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올 이즈 굿' 비극은 가장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NETFLIX] '올 이즈 굿' 비극은 가장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 이지영
  • 승인 2021.12.31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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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여성이 스스로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동기에 대하여"
ⓒ NFP

독일 신인 감독 에바 트로비슈의 첫 장편영화 <올 이즈 굿>(2018)은 제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71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제36회 뮌헨 국제영화제 등 유럽의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작품으로, 국내에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강간 피해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영화의 반어법과 같은 제목(독일어 원제 All ist gut, 모든 것이 다 괜찮다)은 주인공 '야네(엔네 슈바르츠)'의 특유한 삶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강간범을 단죄하고자 하는 법정물부터, 강간범에게 성적으로 이끌리게 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혹은 피비린내 나는 강간 복수극까지, 성폭행 피해 이후에 발현되는 피해자들의 극단적인 심리를 분석한 영화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올 이즈 굿>이 전작들에 가지는 차별점은, 강간 피해를 겪은 이후에도 일상생활을 그대로 버티고 영위해야만 하는 한 무기력한 소시민 여성을 조명했다는 점일 것이다.

야네는 남자친구 피트(안드레아스 돌러)와 함께 경영하던 출판 사업이 파산하면서, 남자친구 삼촌의 빈집에 들어가 살아야 할 만큼 경제적인 위기에 몰린 상황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두 커플이 소소하고 즐겁게 대화하며 빈 집의 벽지를 뜯어내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알고 보면 카메라는 이들의 막다른 처지와 곤궁함을 일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야네와 피트가 느낄만한 좌절이나 막막함을 관객이 뒤늦게서야 알아차리도록 익숙함 혹은 평범함 속에 숨긴다. 하지만 피트는 그 와중에도 연인을 위해 중고 피아노를 선물하고, 둘의 애정은 변함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뒤이어 야네는 동창회에 참석하지만,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위축된 마음을 달랜다. 그리고 함께 술에 취해가던 마틴(한스 로우)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야네는 분위기에 이끌려 마틴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성관계만은 끝까지 거부하는 그녀를 마틴이 강간한다. 하지만 이날 사고 이후로도 야네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피트에게조차 발설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고통을 분담하려 하지 않는다.

 

 

ⓒ TRIMAFILM, NFP

때로 비극은 가장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동창회에서나 회사에서 보는 마틴은 어딘가 사회성이 떨어져 보이긴 하나, 외적으로는 인격적인 결함이 있다거나 반사회적인 캐릭터로 보이지 않도록 행동한다. 야네 또한 이러한 일을 별거 아닌 일, 그럴 수 있고 지나가는 일로 치부한다. 예컨대 술에 취해 마틴을 집으로 데려갔고 성폭행을 당하던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 자신임에도, 분명히 스스로가 피해자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지만 무시하는 듯하다. 이 사건을 공론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한 그녀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처음부터 누구라도 쉽게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판단으로 원래의 생활을 이어가기로 한다. 그러나 거대한 갈라짐은 하나의 단초, 미세하지만 강한 충격과 균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강간한 남자는 다름 아닌 야네가 새로 구한 직장 상사인 로베르트의 처남이었고, 직장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일상적으로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다. 평범함의 얼굴로 변장한 강간범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매일 같이 고통을 주는 괴물이자 악몽으로 나타난다.

강간 직후 피해자의 일상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피해자의 역설적인 심리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폴 버호벤의 <엘르>(2016)에서 주인공 미셸은 끔찍한 성폭행 피해 이후에도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친구들에게 발설하며,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를 이어간다.(그녀는 이웃집 남자에게 성적으로 끌리기도 하는데, 이 또한 성폭행 피해 후 의학적으로 밝혀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이라고 한다) 야네 또한 피트와의 관계를 이전처럼 이어가고, 성관계도 예전처럼 즐기지는 않지만 거부하지도 않는다. 직장에서는 마틴을 마주쳐도 침착하게 대응하기도 한다. 사회적, 도덕적인 판단이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보다 일상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본능적인 생존 욕구는, 야네처럼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 몰렸을 때 더욱 처절하게 다가온다. 야네는 로베르트에게 고용된 입장이며 마르틴이 그의 가족, 처남이기 때문에 갖는 우월적인 지위는 그녀를 한층 더 무력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그저 '다 괜찮다'고 말하며 버티고 있는 그녀가 어느 정도까지 극단적인 스트레스에 내몰려 있는지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결말까지 봉쇄되어 있다.

 

ⓒ NFP

성폭행을 당한 이후에도, 야네의 성性은 때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계의 문을 재개해주는 열쇠로도 작용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강한 의견 충돌이 있고 난 뒤 문조차 열어주지 않는 피트의 집 앞에서 야네가 옷을 모두 벗고 안으로 집어넣는 장면은,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는 일에 얼마나 무심한지, 필요하다면 신체를 어떤 수단으로라도 쓸 수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렇듯 자신의 육체를 대상화해버리는 태도는 임신과 낙태 결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마치 정해진 수순의 절차와도 같이 보이는 낙태는 중산층인 로베르트와 씨씨 부부의 임신 계획과 강한 대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로베르트 또한 아내로부터 임신 노력을 강요받으며 학대를 받고 있었음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 성적 자기 결정권의 문제가 비단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점이 특히나 인상적이다. 그녀는 결국 임신 사실을 마르틴에게 알리고, 피트 또한 병원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며 둘의 관계는 파경을 맞는다. 이로써 무감각하게만 보였던 야네의 분노, 우울, 피로는 드디어 외부로도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엘르>에서와 마찬가지로 강간범이 눈앞에서 한순간의 일격으로 사라지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도 <올 이즈 굿>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마르틴의 사고 소식을 들으며 야네는 자신이 겪은 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되려 격하게 반응한다. 직장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트라우마를 버텨온 그녀의 몸은 트라우마의 원인이 사라지자 본능적으로 구토감을 느끼는 듯하다. 달리 보면, 이것은 깊은 허망함에서 오는 현기증일 수도 있다. 야네의 숨통을 조여오면서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한 원흉이 사라졌으니, 무엇을 위해 참고 견뎌야 했던가에 대한 이유가 갑자기 없어진 것이다. 그는 사라졌지만, 야네에게는 어떤 위로도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피트와의 관계는 낙태 수술로 인한 오해 때문에 파경에 이르렀고, 이제 다시 돌아갈 둘만의 집이 없어졌으며, 그녀는 다시 정처 없이 헤매야 할 것이다. 그녀는 목적지를 못 정하였지만 그래도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무임승차한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 NFP

중세 로망스 기사도 이야기에서는 원정을 떠나는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고초와 시련이 거듭해서 주어지고,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인내심과 용기로 모든 장애물을 헤쳐나간다. 젊은 현대 여성인 야네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한 고전 영웅과도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극복해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기사가 여정을 따라가면서 진정한 명예와, 사랑을 찾아 돌아오는 것과는 반대로, 소시민인 야네에게 남은 것은 텅 빈 폐허로 남은 고단한 육체뿐이다. 지하철에서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티는 야네의 마지막 클로즈업 숏은, 두 발로 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인간이 몸을 맡길 수 있는 최후의 선택지처럼 보였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NFP

올 이즈 굿
All is Good
감독
에바 트로비슈
Eva Trobisch

 

출연
엔네 슈바르츠
Aenne Schwarz
안드레아스 될러Andreas Dohler
한스 로우Hans Low
틸로 네스트Tilo Nest
리나 벤델Lina Wendel

 

제작 TRIMAFILM, Starhaus Filmproduktion, Hochschule für Fernsehen und Film München 
배급 NFP Marketing & Distribution
제공 NETFLIX
제작연도 2018
상영시간 90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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