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24프레임의 움직임과 육체의 활력, 감정의 정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24프레임의 움직임과 육체의 활력, 감정의 정전
  • 배명현
  • 승인 2022.02.1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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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야기가 머무르는 곳"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들은 무자비하게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1장에서 총이 등장 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 반드시 그 총은 발포되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과감하게 없애버려야 한다." -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영화가 시작되고 카메라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을 담는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내 폐로 먼지가 들어오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카메라는 앞으로 걸어가다 능선 하나를 지나더니, 공중으로 몸을 띄우고 공간 전체를 담는다. 이어 버드아이 뷰(bird's eye view)로 이 현장을 담으면서 부서지는 동시에 재건설되는 맨해튼의 전경을 관객에게 전시한다. 이 폐허의 재개발은 거대한 권력과 자본 아래 시행되며, 그 목적은 슬럼화된 이 구역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데 있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카메라가 다시 땅에 착지를 했을 때 처음 마주치는 인물은 '샤크파'의 단원들이다. 이들의 춤과 노래는 이 땅, 멘하튼을 노래하며 자신들이 위치한 여기를 노래한다. 흥겨운 노래와 춤을 담는 카메라는 유려하게 움직이고, 그들의 동작과 동선은 스크린 너머에 앉아있는 관객에게 까지 활기를 전달한다. 하지만 곧 그들은 '제트파'를 만나게 되며 곧바로 갈등이 전개된다. 이들은 '이 땅의 진정한 소유주는 누구인가'를 노래하고 분위기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한다. 이 변화는 춤으로, 이유와 갈등의 디테일한 정보는 노래의 가사로 전달된다. 안무는 폭력으로 변하고 이들은 무술 액션과 춤 그 어느 사이를 오가는 몸짓을 보여준다.

이 움직임들을 보며 '스티븐 스필버그'의 최근 필모그래피를 생각해 보았다. 스필버그가 <더 포스트>(2017), <레디플레이어 원>(2018) 이후, 그가 연출한 작품은 뮤지컬 원작 영화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이다. 그는 <더 포스트>에서는 과거를 무대로 2017년도의 미국을 다시 '폭로' 했고,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는 미래를 무대로 오늘의 문화와 그 유산을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초점을 여전히 '오늘'에 맞추고 있었다. 그는 61년 원작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리메이크하면서 '오늘날의 미국의 갈등'을 춤을 추며 노래했다. 1946년생의 그가(75세) 여전히 천착하고 있는 것은 오늘의 문제였고 그에게 세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렇다면 다시 영화로 돌아가기 전에 물어야 할 질문이 생겨난다. 그가 인식한 문제들 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보여주고자 했던 문제는 무엇인가. 영화 전체를 채우고 있는 서사는 제트파와 샤크파의 구역 다툼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비극적 사랑이다. 하지만 이 서사가 영화의 중심을 겨냥하고 있지는 않다. 아니, 전체를 포괄하기보다는 그 중심 바깥에 있는 외부를 배제한 채 달리고 있다. 서사가 겨냥하고 있지 않은 그 이외의 이야기, 스크린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

이는 본래, 서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 시간적, 재현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때문에 체호프가 "총은 발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총은 등장해선 안 된다"라는 말과 히치콕이 말한 "드라마는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인생이다"라는 문장은 같은 맥락으로 해석 가능하다. 이 한계는 서사 작품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역설적으로 그 이야기 바깥을 건드리는 형태로도 발전했다.(그렇지 않은 작품도 물론 다수이다) 그리고 역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이러한 '서사의 바깥으로 이야기하기'로 진의를 전달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원작 뮤지컬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주어진 '운명'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스필버그의 영화는 비극은 유지되나 그 비극을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뉴욕을 왔다 갔다 움직이며 샤크파와 제트파의 구역과 다툼을 보여주지만, 이 안에서 진짜 이들의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싸움을 끝냈을 때 남는 것은 공사를 마친 뉴욕시의 땅이다. 그리고 그 땅은 '결국 링컨 센터'가 세워진다. 두 파는 이주해온 땅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다.

이곳 뉴욕은 그들에게 무신경하며, 문제로 치부해버릴 뿐이다. 그들은 정식 시민이라기보다 그 중심에 서있는―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진짜 뉴욕시민'의 잉여물이다.

결국, 샤크파와 제트파 이 두 파간의 갈등의 진범은 미국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모순적 구조와 이민자와 시민, 잉여와 정제되고 쓸모 있는 것을 구획하는 것과 인식의 차이, 이 밖에 있는 모종의 것들이 영화의 겉을 둘러싸고 있다. 경찰은 늘 싸움이 일어난 후에 도착하며 정작 필요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무능을 반복한다. 그들은 오직 말로 정론―처럼 보이는―말만을 할 뿐 행동하진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도 모든 사건이 끝난 뒤 흔적을 찾아 뒤쫓는 경찰은 필요가 없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래서일까. 정작 사랑의 주인공인 '토니'(안셀 엘코트)와 '마리아'(레이첼 제글러) 두 사람 사이의 애정적 긴장관계가 희미하다. 플롯에 기대어 설명하지면,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인물이 이렇게 행동했다'가 아니라 '이 인물들은 이렇게 되어야만 해'처럼 캐릭터가 작동한다. 살아서 움직이는 대신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사 자체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 내용의 전반을 채우고 있는 인물의 동기와 감정이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토니와 마리아는 첫눈에 반하는(이성이 망가질 정도로 강렬하게 끌리는) 설정이니 그렇구나 넘겨도 그 이외의 인물들을 추동하게끔 하는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스크린에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육체에는 활기가 가득하지만 인간이 아닌 캐릭터로 느껴진다. 박자에 맞춰 군무를 추는 인물 모두에게 서사를 부여할 순 없는 일이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심인물들에게 조차 감정을 느끼기 힘들다면, 그건 관객에게 두 시간 삼십육 분이라는 시간 동안 물음표를 띄우게 한다.

감정이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전달되는 부분은 오로지 "나는 너희들이 크는 과정을 봐왔다. 너희는 결국 강간범이 되었구나"라며 일갈하는 발렌티나의 분노와 소리 지르는 아니타의 고통 그런 아니타를 구해내기 위해 화면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그라지엘라가 등장하는 씬뿐이다. 이 씬에서 제트파는 완벽하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만큼 감정은 힘이 강하며, 그 감정을 일으키기 이전에 존재하는 '행위들'에는 관객의 정당성 내지는 가치판단이 들어간다. 그 이후 힘을 잃어버린 제트파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비극적인 결말(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말 오마주)에서 우리는 핑 도는 눈물 보단, 그저 어떤 사건을 제 3자의 시선을 바라보는 목격자처럼 우두커니 앉아 인물들의 그다음 움직임을 기다리게 된다. 이때 발사되는 권총은 영화 전반에 걸쳐 이리저리로 그 주인을 바꾸었던 권총이다. 그 권총이 주인을 바꿀 때마다 총알이 향하는 인물이 바뀌었고 결국 발사된 총알은 토니를 향했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러나 방금 서술했듯, 관객은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이 씬에서 느껴지는 건 비의가 아닌, 거리감이다. 이를 부감으로 담은 탓이 큰 걸까. 하지만 이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미국에선 스티븐 스필버그의 최고작이 또 한 번 갱신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만큼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인터네셔널한 감각이 아닌 네이션의 틀 안으로 이동한다면, 이 영화는 오로지 미국의 이야기로만 읽힐 뿐이다.

내게 훌륭한 이야기라는 건 "현실의 구체성으로부터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들어 올린 후 그 내부를 개성적이고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담고 있는 표현으로 감싼 것"이다. 이 기준은 절대적이진 않지만, 분명 보편적이다. 현실의 구체성이 미국이라는 현실, 그 내부를 인종과 이주민의 이야기로 채운 후, 보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기대어 관객의 감정을 길어 올렸다면 더욱 효과적인 현실참여 영화가 되진 않았을까.

한국에도 강남 개발과 88년도 올림픽이 있었고, 보여주기식의 길과 건물을 짓기 이전에 잉여들, 조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근래에는 청계천 복구가 한 예다. 이 잉여들을 내보내기 위한 거대한 손들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존재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역동성과 육체의 활기가 가득한데 비해 빈약한 감정의 영역에 의거해 네이션에 국한되어버린 점이 나는 못내 아쉽다. 우리 세계에 필요한 영화는 국소마취가 아닌 전면적 수술을 준비하기 위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출연
안셀 엘고트
Ansel Elgort
레이첼 지글러Rachel Zegler
아리아나 데보스Ariana DeBose
데이비드 알바즈David Alvarez
마이크 파이스트Mike Faist
코리 스톨Corey Stoll
브라이언 다아시 제임스Brian d'Arcy James
매디 지글러Maddie Ziegler

 

제작 20세기폭스
수입|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5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1.12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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