으며 국내검색엔진의 해외저자사전에까지 이름이 올라 있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해피 해피 브레드>(2012)의 동명원작소설(저자는 본인)이 17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여서다.

그런 그가 코로나19의 와중에 세 번째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한국에서 개봉했던 <레드>(2020)에 관한 낭보를 전해왔다. (타이틀을 클릭하면 영화를 보는 페이지로 넘어갑니다. ※ 주) 초청 2주년, 개봉 1주년을 맞는 올 3월 9일 프랑스 개봉이 결정된 것.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온라인 GV로도 만나지 못했던 한국 관객 여러분께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는 그와 밀린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미시마 유키코 감독의 첫 번째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은 같은 해 6월 상하이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2016년 5월 국내 개봉했다. (C)JINJIN Pictures
미시마 유키코 감독의 첫 번째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은 같은 해 6월 상하이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2016년 5월 국내 개봉했다. (C)JINJIN Pictures

홍상현

<레드>의 3월 9일 프랑스 개봉을 축하드립니다. 마침 작품이 전주국제영화제 초청 2주년, 한국 개봉 1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인데요.

미시마 유키코

먼저, 제 영화가 프랑스에서 개봉하게 되어 진심으로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코로나 19 와중에 극장 개봉이 이뤄진다는 점에 대해서도 작품에 참여한 캐스트ㆍ스태프를 대표해 깊이 감사드리고요. 한국의 전주영화제에 초청된 것이 세계 각지에서의 상영기회로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프랑스는 경애하는 프랑수아 트뤼포,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나라입니다. 커다란 환희와 말로 다 하지 못할 긴장감을 느껴요. 아울러, 프랑스 배급사가 '여성의 자립'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타이틀을 <더 하우스 와이프(The House Wife)>로 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프랑스 관객 여러분께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느끼실지 무척 궁금합니다.

개봉 날에 프랑스에 직접 가보고 싶지만 무리겠죠? 아무튼 언젠가 제 영화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관객 여러분과 직접 만나 뵐 수 있도록 앞으로도 영화 만들기에 열과 성을 다 하고 싶습니다.

 

홍상현

말이 나온 김에 오랜 인연이 있으신 전주국제영화제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2015년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으로 처음 전주를 찾으셨고, 2017년 <친애하는 우리 아이>로 돌아오셨습니다. 특히 <친애하는 우리 아이>는 그 해 몬트리올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그리고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레드>로 드디어 세 번째 초청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셨습니다.

미시마 유키코

그저 감사드린다는 것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전주국제영화제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한국 관객 여러분께 "돌아왔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전주국제영화제는 제 작품을 처음으로 불러주신 소중한 국제영화제입니다.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은 기획한 지 10년 만에 완성한 작품인데, 누구보다 먼저 영화의 장점을 찾아내 주신 게 한국 관객, 그리고 전주국제영화제의 여러분이셨어요. 처음 전주를 방문했을 당시 받은 인상은, 초청작의 감독의 지명도나 유명세에 따라 고르지 않고, 작가주의에 집중해 선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영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고요.

월드프리미어로 <친애하는 우리 아이>를 상영했던 2017년에도 '돌아왔구나!'하는 생각에 환희에 찼던 기억이 새로워요. 그것만으로도 황송한데 한국 개봉에다 몬트리올에서는 수상까지 하게 되어 더욱 감격스러웠고요. 그래서 <레드>의 초청 또한 특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직접 참여할 수 없었던 게 안타까울 따름이죠.

영화에 대한 심미안을 가지신 한국 관객 여러분께서 제 작품을 봐주시는 건 언제든 가장, 진심으로 행복하고 힘이 됩니다.

 

「레드」를 만들기 이전에도 빨강은 미시마 유키코 감독에게 ‘거역할 수 없는 무엇’의 느낌을 던져주는 색이었다. (C)FILT
「레드」를 만들기 이전에도 빨강은 미시마 유키코 감독에게 '거역할 수 없는 무엇'의 느낌을 던져주는 색이었다. (C)FILT

홍상현

여기서 시간을 잠시 1970년대로 되돌려 볼까요?

발레를 배우던 네 살 소녀가 아버지와 명화좌에서 마이클 포웰 감독의 1948년 작 <분홍신>을 보게 됩니다. 이 영화의 영어 원제가 "러 레드 슈즈(The Red Shoes)"거든요? 그런데 흥미로는 점은, 미시마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레드>의 영어 타이틀이 "셰이프 오브 레드(Shape of Red)"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비과학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웃음) 뭔가 운명적인 느낌이 드는 대목인데요.

미시마 유키코

레드는 원래부터 제게 '거역할 수 없는 무엇'의 느낌을 던져주는 색이었습니다. "운명적"이라는 표현을 들으니 새삼 그런 감정을 곱씹게 되네요.

<분홍신>은 안데르센의 동화로 신는 순간 영원히 춤을 추게 되는 전설을 모티브로 한 작품인데 제 작품 <레드>에서도 붉은 깃발이 나오지요. 차의 적재 범위를 제한하는, 다시 말해 '경고'를 의미하는 이 깃발이 바람에 날려 두 연인을 차 안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들은 깃발에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죠. 그 깊은 의미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무슨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라스트신에서 하늘의 붉은빛 또한 역시 '거역할 수 없는 무엇'의 느낌이에요. 두 사람이 차를 몰고 떠나는데, 이건 '선택사항'이 아니거든요.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충동으로부터 태어났으나 끝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힘.

제게 있어 영화 만들기도 이런 '레드'의 느낌 아닐까 합니다. 어떤 힘든 상황에 처해있든 간에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들면 견딜 수가 없거든요. 결코 거스를 수 없는 힘처럼. 이런 욕망을 구체화 한 영화가 <레드>이기도 하고요.

 

홍상현

이후에도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 또래들과 좀 다르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동경하던 인물이 프랑수아 트뤼포와 데이비드 린. 고등학교 시절에는 연극을 접하셨고요. 그저 인기 있는 스타가 아니라 작품의 캐릭터에 정말 맞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깊이 교감하며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향도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거 아닐까 싶은데요.

미시마 유키코

배우가 스타인지 아닌지는 제게 있어 우선적인 고려사항이 아닙니다. 제가 배우에게 요구하는 건 아주 심플해요.

먼저, 작품을 저와 함께 고민하면서 만들어가는 겁니다. 특히, 메인 출연자라면 제작진과 작품 전반에 대해 논의하면서 같은 방향을 향해 끝까지 함께 해 주실 분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 간의 절대적인 믿음이 요구되죠. 따로 약속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설령 서로 접근방법이 다르거나 의견이 갈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소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연기하는 인물이 되기 위한 철저한 준비입니다. 작품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캐릭터의 삶을 경험하는 건데요. 기술을 터득하거나, 그가 살아온 인생을 디테일하게 상상하거나, 상대역을 맡은 연기자와의 인간관계도 중요합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를 더해본다면, 바로 '보이스'입니다. 음성을 통해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가 제가 구상하는 배역과 맞아떨어지는 분들은 대개 주어진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연기해내더라고요. 목소리를 가리켜 '몸이라는 악기가 연주하는 음색'이라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음성이 비슷한 배우의 캐스팅은 최대한 피하고 있습니다. 밸런스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저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관에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접한 데이비드 린, 트뤼포, 존 카사베츠, 나루세 미키오,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가짜'로 보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이때 보았던 트뤼포의 <이웃집 여인>이나 <쥴 앤 짐>, 데이비드 린의 <라이언의 딸>, 존 카사베츠의 <얼굴들>, 나루세 미키오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미조구치 겐지의 <오하루의 일생>,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 등의 인물묘사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최근에는 이창동, 스티븐 달드리. 임권택(특히 <서편제>)의 작품과 전도연, 송강호, 에단 호크 등의 연기를 연구하고 있고요.

 

미시마 감독은 국내검색엔진의 해외저자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해피 해피 브레드」(사진)의 동명원작소설(저자는 본인)이 17만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여서다. (C)KIDARIENT
미시마 감독은 국내검색엔진의 해외저자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해피 해피 브레드」(사진)의 동명원작소설(저자는 본인)이 17만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여서다. (C)KIDARIENT

홍상현

대학시절에는 아르바이트에 전념하셨다는데, 목적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자주 영화 제작비를 모으기 위해서. (웃음) 게다가 고교시절에는 성적표 통신란에 "수업시간에도 시나리오를 쓴다"는 말이 적혀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영화에 그렇게까지 열정을 쏟으신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미시마 유키코

사전취재를 정말 철저히 하셨네요! (웃음)

고교시절 수업 중에 쓴 시나리오 중에는 단편은 물론 중편, 장편까지도 있었습니다. 완성할 때마다 바로 촬영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다니던 학교는 아르바이트가 교칙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학시절처럼 제작비를 벌 수 없었어요. (웃음)

게다가 당시에는 8밀리 필름에 드는 현상비도 비쌌습니다. 1시간 남짓한 분량이면 대략 50만 엔 정도가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수능을 열심히 보고 어서 대학에 들어가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영화를 찍은 이유가 뭐였냐고요? 물론입니다.

여섯 살 때 저를 구해준 게 영화였기 때문이죠. 당시 저는 모르는 남성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제 삶을 일변시켜버린 사건이었지요.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나는 더럽혀졌다', '나는 살 가치가 없는 존재다'라고 생각해버린 거예요. 오랫동안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집에서 우연히 <분홍신>의 팸플릿을 발견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죠. 그걸 떠올리면서 '나도 <분홍신>의 주인공처럼 언제든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도리어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고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결국 자유의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이 날부터 미니시어터, 명화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고요. (웃음) 그 무렵 보았던 영화들이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세상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시절의 경험을 통해 저처럼 상처받고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줄만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하기에 이른 겁니다.

 

홍상현

필모그래피 가운데 처음 한국에 소개된 <해피 해피 브래드>는 2012년 6월 13개 스크린에서 개봉했는데, 같은 해 11월 그의 동명 타이틀 저서가 17만 부나 팔렸습니다. 한국에서 이 정도 판매고를 올린 작가는 움베르토 에코(『푸코의 진자』), 그리고 한국의 문호 최인훈(『광장』) 정도인데요. 문인으로서의 재능을 반증하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미시마 유키코

감사합니다. 훌륭한 작가 분들과 함께 언급해 주시니 그저 황송하고 기쁠 따름이에요. 원래 미시마 유키코라는 제 이름도 아버지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좋아해서 이렇게 지은 거거든요. 그 점을 늘 무거운 짐으로 느끼고 있지만. (웃음)

<해피 해피 브레드>는 한 장씩 넘어가는 그림책 속의 세계를 여행하는 느낌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3인칭 관찰사 시점을 취했습니다. 라스트신에서 드러나지만 앞으로 태어날 생명인 정령이 화자이죠. 주제는 '나눔(share)'인데 구성의 면에서는 '순환'의 느낌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서, 여러 사람이 등장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결과로써 생명이 이 장소를 선택해 태어날 준비에 들어간다는 구조로 전개되죠.

같은 맥락에서 소설 『해피 해피 브레드』도 폴리포닉(polyphonic), 다시 말해 '동시에 여러 개의 음이 나오는 악기와 같은' 서사구조를 보여줬으면 했습니다. 따라서 챕터별로 관점이 바뀌며 서사의 방식 또한 에세이, 인터뷰, 일기, 편지, 그리고 주인공이 아끼는 그림책 등 다양한 형태를 띠도록 했고요. 각각의 인물이 갖는 사람됨이 나름의 컬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친애하는 우리 아이」는 일면 개인의 일상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회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는 미시마 유키코 감독의 영화적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C)Challan Film Company
「친애하는 우리 아이」는 일면 개인의 일상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회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는 미시마 유키코 감독의 영화적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C)Challan Film Company

홍상현

대학 졸업 후 취업한 직장이 영화 현장이 아닌 NHK였습니다. 이후 10년간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일하셨는데요.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서 극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드라마투르기의 토대가 이 시기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미시마 유키코

그렇습니다.

말씀처럼 다큐멘터리의 경험은 제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정말 소중한 드라마의 요소는 우리의 일상 속에 숨어있으니까요.

제 첫 다큐멘터리 데뷔작은 '늙는다는 것'이 주제였습니다.

온화한 표정으로 꽃에 물을 주던 사랑스러운 고령의 여성이 허공을 응시하다가 "꽃은 언제나 답을 줍니다. 물을 주면 자라나 꽃을 피우거든요. 사람은 그렇지 않죠"라고 독백을 합니다. 이 순간 일어나는 표정의 변화에서 그녀의 삶에 쌓여온 것들이 보이고요. 다시, 여성이 진자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방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죽은 남편의 안경을 씁니다. 도수도 맞지 않고 너무 크죠. 하지만 이거야말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0세인 다른 여성도 등장하는데요. 이 분은 10대 여자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다 갑자기 나들이옷을 차려입고, 꽃을 사 편지로만 연락해왔던 10대 소년의 졸업식장으로 향합니다.

다음으로 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가족 안에 '전쟁'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누가 살아남을 것인지를 두고 다투는 거죠. 살인이라든가 학대가 자행되는 건 아니고, 자매끼리 승패를 겨루는 이야기였는데요. 부모의 사랑이나 선생님으로부터의 평가, 웃는 얼굴이지만 서로의 존엄성이 각자에 의해 미세하게 손상되어 가는 모습을 다뤘습니다. 문제는 그럼 어떻기 이 갈등의 결말을 보여주느냐는 것이었는데 저는'교회'라는 공간을 끼워 넣었어요. 어느 날 동생이 교회에 가고, 언니도 발을 들이게 되는데요. 당시까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터놓은 적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침묵 속에서 기도를 하다 공감을 경험하게 되죠.

마지막으로 프로듀서 시절을 이야기하다 보면 떠올리게 되는 다큐멘터리가 한신ㆍ아와지대지진 당시 촬영한 작품입니다. 공원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분들의 이야기인데요. 식량을 확보하고, 구역을 나눠 텐트까지 치고 나면 리더를 정하죠. 그 과정에서 서로 간에 의견이 갈리기도 하고. 이 모든 상황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봤습니다. 음식이나 공간은 물론 슬픈 마음, 작은 기쁨까지도 공유하는. 이 공유야 말로 인간을 진정 인간답게 한다는 게 결론이었죠. 이 테마는 나중에 <해피 해피 브레드>로 고스란히 가져와 사용했습니다. '빵'이라는 시각적 대상을 통해 나눔의 의미를 보다 인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말이 나왔으니 이야기인데 한신ㆍ아와지대지진은 제게도 크게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지진이 일어날 당시 목욕 중이던 저는 너무 놀라 옷도 입지 못한 채 부엌으로 도망을 쳤죠. 순간, 흠뻑 젖은 저를 온몸으로 감싸 지켜주신 게 어머니셨어요. 진동이 멈추고 나자 어머니는 가구란 가구는 거의 다 쓰러져 산산조각이 나 있던 그 아수라장을 가로질러 경대 앞으로 다가가더니 립스틱 하나를 꺼내 입술에 바른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리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신의 힘과 앞으로의 각오를 드러낸 거죠.

저는 어떤 작품이든, 저는 타자나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이미지를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다큐멘터리는 이런 제가 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홍상현

이 시기를 특별하게 언급한 이유는 감독의 작품에서 제인 오스틴과 연관성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인 오스틴은 당대에 유행하던 문학 장르의 일반적인 기법을 다양하게 실험하면서도 사실주의에 입각해 정교한 작품세계를 창조했거든요.

미시마 유키코

윌리엄 서머셋 모옴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대해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으나,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이야기는 예컨대 시골의 어느 작은 마을처럼 작은 무대 안에서 펼쳐지는, 그리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가 많죠.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오만과 편견』도 그랬고요.

지난해 <반경 5미터>라는 NHK드라마의 기획ㆍ연출을 맡았는데요. 나 자신의 반경 5미터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돌아볼 수 있다면, 사회도, 사람도 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발상에서 출발한 작품이었습니다.

신작 옴니버스 프로젝트에서 연출을 맡은 단편 <기쁨의 노래>는 코로나 19로 생활에 불안을 느낀 노년의 여성이 한 청년과 보험사기를 공모하는 내용입니다. 이 두 작품은 궁극적으로는 같은 맥락에 있죠.

코로나 19가 한참 맹위를 떨치던 시절 바다에 간 적이 있었어요. 많은 노인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었지요. 그리고 식당에 들렀는데 대략 70대쯤으로 보이는 세 명의 여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라고요. "'백세시대'라고들 하는데 그럼 우리는 삼십 년을 더 살아야 하잖아 어떻게 하지?"라고. 일본의 경제상황을 생각할 때 연금시스템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불안해하고 있었죠.

그리고 인도에 거주하는 한 자원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곳에는 거리에서 죽을 뻔했던 분들을 모아 끝까지 맡아 간호하는 분들이 계신다더군요. 아이처럼 안아주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삶을 마친다는 거예요. 순간 "혈육은 아니더라도 마지막 순간을 맞아 누군가에게 '내가 분명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받기만 하더라도 평온한 최후를 맞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기쁨의 노래>의 시나리오를 쓴 거고요.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제 작품에서도 극단적인 사건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소수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 많고요. 다만, 제인 오스틴의 경우, 통찰력이 월등한데요. 해서, 조금이나마 그의 작풍에 다가가고 싶은 생각에 자극적인 전개는 없이도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어요.

 

미시마 유키코 감독은 대학을 졸업한 뒤 NHK에 입사, 휴먼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명성을 쌓았다. 이 시기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서 극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드라마투르기의 토대가 형성되었다. (C)FILT
미시마 유키코 감독은 대학을 졸업한 뒤 NHK에 입사, 휴먼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명성을 쌓았다. 이 시기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서 극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드라마투르기의 토대가 형성되었다. (C)FILT

홍상현

다음 키워드는 '몬트리올'인데요.

지리적으로는 북미에 위치해 있지만 유럽보다 더 유럽적인 이 도시가 가진 다양성의 상징이기도 한 몬트리올국제영화제는 2014년 <해피 해피 와이너리>를 초청하면서 미시마 유키코라는 작가를 아시아 이외 지역에 처음 소개했고, 2019년에는 의붓가정의 결합을 그린 <친애하는 우리 아이>에 심사위원 대상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친애하는 우리 아이>는 일면 개인의 일상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회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는 감독의 영화적 개성을 드러내 준 작품 아니었나 싶은데요.

미시마 유키코

제가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출신이라는 점도 이유가 되겠지만, 제게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할 것이냐"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친애하는 우리 아이>의 소재를 선택할 당시 이혼해서 각자 아이가 있는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다시 아이를 갖게 되면서 일어나는 갈등을 그린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다만,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죠.

<친애하는 우리 아이>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저 자신 부친이 돌아가시고 오사카의 본가도 없어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핏줄' 그리고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딸이라는 제 정체성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혈연이라는 관계? 혹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름? 제가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부친의 영향일까요? 생물학적인 연관성이 가족을 구성하는 전부일까요? 이 지점에서 제기된 또 다른 물음이 한 사람의 삶의 과정을 지켜본 경험이나, 숨기고, 속이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쌓여온 앙금이 있는 관계 역시 가족을 구성하는 요소 아닐까? 가족이란 결국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는 의미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족의 구성원들을 맺어주는 '관계'의 정의에 있어 혈연 이외의 요소를 생각해봐야 할 현실에 직면해 있다는 거였죠.

이혼율의 증가는 물론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부모 자식 관계가 늘어났습니다. 이는 문제를 사회 전체적 차원에서 바라볼 때의 결론과도 연관되는데요. 예컨대 일본이라는 나라에도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고, 그 종류가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거든요. 혈통에 집착하는 사고는 결국 고립을 부를 뿐입니다.

일본에도 한국처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혈연관계가 그 어떤 타인과의 관계보다 깊고, 유대 또한 강하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지요. 애초에 가족이라는 단어 자체도 그렇죠. 한 '집'에서 '피'로써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니까요. 하지만 이혼율도, 재혼율도 과거와는 비교조차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 집착하는 정서는 그 범주 밖에 있는 사람에게 소외감을 넘어 공포감마저 심어줄 수 있습니다. 이제 혈연관계를 넘어 각 개인의 의지에 따른 결합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 시대가 온 거죠.

셋째는 '나 자신'과 '타자'의 관계 맺기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는 건데요. 이러한 의도는 친애하는 이방인(Dear Etranger)이라는 의미를 가진 <친애하는 우리 아이>의 영문 제목에서 강하게 드러납니다.

혈연과 무관하게 인간은 누구나 서로에게 "타자"이며 "이방인"이죠. 그런 까닭에 나와 타자 사이의 화학반응이야말로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렇게 서로에게 이질적이던 사람들이 '친애하는' 관계로 변화하는 순간 또한 존귀한 거 아닐까요. 이런 메시지를 세계인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홍상현

2019년 겨울, 감독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조금 다른 신작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긴 했지만 막상 완성된 <레드>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등장인물들 간의 혼외관계라는 설정만 유지할 뿐 전반적으로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인데요.

미시마 유키코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나 토드 헤인즈의 <캐롤>처럼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던 사람이, 설령 그것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르면 옳지 못한 선택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 하는 모습을 선명성 있게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강렬하게 '삶의 태도'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소설과 다른 라스트신을 설정한 것도 그래서죠.

극 중에서 토코(카호 분)의 어머니가 "어느 정도 반했니?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야?"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제가 어떤 선배 여성에게 실제로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강렬히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한 순간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물론 토코의 선택에 대해 잘잘못을 묻는다면 '옳지 않았다'고 답할 분들이 더 많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꼭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인생은 계속되겠죠.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인생'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레드>의 제작 준비를 시작하던 기억이 새롭네요.

 

“카호라는 배우의 눈은 아주 독특합니다. 구슬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인형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감정을 불어넣으면 힘이 들어가면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분위기를 내죠.” 미시마 유키코 감독의 말이다.  (C)2020 Red Film Partners
"카호라는 배우의 눈은 아주 독특합니다. 구슬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인형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감정을 불어넣으면 힘이 들어가면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분위기를 내죠." 미시마 유키코 감독의 말이다. (C)NK CONTENTS

홍상현

슬슬 오늘 인터뷰에서 왜 제인 오스틴이 몇 번이나 등장했는지, 그 이유를 털어놓을 순간이 왔네요.

그는 1802년 한 부유한 남성의 청혼을 받아들였다가 다음날 갑자기 파혼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12년 뒤 자신의 조카에게 '애정 없는 결혼을 선택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죠. 저는 처음 이 일화를 접했을 때 그저 사랑이 아니라 여성의 주체성, 바로 '욕망'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레드>의 주제와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미시마 유키코

우리 주변들 둘러보면, 역시 사회나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자신의 척도를 일치시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죠. 또, 여기서 벗어나는 순간 공포를 느끼기 쉽고요.

이런 세태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통해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선택했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었어요.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원래 이 작품의 원작에는 성묘사가 무척 많이 나오죠. 하지만 저는 그것이 그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행위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섹스의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인생의 선택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요.

 

홍상현

<레드>에서 관객들을 서사에 몰입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제프 버클리의 노래 "할렐루야"인데요. 미시마 감독과 가까운 세대로 불꽃같은 삶을 산 그의 노래가 마치 레드의 OST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미시마 유키코

곡이 수록돼 있는 '그레이스'(Grace)라는 타이틀의 앨범을 발견한 건 대학교 때였습니다. 독립영화를 만들다 선배의 방에서 들었죠. 이후, 그 목소리와 기타 연주의 잔향을 느끼기 위해 종종 혼자 무릎을 껴안고 듣고는 했어요.

얼마 후 제프 버클리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할렐루야"는 정령처럼 덧없이 제 곁에 남아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해왔습니다. <레드>에 이 곡이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토코의 운명의 상대를 제게 있어 이 노래가 갖는 위상과도 같이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숭고하면서도 외로우며, 확신에 차 있는 한편,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그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같은 맥락에서 이 곡을 토코와 구라타(츠마부키 사토시 분)를 이어주는 매개체로도 활용했고요.

 

츠마부키 사토시 배우는 연기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체적인 방향까지 미시마 유키코 감독과 함께 고민해준 「레드」 제작현장의 가장 든든한 ‘전우’였다. (C)2020 Red Film Partners
츠마부키 사토시 배우는 연기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체적인 방향까지 미시마 유키코 감독과 함께 고민해준 「레드」 제작현장의 가장 든든한 '전우'였다. (C)NK CONTENTS

홍상현

주연을 맡은 카호 배우야말로 최대의 수혜자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관객 중에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미래를 걷는 소녀> 같은 작품에서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인지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카호 배우의 하이틴 스타의 이미지만 기억하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이미지가 완벽하게 성인 연기자로 바뀌는데 큰 기여한 <레드>의 토코 역으로 카호 배우를 출연시키시면서 어떤 부분에 연출의 포인트를 맞추셨는지 궁금합니다.

미시마 유키코

토코라는 인물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변 사람들, 보다 넓게는 사회와의 갈등을 피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반면, 살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이 무뎌져 버린 인물이죠.

그러다가 구라타를 만나면서 자신에게도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부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는 연기의 포인트로 제가 염두에 둔 게 '눈'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에 욕망이 깃듦으로써 다시 세상 모든 것이 들어오게 된다는 설정이었죠.

카호라는 배우의 눈은 아주 독특합니다. 구슬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인형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감정을 불어넣으면 힘이 들어가면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분위기를 내죠. 또, 연출할 수 있는 표정도 워낙 자유재자라 <레드>라는 작품이 마치 그의 눈을 위한 영화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렇다 보니 시선을 중심으로 한 섬세한 연기를 끌어내는 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지요.

다음으로 중요했던 게 구라타와의 첫 러브신인데, 토코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방시켜, 마침내 만족감을 느끼면서 천사 같은 미소를 짓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했습니다. 촬영장에도 긴장이 흐르고 카호 배우도 온몸의 감각을 긴장시키면서 연기에 임해주었던 기억이 새로운데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 폭발한 끝에 몸과 마음을 열어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다시 온몸의 모든 세포가 녹아들어 또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이 흐름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습니다. 촬영·조명 스태프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는데 고맙게도 최대한 집중해서 각각의 테이크를 진행해주셨지요.

나중에 카호 배우가 술회하기를 "너무나 몰입해 있었던 까닭에 그 순간의 기억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말 그대로 '토코의 시간'을 살아주었던 거죠.

그 밖에도 카호는 리액션이 대단히 좋은 배우입니다. 이는 훌륭한 배우가 되는 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조건이기도 한데요. <레드>에서 공연한 츠마부키 사토시, 에모토 타스쿠, 마미야 쇼타로 배우 등과 함께 등장하는 신에서 각기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거든요. 카호 배우의 리액션이 저마다 컬러가 무척 다른 상대배우의 연기와 어우러지면서 나타난 결과죠. 그렇게 카호 배우는 자신의 참모습을 억누르고 있던 여성이 깨어나 격랑 속에서 스스로의 인생을 향해 나아가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인형'으로 살아가던 토코가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훌륭하게 연기해냈습니다.

 

미시마 유키코 감독의 영화중에는 극단적인 사건이 잘 일어나지 않으며, 제한된 공간에서 소수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 많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오래 기억된다. (C)FILT
미시마 유키코 감독의 영화중에는 극단적인 사건이 잘 일어나지 않으며, 제한된 공간에서 소수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 많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오래 기억된다. (C)FILT

홍상현

'만년 청춘스타'의 이미지이나 실은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진 연기자로 유명한 츠마부키 사토시를 적절하게 활용한 것도 <레드>가 거둔 커다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미시마 유키코

츠마부키는 눈처럼 순수하고 자기 관리가 엄격하며, 관찰력이 뛰어난 배우입니다. 고독한 천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요. 특히, 작품에서 주어진 배역의 캐릭터를 차곡차곡 분석해 본질을 찾아내는 능력은 탁월하죠. 연기 자체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레드>의 구라타는 삶에서 주어진 시간의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죠. 아울러,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에 대한 욕망이 아주 강한 사람일 수밖에 없고요.

원작에서 구라타는 IT업계에서 일하는 걸로 되어있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건축가로 변경했어요. '집'에 대해 생각하는 직접을 갖도록 한 건 삶의 의미를 돌아보고, "누구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서였죠. 구라타의 이런 특성과 관련한 시퀀스도 만들었는데요. 예컨대 극 중에서 토코와 구라타는 함께 살 집의 모형을 만듭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행위로써의 의미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현실적인 가능성보다 욕망과 애정을 표현하는 기재로서 사용된 건데요. 츠마부키 배우는 이런 모든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주었습니다.

츠마부키 배우는 촉촉한 눈매를 가졌습니다. 언제나 세계를 사려 깊게 바라보면서도 표현자로서의 갈망이 담겨있죠. 츠마부키 배우는 이런 자신의 특성을 살려가며 훌륭한 시선 연기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체중을 감량해서 오감을 최대한 긴장시킨 상태를 유지해주었어요.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체적인 방향까지 저와 더불어 고민해주었던 걸 돌이켜 보면 츠마부키 배우는 <레드> 제작현장에서 제 가장 든든한 '동지'였습니다.

 

홍상현

여성의 욕망과 결국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내용의 서사를 하나의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츠마부키 배우는 이 건축물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울러 그는 감독과 깊이 소통하는 배우로도 유명한데요. <레드>의 제작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촬영을 진행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미시마 유키코

첫 미팅에서 츠마부키 배우는 구라타의 인생을 연표로 만들어 와서는 "폭설 같은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검은색 터틀넥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구라타가 마치 세상에 태어나 수십 년 살아온 실존인물처럼 완벽하게 만들어지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죠. 더 놀라운 건 터틀넥 셔츠가 제가 머릿속에 그린 구라타를 상징하는 아이템이었다는 거예요.

<레드>의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여기 또 한 가지 변화가 추가되었는데,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일 틈새와 나약함이 생겨났음을 표현하기 위해 블랙 톤을 즐겨 입는 것으로 설정돼있던 구라타의 스타일을 살짝 바꿔본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브라운색 스웨터를 준비했죠.

어떤 장면을 구성하면서 고민에 빠질 때마다 츠마부키 배우 쪽을 바라보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이내 "해 보죠"라며 카메라 앞으로 가서 제 의도를 저보다 더 잘 파악한 연기를 보여주고는 했답니다.

영화를 연출할 때 저는 종종 '여백'을 활용합니다. <레드>를 보신 관객 분들께서 많이들 기억해주시는 장면 중에, 토코와 구라타의 눈밭 재회신이 있는데요. 미처 상상조차 못 했던 순간 구라타와 재회한 토코가 그의 뺨에 손을 대 존재를 확인하지요. 그런데 같은 쇼트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찍어보는데도 좀처럼 느낌이 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촬영을 중지하고 츠마부키 배우와 둘이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라타의 영혼이 서 있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츠마부키 배우가 그 장소에 육신은 존재하지 않는 느낌을 표현해주었고, 그 연기에 카호 배우가 리액션을 하면서 신이 완성되었어요.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러브신을 촬영했을 때의 일인데요. 저는 츠마부키 배우에게 이 장면은 "세포 수준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 자체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츠마부키 배우가 "잠시 이 장소에 저와 카호 씨 둘만 있도록 해 달라"더니 카호 배우와 호흡을 맞춰 시퀀스를 완벽하게 구성해주었어요.

<레드>의 구라타가 세간에서 상상하듯 그저 '결혼한 여성을 유혹하는 매력적인 남성'에 머물렀다면 관객 여러분께 그렇게까지 큰 임팩트를 주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감성의 부분은 물론 지성, 의지와 사고의 측면에서 토코를 바라보며 억압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자극을 제공해줌으로써, 다시금 본연의 모습으로 살게 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천사이자 수호신이라고 할까. 츠마부키 씨와 그런 인물을 만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레드」에서 토코와 무라타는 함께 살 집의 모형을 만든다. 이들의 꿈은 결국 실현되지 않지만 그 자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행위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각인시킨다. (C)2020 Red Film Partners
「레드」에서 토코와 무라타는 함께 살 집의 모형을 만든다. 이들의 꿈은 결국 실현되지 않지만 그 자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행위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각인시킨다. (C)NK CONTENTS

홍상현

일본영화의 제작 스태프 중에는 아트디렉터라는 포지션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하지만 감독의 작품을 보면 '굳이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웃음) 직접 그 역할을 병행하면서 뛰어난 조형미를 선보이시기 때문인데요. <레드>의 경우, 어떤 비주얼 콘셉트를 설정해서 시각화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미시마 유키코

물론 작품을 만들면서 언급하신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일단 말씀하신 아트디렉터의 역할을 분담하고 있는 제 영화의 미술부ㆍ촬영부의 존재 또한 무척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작 실무적인 부분을 해결하는 건 그들이니까요.

저 자신, 이론적으로 해박하진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미술작품을 즐겨봤던 까닭에 나름 취향이 명확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회화나 사진을 모티브로써 영화 만들기에 활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예컨대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을 만들 당시에는 빌헬름 함머쇠의 회화 "피아노를 치는 아내이다가 있는 실내"의 이미지를 주연을 맡았던 나카타니 미키 배우에게 건넸어요. 키 비주얼로 삼고 싶었거든요. 최근작인 <기쁨의 노래>에서는 앤드류 와이어스를 이미지의 기점으로 삼았고요.

다만, <레드>를 만들 때는 일부러 회화적인 표현을 피해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설명적인 커트를 생략한 게 많아요. 두 사람이 듣는 소리라든가 보고 있는 세상의 모습 등을 제시하다 보면 한 여성의 삶을 생생히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확신이 들어서였죠. 그렇다 보니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핸디 캠으로 찍은 장면도 많습니다. 제 필모그래피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레드>는 어린아이에 해당한다고 할까요? 이전엔 상황설명을 자제하고 감정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장면이 많지 않았으니까요.

한편, <레드>는 타이틀에서 드러나듯 '색깔의 영화'이기도 한 까닭에 의상의 변화로 토코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거나, 같은 빨강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톤을 정해놓고 스토리의 전개에 따라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홍상현

<레드>는 사람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오픈 엔딩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도 소위 '혼외관계'를 다룬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시마 유키코

<레드>를 만들면서 모티브로 삼은 또 하나의 작품이 입센의 『인형의 집』입니다. '2020년 판 『인형의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지요.

극 중에서 토코에게 주어진 상황이 시대착오적이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일본사회의 경우 여성들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해 온 현실적인 모순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쓴 토코의 대사 중에 "전부 나였다(내 선택이다)"라는 게 있는데요. 모든 게 내 인생에서 선택한 결과이니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고, 여기에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영화 <오만과 편견>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죠. 따라서 궤도수정을 할 권리 또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거라 생각하고요.

결말부에 대해 좀 더 말씀을 드려보자면, 인내심을 발휘해 가정을 유지할 수도 있었고, 아이를 포기하는 게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든 여성에게 완전한 모성을 요구할 수 없을뿐더러, '어머니'라는 이유로 무조건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리는 모습도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지 않나 싶더라고요. 이런 내용을 아라카와 유미 프로듀서와 논의한 결과 2020년의 세계에 내놓을 영화라는 현재성을 생각해서 다소 보수적인 면이 있는 일본에서의 반발이 예상되었음에도 애초에 생각했던 라스트신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미시마 유키코 감독은 신작 단편 「임페리얼의 카와카미 지로」의 홍보스케줄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는 있지만 최근의 작품들 같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난, 복수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랄하고 명랑한 터치의 이야기란다. (C)FILT
미시마 유키코 감독은 신작 단편 「임페리얼의 카와카미 지로」의 홍보스케줄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는 있지만 최근의 작품들 같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난, 복수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랄하고 명랑한 터치의 이야기란다. (C)FILT

"코로나 19 때문에 일상의 속도가 늦춰지면서 많은 것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극단적인 선택도 그런데요. 여기서 드는 의문은, 현상의 원인이 과연 '바이러스'뿐일까 하는 거예요. 제가 떠올리는 건 우리 사회의 낮은 젠더감수성과 폐쇄성입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사고도 도덕적 당위를 넘어 상호감시를 위한 논리로 작동하고 있고요. 이런 분위기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존엄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 거 아닐까 해요.

물론'지금 발 딛고 서있는 작은 공간 안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라'면서 틀에 박힌 충고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래, 결국 '네가 참으라'는 건데, 그렇게 끝낼 일이야?'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제 개인의 삶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재고해봐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뭐든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할 게 아니라요.

그런 맥락에서 제가 <레드>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역경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진정 원하는 삶을 택하는 모습이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언제나 제 두발을 딛고 서서, 세계를 응시하며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영화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가지신 한국 관객 여러분의 사랑 속에서 더욱 성장해가고 싶습니다. 하루빨리 얼굴을 마주하면서 인사드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We'll meet again."

<레드>의 프랑스 개봉 외에도 폐점을 계기로 고향 오사카에 있었던 레스토랑 임페리얼의 추억을 돌아보는 사소설풍의 단편 <임페리얼의 카와카미 지로>를 제작, 한국 관객들에게 <64>(파트 1ㆍ2), <터미널> 등으로 알려진 사토 코이치와 빡빡한 홍보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미시마 감독.

실로 '메가(mega) 인터뷰'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긴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차기작 계획을 물었더니 역시나 '세상 부지런'한 이 크리에이터, "짬짬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귀띔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는 있지만 최근의 작품들 같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난, 복수(plural)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랄하고 명랑한 터치의 이야기란다.

그리고 필자는 다시 설래 한다. 예상보다 일찍 국제영화제나 개봉관에서 '2.0 버전'의 미시마 유키코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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