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웨어 스페셜' 가족 앨범을 꺼내어보기
'노웨어 스페셜' 가족 앨범을 꺼내어보기
  • 이현동
  • 승인 2022.01.11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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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내일 죽더라도 또 하나의 기억을 심겠다"

창문을 닦고 있는 한 노동자의 모습과 창문을 쳐다보는 사람들 속에서 <노웨어 스페셜>(2020)은 관객에게 그 노동자의 일상을 소개한다. 노동자로 일하는 존(제임스 노턴)은 아들 마이클(다니엘 라몬트)과 한 부모 가정으로 일상을 살아간다. 그은 마이클의 엄마가 자신을 떠난 것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좋은 아빠로 살아가려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4살배기인 마이클의 선함은 마치 투명한 창문처럼 잘 닦여있어 존이 어떤 아빠인지를 그 품성과 함께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존에겐 뇌종양으로 추측되는 질병이 그의 죽음을 앞당기고 있다. 그는 절박함 속에서 마이클의 입양을 원하는 위탁 가정들과 마주하며 가장 합당한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객들이 목도하게 이야기의 명암은 한 부모 가정으로서의 비극적인 상황이 아니라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사회복지사인 쇼냐(에일린 오히긴스)에게 "이것은(입양)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에요"라고 호소하는 그의 음성에는 앞서 언급했던 '가족'이란 정의에 대한 궁극적인 방향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 그린나래미디어

여기서 <노웨어 스페셜>은 존과 마이클의 작별이 끝까지 묘사되지 않는다. 존의 죽음은 실상 스크린에서 배제된 채 그들의 일상의 연속성 사이에서 '가족'은 삶이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키며, 이 영화는 덤덤하고 먹먹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또한 실화를 배경으로 각색된 가족 영화에서 신파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요소를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지점은 이 영화의 독특한 측면을 배가시킨다. 추가로 살펴보면 존이 겪고 있는 질병이 개선된다거나 기적적으로 완치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차차 정리해나가는 존의 모습이 존재할 뿐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존의 병세가 악화되는 장면들을 관객들로 하여금 관망하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이클은 아빠의 죽음이 도래할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있다. 그때 마이클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골똘하게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사회가 합의한 어떤 합리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존이 마이클을 '놓아줌'으로 완성되는 영화로 결론을 내린다.

상기해 보면 존이 선택에는 어떠한 이유도 언급되지 않는다. 유추할 수 없는 이 결정에 강조되는 것은 아빠와 마이클이 손을 잡고 있는 장면뿐이다. 또 한 가지 유의 깊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청소부인 그가 보게 되는 창문 뒤의 다층적으로 존립하는 계급 사회의 위계이다. 이러한 요소가 최선의 선택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묻는 담론으로 나아감으로써 <노웨어 스페셜>은 입체적인 영화가 된다. 그것은 구조화된 사회, 즉 메타적인 의미에서 가족의 지형도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의 지형도

<노웨어 스페셜>은 흥미롭게도 인간성에 대한 지형들의 보고로도 묘사된다. 그를 그저 노동자의 한 부류로 인식하는 상류층의 남자가 창문을 잘 닦지 못한다고 핀잔을 주는 장면에서 위계는 직접적으로 관측된다. 이를 저항하는 노동자의 움직임이란 건 창문에 몰래 계란을 던지는 것뿐이다. 설사 적발되더라도 경미한 벌금을 물어내야 하는 정도에 행위 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각각의 생활 환경 속에서 위탁을 원하는 가정들이 대거 등장한다. 유산으로 인해 임신 생각을 떨치기 힘든 가정을 시작으로 상류 중산층 부부, 교외의 위탁 가정, 청결함을 유지하는 부부 그리고 16살에 아이를 유산하고 다신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여자 등을 마주하면서 가족의 형태의 잠재적인 가능성들을 부지불식간에 인식시킨다. 각기 다른 질서를 소유한 위탁 가정과 끊임없는 만남 속에서 관객들은 뚜렷하게 존의 결정을 예측할 수 없다.

 

ⓒ 그린나래미디어

이러한 형태를 관측하면서 존은 자신의 결정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원만하고 평평한 지형에서의 보장된 삶이 아닌 마이클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선택의 유보는 한편으로 관객들에게 여백을 남겨두며 동시에 존의 심정에 대한 공감을 촉구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노웨어 스페셜>에서 불균질적인 가족의 지형도는 어느 방향에서도 납득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는다. 그저 존의 결정은 마이클의 삶에 긍정적인 소망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 지형을 잘 건너갈 수 있도록 존은 마이클에게 애정을 쏟을 뿐이다. 가능성이 혼재된 상황에서 서사를 이끌어내는 건 '아이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닿아있다.

 

어린아이에게 죽음을 이야기하기

마이클은 존의 행동을 따라 한다. 아빠의 문신을 보고 자신의 팔에 따라 그리기도 하고, 세차할 때 장난감 트럭을 동시에 닦기도 한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마이클에게 그의 말대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반대로 죽음이란 종착지에 도달할수록 이야기해야 할 대상으로 점차 이행한다. 죽음의 결과가 초래할 입양에 대한 정의가 '좋은 부모님, 새 가정에서 함께 사는 것'이라는 존의 설명에도 마이클은 입양이 싫다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 부모 가정이 된 그들에게 입양의 동기를 제공한 건 실상 고향이 그리워 떠나버린 마이클의 엄마일 것이다. 엄마가 어디 있냐고 묻는 마이클에게 존의 대답은 그녀가 멀리 떠났다는 말뿐 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보관하는 '기억 상자'에 엄마의 흔적이 함께 동봉되어 있는 것에서 <노웨어 스페셜>은 낙관적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내려 고군분투하는 아빠의 노력은 찾을 수 있다.

 

ⓒ 그린나래미디어
ⓒ 그린나래미디어

결과적으로 죽음을 상쇄하기 위해 마이클에게 존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마이클이 죽음을 인식하는 과정은 존의 태도와 밀착되어 있다. 어린아이가 겪는 죽음이란 움직이지 않는 딱정벌레에서 식별되는 것인가? 존은 동화책을 보며 말한다. 죽은 다음에 인간은 흙이 아닌 공기처럼 머무는 것이라고. 모든 동물과 식물,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고. 그저 몸만 떠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슬픈 것이 아닌 그냥 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존의 표정에 뒤섞인 감정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지만, 진정으로 인식하기가 어려운 건 어린아이인 마이클의 감정이다. 존은 죽음 뒤에 사후세계는 흙이 아닌 공기라고 표현함으로 어린아이가 마주하는 죽음은 슬픔으로 닥쳐오지 않고, 일상에서 누구나 마주하는 일로 치환한다. 죽음은 기억과의 공존이며 더 나아가 특별한 일이 아닌 어디에나 있는 것인 셈이다.

사실 서두에 언급했던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말끔하게 해소되지 못한 채 있다. 하지만 존과 마이클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그 의미를 차츰 담아 간다. '기억 상자' 속에 보관된 사진들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가족의 정의를 묻는 작업을 수행함으로 <노웨어 스페셜>은 앞으로 각자가 간직해야 할 그 물음에 그 해답을 살며시 내어준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손을 잡고 신호등을 건너 그들의 일상을 변함없이 걸어가는 그 자리에 위치한다. 이 영화의 사례는 감독이 인터뷰한 내용을 보더라도 드문 일이다. 일반적으로 입양과 양육에 대한 문제는 기관이나 사회복지사가 감당해야 할 일이며 아들의 엄마가 떠난 다음에는 부모를 선택하는 몫은 자녀의 결정이 더욱 크게 반영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 사례가 영화적 동력으로 채택된 것은 가장 순수한 아이의 영혼이 사회적으로 적합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웨어 스페셜>은 특별한 영화이면서 가족 영화의 모범적인 예시로 회자될 것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노웨어 스페셜
Nowhere Special
감독
우베르토 파졸리니
Uberto Pasolini

 

출연
제임스 노튼
James Norton
다니엘 라몬트Daniel Lamont
에일린 오히긴스Eileen O'Higgins
발렌 케인Valene Kane
키스 맥얼린Keith McErlean
크리스 코리건Chris Corrigan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96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 2021.12.29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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