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정말 먼 곳'은 가까이 있다
[신년기획] '정말 먼 곳'은 가까이 있다
  • 김민세
  • 승인 2022.01.24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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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예술영화 비평 특집 ②

신년기획 <코아르CoAR> '한국 독립·예술영화 비평 특집' 두 번째는 박근영 감독의 <정말 먼 곳>이다. 김민세 기자는 작품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서려는 발걸음을 잠시 우회하고는 멀리 떨어져 작품의 틀과 형태에 집중한다. 여기서 틀은 '봄내필름'의 제작 방식이고, 형태는 '박근영 감독의 시적 연출'이다. 그의 글은 영화의 내·외부를 분주히 움직이며 주목해야 할 한국 독립영화로서 <정말 먼 곳>이라는 작품을, 더 나아가 국내 독립영화계 속 '봄내필름'이라는 한 자장을 써 내려가고자 한다. 만약 당신이 이 글을 다 읽을 때쯤에는 '장우진', '김대환', '봄내필름', '박근영' 그리고 한국독립영화. 이 흐름에 기대어 그들의 영화를 찾아보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글은 작품론보다는, 한국 독립영화계에 누가 있는지 소개하고 싶은 한 관객의 진심 어린 애정이 담긴 편지이다. [편집자 주]

한국 독립영화에는 어떠한 흐름이 존재할까. 또는 그러한 흐름을 만들고 이어나가는 작가들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 앞에서 필자는 고민 없이 '봄내필름'이 그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강원도 춘천의 한마을에서 함께 자란 고향 친구인 장우진 감독과 김대환 감독은 <춘천, 춘천>(2016)을 시작으로 각자의 작품에 프로듀서를 맡으며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둘이 공동 대표가 되어 '봄내필름'이라는 제작사를 만들었다. 그들은 <춘천, 춘천>, <초행>(2017), <겨울밤에>(2018)라는 세 편의 작품을 통해 공간이라는 형식 위에 어떻게 비논리적 세계를 만들 수 있는지, 상황과 배우에 의존한 카메라는 어떻게 영화가 될 수 있는지, 현실이라는 이미지 위에 어떤 세계들의 층위를 쌓아 올릴 수 있는지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정말 먼 곳>(2020)은 봄내필름이 제작한 네 번째 영화이다. <한강에게>(2018)를 만든 박근영 감독이 연출을, 장우진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았다. 처음으로 장우진, 김대환 감독이 아닌 다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인 만큼, 이 영화의 결은 지금까지 봐왔던 봄내필름의 작품들과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배우들의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대사들로 채워져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기이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봄내필름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정말 먼 곳>은 퀴어라는 사회적 소재와 자연의 풍광을 한 아름 담고 있는 유려한 촬영으로 만들어진 잘 짜인 극영화의 성격이 더 강하다.

 

ⓒ 그린나래미디어

그럼에도 <정말 먼 곳>이 '봄내필름의 작품으로서 이어나가고 있는 것'은 공간과 지역에 대한 탐구이다. <춘천, 춘천>은 춘천이라는 한 공간에 두 가지 시간을 겹쳐놓았고, <초행>은 삼척이라는 공간에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렸으며, <겨울밤에>는 청평사라는 공간에 입체성을 부여해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을 열었다. 나아가 <정말 먼 곳>은 화천이라는 공간을 통해 인물들을 감싸안는 풍광의 이미지와 고유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박근영 감독의 시적 영화

국문과 출신인 박근영 감독의 영화는 그와 걸맞게 '시적'이다. 전작인 <한강에게>의 주인공 진아는 첫 시집을 준비하는 시인이고, <정말 먼 곳>에서 주인공 길우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현민 또한 시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시를 읽는 장면이 존재하고, 영화 속 인물의 내레이션을 통해 청각적 리듬과 시각적 이미지를 병치시켜 시적 감흥을 일으킨다. 이 둘에 차이가 있다면 <한강에게>는 사고로 연인 길우를 잃은 진아가 시를 써내기 위한 과정과도 같은 영화이고, <정말 먼 곳>은 동명의 원작인 박은지 시인의 시를 극적 사건으로 그려내는 우화 같은 영화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작품들을 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라는 형식 안에서 행간을 드러내고 행간을 통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강에게>에는 진아가 잠을 자거나 잠에 들거나 잠에서 깨는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미세하게 진동하는 등과 허공을 응시한 채 숨 쉬는 얼굴, 새치 때문에 염색이 되어있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다. 우리는 '진아의 잠'이라는 행간을 통해 길우와의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진아라는 시'를 읽어낼 수 있다.

 

ⓒ 그린나래미디어
ⓒ 그린나래미디어

<정말 먼 곳>은 화천이라는 공간의 풍광으로 서사의 행간을 채운다. 노란빛의 은행나무, 해가 지기 전의 호수, 가을의 정취를 담고 있는 언덕과 산,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공간을 유영하는 양들, 그리고 어두운 밤의 숲과 안개. 이러한 지극히도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주요 서사를 감싸는 행간으로 작용하여 길우가 서울에서 도피해 도착한 안식처를 의미하는 '정말 먼 곳'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리고 때때로 카메라는 서사의 주인공인 인물들이 프레임 안에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풍광으로 고개를 돌리며 인물이라는 구체가 쌓아가는 현실의 재현을 넘어서 추상적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은유의 방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정말 먼 곳과 가까운 곳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박은지, <정말 먼 곳>,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은지 시인은 '정말 먼 곳'과 '가까운 곳'이라는 시어를 사용하면서 가야 하지만 갈 수 없는 이상의 공간과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이 시의 '정말 먼 곳'을 안식처로 읽어낸 박근영 감독은 강원도 화천이라는 현실의 공간을 길우의 안식처로 만들어낸다. 여기서 <정말 먼 곳>이 시도하고 있는 건 그 공간에 '정말 먼 곳'과 '가까운 곳'을 겹쳐놓는 것이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화천의 풍광을 익스트림 롱 숏으로 담으며 길우가 사는 공간을 아름다운 곳-정말 먼 곳으로 만든다.(<겨울밤에>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공간의 다양한 색채를 한 이미지에 담아내는 양정훈 촬영감독의 촬영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거리를 두며 자연을 바라봤던 카메라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면 무엇이 보일까. 그 공간을 정말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디에 카메라를 두어야 할까.

박근영 감독은 그 공간을 유령처럼 유영하고 있는 양들에게 시선을 둔다. 영화가 시작하고 우리가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는 살아있는 양의 털이다. 양이라는 개별 개체의 맥락을 주어주지 않고 뜬금없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양털의 이미지는 그 존재의 순수한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 사유 속에서 가까운 곳의 의미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의미의 실마리는 극 중 현민과 중만의 대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길우와 함께 살기 위해 화천으로 내려온 현민이 중만 식구와 밥을 먹는 자리에서 오는 길에 봤던 양이 순하다고 말하자, 중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이기적인 것이 사람과 똑같다고 말한다. 둘 사이에 이런 말이 오가는 이유는 현민은 양을 멀리서 보았고 중만은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정말 먼 곳의 역설. 그들이 안식처라고 생각하는 먼 곳은 그들이 도착하는 동시에 가까운 곳이 된다. 차별의 시선을 피해 사람이 없는 화천으로 도피했지만 결국 그곳은 안식처가 아닌 현실이다. 박근영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먼 곳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새하얗고 순한 양'이고 가까운 곳은 '아무렇게나 엉키고 헝클어진 양털의 실체'인 셈이다.

 

죽음으로 열고 삶으로 닫는다

<정말 먼 곳>은 중만의 어머니 명순이 죽는 시점부터 화천을 정말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길우와 현민의 동성연애 사실이 마을에 퍼지게 되고, 현민은 시를 가르치던 성당에서 쫓겨난다. 원만하게 지내던 마을 사람들에게도 눈치를 받게 된 길우는 이 모든 것이 현민 때문이라며 그에게 화를 낸다. 하룻밤 사이에 현민은 사라지고 길우가 쌍둥이 동생 은영에게서 맡아 키우던 설까지 실종된다. 인물들을 한 아름 껴안던 화천의 자연은 누군가에게는 떠나야 하는 곳이 되고, 누군가를 집어삼키는 곳이 된다.

영화의 처음을 여는 일련의 컷들이 결국에는 양의 죽음에 도달하는 것을 상기했을 때, <정말 먼 곳>은 죽음으로 시작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인 죽음은 양의 새끼가 태어나는 마지막 장면과 조응한다. 5년 동안 딸처럼 맡아 키우던 설을 은영에게 보내야 하고, 연인인 현민도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 처한 길우가 마주하는 생명의 탄생. 이 장면은 무언가를 지켜보는 길우의 얼굴에서 그의 시선이 향하는 새끼 양의 육체로 연결되는 숏과 역 숏의 관계로 연출된다. 영화의 첫 이미지가 맥락 없이 주어지는 양털의 이미지, 즉 양의 실체였다면 마지막 장면의 연결은 누군가의 시선이 더해져 길우라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의미로 다가온다. 결국 그가 가까운 곳에서 직시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움의 범위를 넘어선 생명과 희망의 힘 그 자체이다.

 

영화 <정말 먼 곳> 촬영 현장 ⓒ 그린나래미디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봄내필름의 새로운 대답

끝으로 박근영 감독은 새끼 양이 태어나는 이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현장의 스태프들을 교대시키며 24시간 동안 대기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된 촬영일까지 양은 출생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스태프들만 남아 마지막 장면을 촬영했다는 것이 이 영화의 뒷 이야기이다. 이 지점이 <정말 먼 곳>이 봄내필름의 영화로서 이어나가고 있는 리얼리즘 미학의 방법론이다. 그 어떤 인위도 가해지지 않은, 기다려야만 얻을 수 있는, 마주할 수 있는 순간. 이 순간이 드러내는 진실은 삶이라는 에너지를 가장 온전히 담아낸다.

<정말 먼 곳>이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에 다가가는 반짝임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유는 고향 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봄내필름의 영화 찍기 방법론 때문이다. 잘 알고 있는 곳에서 발견하는 낯선 순간. 그것만으로 우리는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봄내필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정말 먼 곳

A Distant Place
감독
박근영

 

출연
강길우
홍경
이상희
기주봉
기도영
최금순
김시하
최원용

 

제작 봄내필름, 영화사 행방, 찰나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15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03.18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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