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모드' 영혼을 구원하는 건 고귀한 일이니까요
'세인트 모드' 영혼을 구원하는 건 고귀한 일이니까요
  • 배명현
  • 승인 2022.01.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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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Saint) 그리고 '모드'(Maud)

기억에 남는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잡음을 남긴다. 이 잡음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꽤 긴 시간 동안 남아 생각을 가로막고 집중을 방해한다. 잡음은 고요를 끊임없이 방해한다. 이 방해는 성가시지만, 그 덕분에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으로 생각을 옮기게 만들기도 한다. 이 생각의 방향이 어디로 갈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니니까. 이것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 중요한 것은 이 영화는 잡음을 만든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세인트 모드>(2019)는 공포영화이다.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이 영화의 공포는 어디서 출발하는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응당 대답할 수 있다. 트라우마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플래시백으로 시작해 '모드'(모피드 클릭)의 과거를 보여준다.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도 그녀의 앞에 누워있는 시체는 그녀와 어떤 연관성을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지만, 그다음 이어지는 쇼트(천장에 거꾸로 비치는 곤충과 가로막힌 벽)로 우리는 인지할 수 있다. 이 인물의 위태로운 상태와 심적 고통을.

 

ⓒ A24

과거 간호사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모드는 호스피스를 직업으로 살아간다. 그녀가 돌보는 '아만다'(제니퍼 엘)는 무용수의 삶을 살았지만, 현재는 암에 걸려 그리 오랜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모드는 아만다를 정성으로 돌보지만 동시에 그녀의 생활을 혐오한다. 이 양가적인 상황에서 모드는 아만다에게 종교적 희망을 주입하려 한다. 기도를 올리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어느 마법과 같은 순간에 두 사람은 성(聖)적인 일(정황)을 경험하는 동시에, 성(性)적인 일(카메라의 시선과 연기의 결합)을 경험한다. 여기서 '이 경험'은 비(非)등가교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드는 아만다에게 경험을 선사하면서 심적 만족을 얻는다. 이후 그녀는 블레이크의 화집을 선물 받는데, 이 책의 면지에는 '모드에게, 나의 구세주, 사랑을 담아, 아만다가'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이는 일견 등가교환으로 보이지만, 영화를 끝까지 본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만다는 처음부터 신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모드가 아만다에게 '경험을 공유했다'는 사실이 배반당한 것은 과거지만, 깨달음은 나중이다. 결과적으로 '그 경험'은 일방적으로 모드가 아만다에게 '종교적 경험'과 '육체적 접촉'을 넘겨준 것인 동시에, 모드 본인이 경험한 종교적 신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교환이 완벽하게 실패한 것은 아니다. 모드가 아만다에게 종교적, 육체적 무언가를 넘겨주었다면, 아만다는 모드에게 블레이크의 화집을 줌으로써 죽음을 선물했다. 따러서 이렇게까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서로 죽음을 교환하는 이상한 거래를 했다'고. 물론 <세인트 모드>의 중심은 '트라우마'에서 시작해 믿음의 광기와 안으로만 파고드는 성찰 없는 (비)구원을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 전체(서사와 작동방식)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두 사람의 거래'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 거래'는 그 애착과 집착을 보여준다.

 

ⓒ A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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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의 중반부로 돌아가보자. 아만다를 찾아오는 사람과 차단을 하려 하면서 진심으로 아만다에게 종교적 치유와 희망을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선이 전달하듯, 이 강제는 그리 효엄이 있지 않다.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아만다에게 종교란 자신의 남은 시간동안 집중해야 할 욕망을 막는 어떤 장막에 불과하다. 그녀는 예술가이다. 자신의 욕망을 어떤 결과물(그것이 아름답든 아니든)로 승화시키는 것이 그녀의 정체성이다. 이 작업은 외부의 그 무엇이 아닌 내부의 목소리에서 시작한다. 아만다는 모드와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모드가 아무리 '영혼을 구원하는 건 고귀한 일이니까요'와 같은 말을 해도 무의미해지고 만다. 균형이 아닌 한쪽의 무게로 쏠림으로써 발생하는 감정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 

모드는 자신에게조차 실패하고, 외부의 인물에게도 실패한다. 실패를 반복하고 반복한다. 이 어긋남의 연속은 하나의 인물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결코 그녀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행위를 하지만, 그 행위를 이끄는 건 '그녀의 과거'이다. 이것이 어떤 면책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을 수도 있지만, <세인트 모드>는 이 해석을 가로막기 위해서 관객과 거리를 벌린다.

끝에 이르러 모드가 해변에서 분신을 하기 직전, 사람들은 감정이 없는 것처럼 가만히 서서 그녀를 지켜본다. 마치 마네킹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를 클로즈업했던 그 이전 신에서 들린 다급한 목소리와 전혀 다르게 그녀가 분신하는 순간 등 뒤로 날개가 보이고 성스러운 감흥을 느끼듯 평온한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사람들은 동시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잠깐의 블랙아웃 이후, 다시 잡힌 모드의 클로즈업은 고통을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검게 타고 있는 얼굴이 보일 뿐이다. 모드와 아만다 둘 사이에 성사된 거래의 끝, 바로 여기에 잡음이 발생한다. 가상과 현실의 교차가 기묘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가상은 가상이긴 하지만 모드의 시점쇼트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현실은 일반적으로 3인칭을 보여주는 풀쇼트 혹은 롱 쇼트로 촬영되지 않았다.

이 이질적인 어긋남, 실패, 끊어짐, 불연속, 분절과 파열, 파괴, 불일치는 관객에게 공포 그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 A24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영화를 따라가며 보았던 인물의 움직임과 사건은 과연 어떻게 이곳으로 도달하였는가.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의 자신에게 자살을 명령했는가. 이 관점에서 보면 모드가 이야기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 안에 갇혀 버린 무능함에 지나지 않는다. 명백한 퇴행이다. 다르게 해석해 현재의 내가 과거의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인간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결국 과거의 자신은 죽이지 못한 채 현재의 내가 '나'를 제물로 바쳐 과거의 나의 죄를 대신하는 모양이 된다. 어느 쪽이든 모드의 세계는 닫힌 결말이다.

<세인트 모드>를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인물을 사랑하지 않아야 만들 수 있는 긴장감? 혹은 회의를 공포화한 무엇? 이 결말은 감독의 다음 작품을 보아야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만, 이 영화의 만듦새와는 별개로, 자학으로 만들어진 성스러움은 애착과 집착을 경유해 고통에서 구원하시길 바라는 인물의 애처로운 악무로 보인다. 도망친 곳에 구원은 없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A24

세인트 모드
Saint Maud
감독
로즈 글래스
Rose Glass

 

출연
모피드 클락
Morfydd Clark
제니퍼 엘Jennifer Ehle
털로우 콘버리Turlough Convery
릴리 나이트Lily Knight
마커스 휴튼Marcus Hutton

 

제작 A24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85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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