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작가로 태어나기 위한 무법 지대로의 여정
[Critique] 작가로 태어나기 위한 무법 지대로의 여정
  • 이지영
  • 승인 2022.02.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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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녹터널 애니멀스> "원작 『토니와 수잔』의 서사와 비교하여"
ⓒ 유니버설 픽쳐스

문명과 야만의 경계: 액자식 심리 서스펜스 서부극

오스틴 라이트의 1993년도 소설 『토니와 수잔』을 원작으로 하는 톰 포드 감독의 <녹터널 애니멀스>(2016)는 액자식 구성의 심리 스릴러이다. 수잔(에이미 아담스)의 전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가 19년 만에 자신이 쓴 소설을 보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수학 교수인 토니 헤이스팅스와 그의 아내 로라(아일라 피셔), 딸 헬렌(엘리 뱀버, 영화에서 이름은 '인디아')은 메인에 있는 별장으로 가기 위해서 어두운 텍사스의 고속도로를 밤새 달린다. 통신 신호도 안 잡힐 정도로 광활한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는 이 장소는 그야말로 무법 지대다. 이때 두 대의 차가 이들의 앞길을 방해하기 시작하고, 사소한 시비로 시작하였으나 마치 야생 동물들의 사냥을 떠오르게 하는 자동차 추격씬이 이어진다. 마치 짐승과도 같은 패거리들이 그의 아내와 딸을 납치해 가기까지 토니는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이들을 놓치고 만다.

D.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 이래로,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범죄들, 대결과 정의 구현, 국가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거나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며 끝나는 가장 원형적인 미 서부극은 점차 네오 웨스턴, 안티 웨스턴, 수정주의 웨스턴 등 다양한 장르로 변모하였다. 오늘날에도 서부극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로스트 인 더스트>(2016), <파워 오브 도그>(2021)와 같이, 현대적인 문제의식과 미학을 담기 위해 새롭게 변주되고 있다. 어둠이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지운 시각, 갑작스러운 비극을 맞은 평범한 중산층 가장인 토니 헤이스팅스가 서부를 배경으로 어떤 복수극을 펼쳐갈지, 그리하여 이 서부극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1차적으로 밝혀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유니버설 픽쳐스

<녹터널 애니멀스>는 서부극의 장르적 변용에 그치지 않는다. 에드워드가 왜 이 소설을 보냈는 지가 서스펜스의 두 번째 축이 된다. 그는 19년 전 헤어진 전 아내인 수잔을 독자로 상정하고 소설을 썼으며, 우리는 수잔의 머릿속에서 해석되고 연출된 소설 속 장면들을 영화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특수한 작가-독자 관계가 갖는 성격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각각 액자 안의 이야기와 바깥 이야기의 주인공인 토니와 수잔의 관계, 더 확장해서는 액자의 안과 밖의 이야기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화학 작용이 일어나는지도 추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법 지대의 정의 구현 문제

문명 세계가 성립하기 위한 여러 조건 중 하나는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한 약속, 즉 법치주의다. 야행성 동물들과 같은 세 명의 패거리(터크, 레이, 루)와 우연히 충돌했을 때, 그들의 논리는 문명 세계에서 통하는 관습이나 신뢰를 담보로 하지 않는다. 토니는 이 상황에서 총기 같은 무력(武力) 없이는 무력(無力)할 수밖에 없다. 먼저 도발한 것은 그들이었지만, 토니는 이들의 무적의 논리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표면적으로 뺑소니로 도망간 것은 토니였기 때문에 그들은 '적법한 이유로' 그의 차를 세웠으며, 고장 난 타이어를 교체해 주는 친절까지 베푼다. 그다음엔 자신들이 토니를 믿을 수 없다며, 가족들과 차를 바꿔 타자는 반강제적인 요구를 한다. 그러나 이 문명인 흉내, 또는 연극은 한순간에 무자비한 약탈로 갈음한다.

명확한 이유 없는 폭력적인 유희, 섹슈얼한 욕망, 그 무엇이 되었든 밤의 충동적인 에너지는 누군가의 커다란 희생과 피해로 귀결된다. 토니는 그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라는 폭탄을 안고서, 문명의 세계로 복귀한다. 그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억울함을 당한 채 가만히 있자니 자기 비하에 빠질 수밖에 없고, 가해자를 찾아 적법하게 처단하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며 트라우마를 상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토니 헤이스팅스는 피해를 당했을 때, 바로 복수심에 불타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아주 현실적이고도 무기력하게 소시민적인 일상으로 돌아간다.

 

ⓒ 유니버설 픽쳐스

상실의 충격 속에서 토니 헤이스팅스는 조심하지 않으면 폭발해버릴 폭탄을 눈 뒤에 품은 채 문명인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정교한 의식과도 같은 행동들을 통해 신관을 제거해야 한다. 지신이 누구인지 기억해야 한다. 토니 헤이스팅스, 교수,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이고,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인 그. 그는 어둠 속에서 길을 걸으며 자신의 이름을 계속 읊었다. (오스틴 라이트, 『토니와 수잔』, 오픈하우스, 2016, p.136)

시간이 흘러, 끔찍한 기억은 희석되고 잊혀진다. 언제까지나 미망인으로, 피해자들을 애도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토니는 외부에 슬픔을 전시하여 이면의 무관심을 덮은 채 살아간다. 이러한 진실을 누군가 알아챌까 두려워하는 마음까지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토니는 두려워졌다. 그 허위의 심연 때문에 두려워진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걸 알아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은 절대 알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는 저물어가는 오후, 집에서 자신의 영혼을 찾아봤지만 고도로 계산된 슬픔의 전시 밑에는 하얀 무관심만 보였다. 그리고 그 무관심이 지겨운 짜증과 격노로 변한 걸 봤다. (p.231)

이렇게 사건 이후에 일상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었던 토니는 자신보다도 범인 잡기에 더 몰두하는 바비 안데스(마이클 섀넌)라는 보안관에게 소환된다. 그보다 집요하게 범인을 찾고 있는 바비는 자신의 관할 구역 안에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그를 목격자로 세워보지만, 수사가 진척되지 않자 결국 사적인 복수를 하도록 종용한다. 토니와 마찬가지로 무능력하고 허술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니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을 파국으로 끌고 간다. 이로 보았을 때 말기암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바비는 토니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마지막 무모하고 충동적인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보안관에게는 공권력과 무력, 그리고 시한부 인생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어서 그것을 앞세워 토니는 자신의 사적 복수의 조연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이토록 협조적인 보안관이 도망가는 범인 중 한 명을 총으로 쏜 순간에 토니는 그에게 거세게 반발한다. 이때 토니의 주저하거나 분노하는 이유는 첫 째로, 그가 아직까지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법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원작 소설 속에서 그는 자신이 수학 교수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는데, 이는 현실에서 영문학 교수인 수잔의 직업을 다시 한번 환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살인자들이 무장해제인 상태에서 문명인인 자신이 '불법적'으로 사적 복수를 한다는 것에 분개함을 느낀다. 그리고 내심 바비가 일을 처리해주길 기대한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소설 속에서는 바비 안데스가 그의 불법 행위들을 정당 방위라든가, 조악하게 꾸며낸 알리바이로 정당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 또한 토니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성과 본능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 유니버설 픽쳐스

두 번째로, 토니가 주저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이들이 법의 집행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복수를 당한다면 과연 자신들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가? 야만적인 살인자들은 죽는 순간 찰나의 공포 말고는 자신의 죽음이 토니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토니만 살인자가 되어 남은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애초에 그들의 살해 동기도 토니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레이 마커스(아론 테일러 존슨)는 자신이 원래 강간을 할 의도가 없었으며, 토니의 딸과 아내가 자신을 강간범이라고 부르며 도발했기 때문에 그대로 응징해줬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로라와 헬렌이 이들을 도발하지 않았다면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가족의 끔찍한 죽음이 가지는 의미는 한없이 가벼운 것이 되어 버린다. 이 고통은 왜 겪어야 했으며, 복수는 반드시 행해졌어야 했나?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렇게라도 복수를 하기 싫은 토니의 자기 변명일 수도 있다. 그 무슨 가정도 개연성이 있으며, 가능하다.

 

폭력과 예술, 그리고 매혹

법과 정의의 영역에서 폭력과 야생은 다스리고 단죄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이 작품에서 폭력과 예술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폭력은 서부의 광야처럼 특수한 곳 뿐 아니라 문명이 지배하는 일상에도 만연해 있다. 그것은 특히 언어로 행해진다. 예컨대 영화에서 허튼(아미 해머)이 바람을 피고 있다는 정황은 엘리베이터 벨보이가 불륜녀에게 하는 대사("31층 입니다, 부인.")를 통해 수잔에게 전달되는데, 그 단 한 문장이 수잔에게 절망과 고통을 주는 반면, 허튼은 아내가 눈치 챈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다. 반대로 수잔은 에드워드가 과거에 작가로서 자질이 없다고 판단해서 다른 직업을 가지라고 했던 장면을 회상한다. 이 한 마디가 그에게는 19년 동안이나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이렇게 현실에서 벌어진 상처들은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영화로 각색되었을 때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으로 나타난다. 절대로 믿지 못할 인물들에게 가장 소중한 이들은 유린당하고, 살해되고, 유기된다.

단, 폭력의 당사자가 그것을 예술로 승화했을 때, 이것은 아주 매혹적인 이야기가 된다. 에드워드의 기이한 에너지로 가득한 소설은 결혼 생활의 권태에 빠진 수잔을 은밀하게 도발하고, 다시 에드워드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특히 소설 전반부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빨간 소파 위에 마네킹처럼 서로 엉겨서 숨져 있는 로라와 헬렌(인디아)은, 척박한 서부의 배경 한 가운데서 유독 강렬하고 매혹적인 아우라를 가진다. 이들은 영화 도입부에서 나온 나체의 치어리더들과 붉은 배경의 대비를 환기한다. 전시장에서 쾌활하게 미국의 국기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는 고도 비만의 나이 든 모델들은 사실 실제가 아닌 영상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들이다. 이 강렬한 이미지들이 벽을 에워싸고 있고, 실제 모델들은 관람객들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하는 채로 전시대 위에 엎드려 죽은 듯이 누워있다. 이 이미지는 수잔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현주소이다.

 

ⓒ 유니버설 픽쳐스

수잔이 성공가도를 달리며 부유하게 살고 있지만, 그녀가 전시한 예술은 쓰레기(junk)라고 치부된다. 이러한 예술은 실재와 이미지가 괴리되고 뒤틀린 내면을 반영한다. 에드워드의 소설은 참혹하지만 오히려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느낌마저 자아낸다. 그리고 수잔으로 하여금 일상을 탈피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자극한다. 달리 보면 이것은 수잔이 홀로 소외 되어 있는 관능의 세계라고도 할 수도 있다. 그녀의 남편과 딸은 모두 빨간색 소파나 침대에서 자신의 연인들과 은밀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기 위한 여정을 담은 칠흑 같은 로드 무비

톰 포드는 수잔의 직업을 LA의 부유한 아트 디렉터이자 미술관 관장으로 직업 설정을 바꾸었고, 수잔의 캐릭터와 현재 심리 상태를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적으로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미술품과 행위 예술, 공간 등을 활용했다. 이러한 전략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미학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누구도 쉽게 도입부의 이미지를 잊지 못할 것이다) 반면 원작 『토니와 수잔』에서는 수잔은 영문학 교수로, 독자이기 이전에 그 스스로도 작가를 지망했던 인물로 묘사된다. 오스틴 라이트는 이를 통해 작가론에 대한 그 자신의 질문을 던진다. 작가란 과연 누구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작가가 되는가? 이들은 자신, 또는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진실로 써야 하는가?

오스틴 라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수잔이 글쓰기를 거부했던 것은, 우선 독자의 존재 때문이다. 독자층을 의식하면서 쓰기 때문에 진실이 오염되며, 나중에 가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 마저도 잊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어들을 쳐내고, 과장하고, 왜곡시키고, 마치 페인트로 칠하는 것처럼 결핍된 부분을 감춰서 명확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이런 글을 쓰면 자신의 글이 명료하거나 깊이가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되고 그녀는 그 환상을 진실보다 선호하면서 곧 그게 진실이 아니란 점을 잊어버린다. (p.290)

수잔은 내심 언젠가 에드워드만큼 글 쓰는 훈련을 한다면, 그보다 나은 글을 언제든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 작가가 될 수 있다는 태도는 결코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이어지지 못한다고 라이트는 지적한다("작가가 되기를 거부하는 마음과 자신이 항상 작가였다는 마음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p.289) 사실 그녀가 쓰지 않는 이유는, 글을 쓰는 자아와, 그 자아를 인식하고 진실을 검열하고 조작하며 진실된 글쓰기를 방해하는 두 자아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의식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다.

 

ⓒ 유니버설 픽쳐스

반면 작가가 된 에드워드는 19년 전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닌, 토니라는 인물과 사건을 빌려서 자신의 이야기를 재창조하기 시작한다. 특히 토니의 나약하고 비겁하며, 자기 변명으로 가득한 뒤틀린 성격을 노골적일 정도로 서슴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아내와 딸의 장례를 치른 후 일상으로 복귀하고 혼자 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새로운 여자들을 만나려고 한다거나, 대학원생 제자와 데이트를 하러 갈 때의 자기 합리화를 보면서 수잔은 이 부분이 불필요하거나, 적절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지만 에드워드는 독자는 아랑곳 안 하는 듯이 토니라는 인물을 밀고 나아간다. 그는 바비 안데스가 개인적인 복수를 종용할 때도 끝내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비겁한 태도를 보인다. 결정적으로 복수 대상을 앞에 놓고도 총을 쏘지 못하는 자신을 경멸하고 창피해하는 토니는 아주 평범하고, 소심하며 비겁한 중산층의 초상이다.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제이크 질렌할이 에드워드와 토니의 1인 2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톰 포드 감독의 선택이자, 영화적인 선택이다. 이를 통해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만을 접한 이들은 '에드워드=토니'라는 공식을 즉각적으로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수잔의 상상이라는 것을 상기할 때, 소설을 읽는 초반에는 그녀가 나약하고 무능력했던 19년 전의 에드워드와 소설 속 토니를 여전히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원작 소설의 제목이 '에드워드와 수잔'이 아닌 '토니와 수잔'이 원작의 제목인 것처럼, 수잔은 챕터가 진행됨에 따라 토니라는 인물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을 이입해 간다. 액자 속 이야기의 토니(제이크 질렌할)와 액자 바깥의 수잔(에이미 아담스)의 모습이 비슷한 상황에 있는 숏들의 교차 편집은 수잔의 심리 변화와 이행을 압축적으로 표현해냈다고 할 수 있다.

수잔의 인식 속 에드워드, 그리고 에드워드의 인식 속 수잔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한마디로 '나약함'이다. 19년 전, 2년 간의 결혼 시절에 토니는 작가로서 길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고, 수잔은 초반에 그의 속물적인 부모를 설득하면서 그의 나약하지 않고, 단지 섬세한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에드워드가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가 현실적으로 직업을 찾기 원하고, 로맨틱하고 섬세한 성격이 나약하고 강단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채 소위 '잘생기고 저돌적인' 현 남편 허튼에게 끌리게 된다. 이렇듯 타고난 속물성을 벗지 못하고, 에드워드의 믿음과 사랑을 배신하며, 충동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매혹 되었던 수잔의 '나약했던' 과거는, 또한 극 속 에드워드의 소설인 '녹터널 애니멀스'의 내용 안에 투영되어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속성은 수잔의 이기적이고 비겁한 속성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 유니버설 픽쳐스

복수에 눈이 멀어버린 자, 혹은 작가의 죽음

끝으로 이 글의 서론에서 <녹터널 애니멀스> 영화에 액자식 구성의 심리 서스펜스 서부극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서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복수극은 과거 수잔에게 작가나 남편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채 배신 당한 에드워드의 치밀하고 교묘한 복수 서사이다. 복수할 자들 앞에서 총을 가지고도 여러 발을 실패해 버린 것은 그동안 여러 번 좋은 작품을 쓰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할 것이다. 속물적이고 비열한 자들에게, 작품은 언제 쓸 것이냐("그 바보같은 총은 언제 쏠 거야?")는 조롱을 들으며, 그는 작가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데 고군분투하였고 결국 작가로서의 자신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스스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토니, 작가로서 자아의 눈은 멀어버리고 그로 인해 원치 않게 자멸하게 된다. 여기서 또 한번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토니는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음에도 경찰들에게 발견되지 못했고, 세상은 '합당한 이유로' 그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지었던 것이다.

토니 헤이스팅스의 복수가 진정한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 맺음 짓지 못한 것처럼, 에드워드의 복수심이 불러 일으킨 창작욕은 작가로서 눈을 뜨게 하는 동시에 멀게 했던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복수 서사를 끝내 완성함과 동시에 그는 스스로의 작가로서의 죽음을 예견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에드워드가 수잔에게 이 원고를 주면서 무엇이 빠져 있는지 찾아달라고 했던 것은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배신과 상처의 힘으로 버텨온 작가로서의 생명력은 이제 그 수명을 다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을 수 있다.

 

ⓒ 유니버설 픽쳐스

한편 현재의 삶이 고독하고 권태로운 수잔에게 에드워드가 쓴 생생하고 날 것의 표현들은 잃어버린 감정들을 증폭하여 터뜨리는 뇌관이 된다. 과거 에드워드와 수잔의 대화 중, 에드워드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는 "모든 것이 살아있게 하려고, 결국 죽게 될 것들을 보호하려고"라며 설명한다. 그리고 19년이 지나서야 그는 수잔에게 소설을 읽게 하면서 자신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작품으로 그는 오랫동안 사망 판정을 받았던 과거의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는 데 성공했고, 수잔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도록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화의 엔딩에서 수잔은 검은 옷을 벗고 초록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마치 새로운 관계를 다시 시작해보려고 에드워드를 기다린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쓴 소설의 진짜 의도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수잔을 멀리서 어떤 제 3자의 시선이 냉정하게 바라보며, 시간이 지날수록, 수잔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진다. 이로써 에드워드의 복수는 대단원을 마친 것인가? 마치 토니 헤이스팅스가 자신의 가족들의 죽음, 그리고 복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끝내 답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에드워드의 복수도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유니버설 픽쳐스

녹터널 애니멀스
Nocturnal Animals
감독
톰 포드
Tom Ford

 

출연
에이미 아담스
Amy Adams
제이크 질렌할Jake Gyllenhaal
마이클 섀넌Michael Shannon
애런 존슨Aaron Johnson
아일라 피셔Isla Fisher
엘리 뱀버Ellie Bamber
아미 해머Armie Hammer
칼 글루스맨Karl Glusman

 

수입|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제작연도 2016
상영시간 116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1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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