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염세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하기
[하마구치 류스케] 염세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하기
  • 배명현
  • 승인 2022.01.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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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아워>부터 <드라이브 마이 카>까지

내게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가 가지는 지배적 이미지는 '차가움'이다. 감정의 동요로 관계가 얽히지만 폭주하지 않으며, 인물들은 사건을 만들어내기보단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지'라는 걸 생각해보면 참으로 알 수 없다. 인물들은 예기치 못한 물리적 상황에 의해 예상치 못한 곳으로 끌려온다. 구체적인 사태들에 의해 이끌려 온 인물들은 세상의 어쩔 수 없음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 움직임은 차갑다.

 

영화 '아사코' ⓒ
영화 <아사코>(2018) ⓒ 이수C&E

하마구치 류스케와의 첫 만남은 <아사코>(2018)였다. 그는 다분히 문학적 은유로 일본의 상처(동일본대지진 등 재난)를 다루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이며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인 동시에 재앙이다. 시각 혹은 청각, 편집의 충돌로 은유하는 대신 '상징'이라는 문학의 방법을 작품 내부에 녹여냈다. 그 때문에 이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인간의 내면을 문학적인 방법을 통해 읽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 감독은 이 독법을 다분히 '영화적으로 읽기'를 관객에게 요청한다.

예를 들면 라스트 숏.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아사코(카라타 에리카)는 테라스에서 흐르는 강을 바라본다. 그 이전까지 아사코는 신기할정도로 똑같이 생긴 과거의 연인 바쿠와 현재의 연인 료헤이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혼돈에 힘들어했다. 료헤이도 그런 아사코를 바라보며 고뇌한다. 하지만 그 엔딩에서 두 사람은 함께 흐르는 강을 바라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정답은 알 수 없다. 다만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고독과 혼돈 사이에 잠시 머무는 휴식이 될지. 희망의 긍정이될지. 혹은 더 끔찍한 비극이 다가오는 것을 무람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렇게 영화를 찍었으니까.

<아사코>에서 믿음은 산산이 부서진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잔해들을 견딘다. 아사코도, 료헤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깨끗이 정리된 평화의 땅이 아닌 기억이 묻어있는 잔해 위에서 서로를 의식하며 그대로 서 있다. 이 영화를 단순히 사랑에 대한 영화로만 관람한다면, 러닝 타임 내내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추상적인 사랑 이야기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영화 <해피 아워>(2015) ⓒ 트리플픽쳐스

<해피 아워>(2015)는 어떤가.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328분을 이끌어간다. 이 영화의 핵심은 '중심잡기'이다. 영화의 초반부터 비중 있게 다뤄지는 워크숍 시퀀스는 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갈 화두 하나를 던진다. 의자를 대각선으로 세우고 여러 사람과 몸을 기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통해 영화는 등장인물에게 질문한다. "여러분은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 혼자서도, 여럿이서도. 이 행위는 나 자신에 대한 기민한 감각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믿음 또한 요구한다.

<해피 아워>에서 이 중심을 매개하는 물질은 '몸'이다. 몸이 그 자체의 존재를 증명한다. 몸이 움직이는 순간 상대방에게 다가갈 것인지 멀어질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서로가 적정 힘을 주지 못한다면 무너지고 만다. 이 무너짐은 내면의 증명인 동시에 서로의 믿음과 관계를 시각적으로 증명해주기도 한다. 곧 이 무너짐은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인 동시에 너와 나의 불신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영화 속 사랑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전제 자체가 불완전하니 그 결과는 자연스러운 귀결로 불안할 수밖에.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

<드라이브 마이 카>(2021)는 이러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세계관 전체를 다시 한번 보강해주는 듯 하다. 그의 문학적 접근은 무라카미의 소설 원작으로 다시 재현되었고, 인물들에게 벌어지는 사태의 차가움은 더욱더 강화되었다.(<드라이브 마이 카>는 여러 레이어의 이야기가 쌓여 있는 중층적 구성의 이야기이다. 때문에 이 레이어마다 핵심 키워드를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 트리플픽쳐스

먼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요시)는 아내인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오토와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다음 날 오토에게 다시 말해주는 형식으로 되돌려 준다. 오토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이 기억은 매일 출근하며 듣는 테이프와 연결된다. 그는 자동차 안에서 반복적으로 아내의 목소리로 녹음된 대사를 듣는다. 그는 이 행위를 통해 기억한다.

그런데 이 기억은 어느 순간 새로 입력되지 못하고 망가져 버린다. 아내의 외도 사실을 목격한 이후, 가후쿠는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듣지 못하니 말할 수 없다. 그는 배우로서의 역할을 '거세'당한다. 심지어 애초에 기억하는 사람이었기에 물을 수도 없다. 그는 아내를 바라만 볼 뿐 왜 외도를 했는지 물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아내가 모종의 고백을 하려 마음먹은 날 아내는 죽고 만다. 이 죽음 이후부터 그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삶을 살 게 된다. 유일하게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이 사망해버렸다. 그는 망가진 채로 다시는 고칠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일은 계속된다. 가후쿠는 배우가 아닌 연출가로 살아가게 된다. 또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를 만나 운전석이 아닌 뒷좌석에 앉아 매일 출근한다. 그는 뒷좌석에서도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듣지만 더 나아가진 못한다. 심지어 아내와 외도한 다카스키(오카다 마사키)가 자신의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묻지 못한다. 다카스키는 알았을 것이다. 아니 모를 수 없다. 오토가 이야기로 은유한 '사실'을 그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이 세 인물은 서로의 믿음의 관계로 얽혀 있다.

타인에게 물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혹은 말을 걸고 싶지만 진실한 대회를 하기엔 그 능력이 부재한 인물들.

 

ⓒ 트리플픽쳐스

이 관계 사이에 한 명의 드라이버가 존재한다. 이 드라이버는 깍두기처럼 혼자 동떨어져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영화적 관계에 속해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 드라이버 '미사키'는 명령을 수행하는 인물이라는 데 있다.(반대로 가후쿠는 '차 안에서 담배를 피지 마라'와 '어디로 가달라'라는 두 가지 명령을 하달하는 사람) 미사키는 운전이라는 행위뿐만이 아닌 자신의 소유가 아닌 차에서 기다리는 것. 그 자체를 행위로 수행하는 인물이다. 이 기다림은 사실 알고 보면 그 이전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어머니가 산사태에 파묻힌 그 이후부터 영화 후반에 다시 그 장소로 돌아가기까지 이어진 인물의 중심적 행위이다. 이 기다림을 끝마치기 위해선 다시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미로를 출구에서부터 입구로 역행해 풀 듯, 이야기를 거꾸로 거슬러 가보자. 가후쿠는 듣는 자이지만 연극을 이행하면서 점점 말하는 자로 그 자리를 이동해나간다. 그 중심 장소는 '차'이다. 아내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떠도는 곳. 이 장소에서 그는 '말'함으로 자신의 행동을 이행해야 한다. 이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내면의 정동이 아닌, '일'이다. 그가 연출하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속 소냐가 "우리는 일을 해야 해요"라며 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점을 수어와 감정으로 끌어낸다. 소냐역의 이유나(박유림)가 재니스 창(소냐 위엔)과의 연기에서 무언가 생성되었다고 말했을 때의 그것을 영화 끝에 관객에게 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관객은 우리인 동시에 스크린 안에서 연극을 바라보던 미사키이다.

미사키는 연극의 힘으로 자신의 과거와 작별하는 동시에 차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역할을 끝내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 인물들, 그러니까 가후쿠, 미사키는 서로에게 필요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지난 상처를 서로의 필요로 보듬는 데는 어떤 인위적인 위로나 연대가 아닌, 그저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로 충분했다. 여기에서 문제는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연결될 수 없는 이질적인 언어를 쓰는 자들이다. 이때 느껴지는 타인과의 거리감은 감정 없는 대사로 느껴진다. '감정이 소실된 채로 알 수 없는 대사'만이 이어지는 강당에서 배우들은 혼란스러워한다.

 

ⓒ 트리플픽쳐스

하지만 결국, 이 연기는 가능해진다. 그건 감정 때문이다. 그 대사(언어)만으로는 불가능했던 지점에서 '감정의 결'이 더해짐으로 서로 간의 특별한 무엇이 탄상한다. 이 무엇이 순간의 섬광으로 번쩍 빛을 밝히고 이 순간을 목격하고 있던 관객들까지도 이 특별함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에서 감정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순간은 응집된 무한한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섬광은 굳이 언어로 전달하려 하지 않아도 어떤 일(삶)을 경유하면서 자연스레 감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해피 아워>,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모두 '응시'로 결말이 지어진다.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것이 아닌, 영화 그 안의 인물들이 응시하는 어떤 것으로 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시점이 아닌 우리의 시점으로 그들이 바라봄이라는 사실을 응시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반복해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보았습니까?" 그 섬광을. 그러면 여기서 나는 위에 적었던 <아사코>의 결말을 다시 수정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가 찍은 결말은 긍정의 가능성이라고. 이런 그의 생각에 도의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단절된 관계에서조차 희망을 발견하려는 염세적 희망만은 거부할 수 없을 것 같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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