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가 있는 트로카데로 광장을 기준으로 버스나 전철을 타면 대략 한 시간 정도가 걸리지만, 자동차로는 고작 삼십 분 이내에 도착하는 다소 애매한 거리에 그곳이 있었다.
랑비네 미술관. 오스트리아 공주 출신 왕비로 방약무인한 성품을 주체하지 못해 업보를 치른 악녀라는, 혹은, 무심한 남편과 귀족들의 시기심 속에 한 순간도 행복하지 못했던 정략결혼의 희생자라는, 상반된 두 인생 스토리의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지 근처, 굳이 따지면 오르세나 루브르 정도의 명성까지 가지고 있진 않은, 어딘가 쓸쓸한 느낌의 장소.
그곳에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그네"(그림 보러가기)가 있었다.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아카데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역사화(Peinture d'histoire)를 포기하고 자유정신을 택한 작가의 대표작.
어느 귀족이 애인의 집에 걸어놓기 위해 주문했다는 이 그림에는 타이틀 대로 그네를 타는 여성과 연적으로 보이는 두 명의 사내(그네를 미는 사내와 그네 아래쪽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또 한 명의 사내)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화면이 짧은 설명에서 예상되는 분위기와 전혀 다르게 연출돼있다는 점. 프라고나르는 '깊은 숲'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여기 어울리지 않는 사건('그네타기')을 둘러싼 몽환적 세계를 그려낸다. 먼저, 음영을 비집고 떨어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네에 올라있는 여성의, 주변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 장난스런 표정을 부각시키고, 그 와중에 벗겨져 허공을 가르는 한쪽 신발로 자칫 무거워질 수 있었던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아울러 왼편에 '쉿'하며 침묵을 요구하는 자세로 서 있는 에티엔느 팔코네의 큐피드 상은 뭔가 흥미로운 뒷얘기가 숨어있을 것 같은 암시를 던져 매혹의 순간을 완성한다.
순간 좁혀지는 현실과 환상의 거리. 일상의 틈새로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 전형적이지 않은 요소들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매력과 한 편으로 고개를 쳐드는 다이내믹스. 생각했다. 이런 경계(in between)의 시선을 가진 영화가 보고 싶다고.
그리고 이런 몇 년 전 필자의 바람에 대한 해답을 지난해 여성감독 세타 나츠키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초청작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2020)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을 사는 고등학생 시부야 하루코(야마다 안나 분)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다 아무 이유 없이 학교를 그만둔 카나가와 켄이치(스즈키 진 분)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도입부의 캐릭터 설정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던 스토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완전히 독특해진다. 하루코가 느닷없이 켄이치와 자신의 관계를 "세기의 사랑"으로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팜므파탈 마유미(모리타 미사토 분)에게 사로잡혀있는 켄이치는 누구의 마음도 받아들일 수 없다. 앞서 소개한 "그네"의 미묘한 삼각구도다. 그리하여 <아사코>(2018)로 칸영화제의 관객을 매료시킨 사사키 야스유키의 카메라가 비밀스런 숲 속 같은 도심을 가르며 지오라마 보이와 파노라마 걸의 특별한 러브스토리를 따라간다.
홍상현
BIFAN에 초청된 <파크>(2017)가 한국개봉까지 하셨던 걸 돌이켜 보면, 4년 만의 신작으로 돌아오신 감회가 보다 특별하실 것 같은데요.
세타 나츠키
예전에 참석했을 때 너무나 따뜻하게 맞아주셨던 기억이 있어서, 새 작품으로 다시 불러주신 게 그저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상영관에서 관객 여러분을 직접 뵐 수 없었던 건 아쉽지만 부디 하나라도 좋아하는 장면ㆍ대사를 발견하셨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홍상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만드신 장편상업영화가 이미 한국에서 개봉했지만 여전히 감독에 대해 모르는 관객이 많습니다. 자기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세타 나츠키
자기소개라... 음... 어렵네요...(웃음) 처음 뵙겠습니다. 세타나츠키라고 해요.
토쿄예술대학 대학원 영상연구과에 다녔고, 교편을 잡고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ㆍ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수료 작품인 <저편에서 온 편지>를 연출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어 라이어 앤 어 브로큰 걸>(2010)로 장편상업영화 감독에 데뷔했고요.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은 세 번째에 작품이죠. 영화 말고도 드라마, CF,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으로 괜찮을까요...? (쑥스러운 웃음)
홍상현
다음은 "홍상현의 인터뷰"에서 모시는 분들께 늘 드리는 질문인데요.
좋아하는 한국영화 작품이나 감독, 혹은 배우가 있으신가요? 최근의 한국영화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세타 나츠키
와... 한국영화 중에는 정말 인터뷰 시간 내내 말씀드려도 끝나지 않을 만큼 좋아하는 작품이 많고요.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그리고 박찬욱 감독 작품은 개봉만 했다 하면 무조건 보러 갑니다. 연기자 중에서는 배두나 배우랑 송강호 배우를 좋아하는데요. 이 분들의 출연작 치고 보면서 실망한 영화가 없었죠. 가장 최근에 봤던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8)도 정말 훌륭했고요.
홍상현
여기서 잠시 필모그래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특히 판타지 장르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파크>나 <나중의 축제>(2009)도 장르상 판타지로 분류될 뿐만 아니라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에서도 판타지 장르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데요.
세타 나츠키
판타지를 정말 좋아해요.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틈새로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니까요. 저 자신 언제나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세계ㆍ일상을 바라봄으로써 늘 접하던 풍경의 이면을 찾아보려 노력하는데요. 이것이야말로 픽션ㆍ영화의 힘 아닐까 싶어요.
홍상현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이라는 타이틀을 처음 듣고 무척 독특한 네이밍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세타 나츠키
원작만화의 타이틀을 그대로 가져온 겁니다. 영화화 가정에서 다른 제목을 써 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디오라마(지오라마)와 파노라마라는 평소와 다른 위치에 시점이 놓임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또한 달라지는 '느낌의 대비'가 좋더라고요. 아울러 그 대칭점에 다시 '보이'와 '걸'이라는 단어가 연결된다는 점이 재미있었고요.
높은 곳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합니다. 고층건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리의 사물들이 꼭 미니어처 같잖아요. 이런 풍경이 가져다주는 신선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아울러, 작품의 무대이기도 한 스크랩과 빌드가 반복되는 도쿄의 모습이 영화의 주인공 하루코와 켄이치와도 맞아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파노라마와 디오라마처럼 먼 곳과 가까운 곳, 큰 것과 작은 것이 뒤섞이면서 원근의 감각이 마비된 가운데 폭주하는 두 사람의 청춘처럼.
홍상현
말씀처럼 원작이 따로 존재하지만,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시나리오를 직접 쓰셨잖아요.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을 전혀 새로운 '세타 나츠키 영화'로 재창조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에 가장 힘을 기울이셨나요.
세타 나츠키
일단 오카자키 작가가 원작을 그린 게 1989년의 일입니다. 당연히 작품의 시간적 배경도 여기 맞춰져 있었고요. 이걸 2019년의 도쿄로 옮겨 온 것이 영화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의 가장 큰 변곡점이었어요. 다음으로 원작의 주인공들이 주는 예측불허의 매력은 고스란히 살리되, 여기 오늘날의 가치관을 어떻게 녹여낼지가 제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지요.
홍상현
언급하신 것처럼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에는 이른바 '요즘 젊은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꼭 이를 리얼리즘의 방식에서가 아니라 상징적이고도 표현주의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작품의 매력을 더해주는 요소 아닐까 하는데요.
세타 나츠키
그렇습니다. 무작정 리얼함을 추구하기보다 어딘가 현실의 틈새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여기에 원작에서 만화적으로 존재하는 캐릭터를 현실 속의 캐스트가 실재적인 움직임과 표정을 통해 표현한다는 지점에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다른 균형감이 태어났습니다.
홍상현
이야기를 듣다 보니 BIFAN 관객을 위한 영상 메시지에서 "배우들의 표정연기를 주목해 달라고 말씀하셨던 게 떠오릅니다.
세타 나츠키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의 연출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몇 번에 걸쳐 리허설을 진행해 캐스트의 움직임이나 대사의 말투를 미리 결정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나타나는 배우의 모습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리얼리즘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가공되지 않은, 자유로운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한 거죠. 표정연기에서 이런 제 의도가 가장 정확하게 구현되었다고 생각해요.
홍상현
하루코로 분한 야마다 안나 배우는 감독의 페르소나로서 청춘영화의 천편일률적인 클리셰를 뛰어넘는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캐스팅의 계기가 궁금합니다.
세타 나츠키
하루코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무척 다양하면서도 그게 고스란히 매력으로 작용하는, 연기함에 있어 상당한 난이도가 있는 캐릭터입니다. 그렇다 보니 오디션으로 좀처럼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가 힘들었고요. 그 와중에 딱 하루,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만났을 때 각본을 대단히 섬세하게 분석해서 연기에 임해주었던 야마다 배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평소의 야마다 배우는 그가 연기하는 하루코와는 달리 아주 침착하면서도 철저한 사람입니다만, 촬영기간 내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때로는 동물적인 본능을 표출하는 하루코를 과감하게 연기해냈습니다.
홍상현
촬영을 하면서 야마다 배우에게 어떤 주문을 하셨나요.
세타 나츠키
기본적으로 야마다 배우는 제가 아무리 어려울 것 같은 부탁을 할지라도 '무리'라든가 '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한 적이 없어요. 무조건 '그래요. 해 보죠'라고 흔쾌히 답한 뒤, 몇 번이든 도전해 주는, 든든하면서도 연출자를 아주 좋게 해 주는 연기자였죠. 따라서 저로서도 하나의 답을 정해놓지 않고 야마다 배우의 다양한 모습을 일단 지켜본 연후에 그중에서 최선의 것을 같이 찾아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야마다 배우에게 시나리오의 캐릭터를 덧씌우는 과정을 통해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의 하루코가 태어난 거죠.
홍상현
넷플릭스의 높은 가입률 등으로 인해 한국 관객들에게도 압도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모리타 미사토 배우를 마유미 역에 캐스팅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아울러,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의 예에서처럼 단지 성적인 매력만을 어필하는 게 아니라 입체적인 팜므파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세타 나츠키
애초에 제가 모리타 배우에게 바란 것은 켄이치도 하루코도 가볍게 농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심지가 있는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한편 상당한 리스크를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모리타 배우가 이 어려운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셨어요.
제 아무리 미묘한 뉘앙스의 연기를 요구하더라도 딱 포인트를 잡아내서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표현해내는, 감이 좋고 유연하며, 자유로운 배우입니다.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캐릭터의 깊이를 만들어줬죠. 그렇게 켄이치로 분한 스즈키 진 배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보여준 겁니다. (웃음)
홍상현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을 통해 스즈키 진 배우의 매력에 눈을 뜨는 관객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켄이치라는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있어 최대의 관건은 하루코와 마유미라는 전혀 다른 캐릭터들 각각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결과가 아주 성공적이던데요.
세타 나츠키
스즈키 배우와도 여러 번의 리허설을 진행하긴 했는데, 일단 저 자신이 이런저런 세부적인 것들까지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작위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체의 켄이치를 보여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특히 호재로 작용한 건 스즈키 배우와 켄이치의 퍼스낼리티에 공통점이 있다는 거였지요.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이라는. (웃음) 특히 이 부분을 가장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야마다 배우나 모리타 배우와의 상호작용 또한 미리 어떤 그림을 그려놓기보다 현장에서 서로간의 어울림을 보고,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의논해가면서 연출했습니다.
"도쿄올림픽과 개막과 동시에 개봉하는 것을 목표로 2019년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부터 영화를 찍었습니다. 메인스타디움이 지어지고 있던 토요스와 마스크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종일 사람에 북적이는 시부야 거리를 활보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그 프레임 어딘가에 숨어있던 설렘과 흥분이 오늘의 현재와 겹쳐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치 평행우주처럼. 아무쪼록 그런 2019년의 도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 함께해주신다면 대단히 기쁘겠습니다."
앞으로 본격 판타지는 물론 SF나 로드무비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세타 감독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껏 키워왔으며, 앞으로 간절히 이루고 싶은 꿈 하나를 털어놓았다. 일찍이 좋아하는 영화ㆍ드라마에 비치는 거리의 멋진 풍경에 매료되었고, 감독으로서 제작시스템 면에서도 무척 선진화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보다 호감을 느끼게 된 한국에서의 활동기회를 얻는 것. 어쩌면 조만간, 고백의 말미에 "실현된다면 정말 최고일 거예요"라는 코멘트까지 덧붙이며 설래하던, 이 재능 있는 젊은 감독이 연출한 '한국영화'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