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코아르CoAR에 BEST 10 원고를 작성하며, 1년이란 시간이 무척 빠르게 흘러감을 체감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평생 아껴서 꺼내 보고 싶은 영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음에 감사하기도 하다. 코로나가 주변까지 좁혀와 올해는 재택을 자주 했다. 그러나 인적 없는 방에서 나를 독대해 줄 영화들이 있고, 같이 글을 쓰는 동료들이 있음을 멀리서라도 느낄 때 다시 한번 굳게 버티어 설 수 있던 한 해였다. 특히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문화 예술계에서 지금도 노동하고 있는 수많은 손길들의 노고를 느끼며, 내가 향유하고, 깊은 감동을 느끼고, 마음 깊숙이 새기는 모든 이 작품이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님을 자각하려고 애썼다. 2022년에는 이 상황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해 본다. 그리하여 내년에는 더 좋은 영화들이 세상에 나오고, 끊임없이 나를 독대해 주기를 바란다.
1. <인트로덕션 INTRODUCTION> 홍상수|2020
2022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도 왁자지껄한 군중 속에 있지도 못하는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불편한 느낌 속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맞이할 것이다. 내년에는 어떤 상황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인가? 한 해의 시작과 그다음 해의 시작 사이의 시간은 어떤 사건들로 빼곡히 채워질 것인가? 삶의 이러한 예측 불가함과 불가해성을 담기 위해 홍상수는 러닝타임 안에 끝나는, 완결되고 닫힌 서사의 구조를 해체하고 빠져나갈 탈출구를 만들어 두었다. 이 시간을 오롯이 견디기 위해서 우리를 붙잡아주는 굳게 선 두 다리, 따뜻한 두 팔의 포옹을 기대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드라이브 마이 카 Drive My Car>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2021
타인의 깊은 심연에 가닿기 위해서 우리 각자는 육체의 언어, 말의 언어, 침묵과 눈빛의 언어로 대화한다. 인물들이 대본을 외우고,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듣고 또 듣는 일련의 과정은, 타인이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지지부진한 노력과도 같다. 언어가 통하였을 때 내면의 안내자는 눈 덮인 산속에 아직도 치우지 않은 채로 쓰러져 있는 기억의 폐허들로 안내할 것이다. '길고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내어야 한다'는 체호프의 대사처럼, 눈이 모두 녹고 폐허가 재건되기까지 설령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도망치더라도, 우리는 늘 차의 엔진을 늘 켜두어야 한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큰 선물과도 같았던 영화.
3.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 제인 캠피온Jane Campion|2021
한층 깊어지고 치밀해진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연구, 더 광활해지고 압도하는 풍광들. 제인 캠피온은 '최초 황금종려상 수상 여성 감독'이라는 구태의연한 수식어 안에 본인을 가두지 않고, 영화적 세계관의 깊이와 폭을 확장하여 2021년에도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12년간 제인 캠피온의 신작을 기다려온 관객이라면 영화관에서 벅찬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자기 모순적이지만 각자 설득력 있는 인물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사를 당기며 심리 서스펜스를 최고조로 이르게 하는 거장의 방식은, 이 캐릭터들을 얼마나 치밀하게 연구하여 창조했는지 부족함 없이 드러내어 준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이 유독 빛났던 작품이었다.
4.<노매드랜드 Nomadland> 클로이 자오Chloe Zhao|2020
현대인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종착점 어디인가? 나만의 집을 구매하고 싶은 노동자들의 욕망은, 날이 갈수록 치솟는 자산 가격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시의적절하게도 <노매드랜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역 경제가 통째로 몰락하면서 경제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대안적인 삶을 소재로 한다. 길 위에서 '집 없는'(Houseless) 사람일지언정 '홈리스'(Homeless)가 되지는 않으려는 노매드의 치열하고도 고단한 삶, 이들의 끈끈하면서도 느슨한 연대를 포착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 배우의 정체를 숨기고 진짜 노매드들의 삶에 투입하며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살펴보는 변형된 다큐멘터리식 촬영기법이 특히 인상적이었으며, 죽음 직전까지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신념을 고수하는 태도는 숭고한 감정을 자아내었다.
5. <레베카 Rebecca>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1940
<고스트 스토리>(2017)의 데이빗 로워리, <트랜짓>(2020)의 크리스티안 펫졸트 등 동시대 많은 감독들이 '유령'이란 존재에 천착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그 근원에는 히치콕의 <레베카>가 있다. 2020년에 벤 휘틀리 감독이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특히 여성 주인공의 주체성을 강조한 <레베카>(2020)조차도 그 파급력이 무색해질 만큼 원전에서의 레베카는 압도적인 위용을 가진다.(다시 말해, 현대의 레베카는 히치콕의 유령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메타적인 영화다) 히치콕표 멜로드라마 답게, 타인에 대한 자기만의 허상(우상화, 구원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 좇는 인물들의 서로를 향한 미끄러짐을 우아하게 그려낸다.
6.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데이빗 로워리David Lowery|2021
리들리 스콧의 <라스트 듀얼>(2021)과 드니 빌뵈브의 <듄>(2021)과 같이 직간접적으로 중세 모티브로 한 영화들 사이에서 <그린나이트>는 독보적이었다. 데이빗 로워리는, 대자연 앞에 선 인간의 필멸성은 그가 가진 모든 덕성과 인간적인 나약함 마저도 무용한 것으로 만든다는 자연주의적인 메시지를 담아서 아서왕 시절 가웨인 경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아울러 시간의 흐름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카메라의 360도 패닝과 곳곳에 배치된 원형적인 이미지들은 형식과 내용이 서로 아름답게 공명하게 하도록 한다.
7. <운디네 Undine> 크리스티안 펫졸트Christian Petzold|2020
베를린의 도시 모형도는 <운디네>의 중요한 모티브다. 18세기 제국 시대부터 사회주의,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역사적 기억들이 한 도시 안에 중첩되어 있음을 모형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파괴, 재건, 복원되는 뭍 위의 역사와 달리, 무의식이라는 깊은 수면 아래에 축적되어 가는 기억들도 있다. 개인 차원에서는 마치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주인공들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깊은 상실과 같은 것이다. <운디네>는 사랑하는 이의 수면 아래로 침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연인들의 멜로 드라마이기도 하며, 운디네라는 요정의 통시적인 눈을 빌린 베를린에 대한 감독의 헌정이기도 하다. 짧은 런닝 시간 안에 이처럼 조밀히 새겨진 다층적인 내러티브와 풍부한 감각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8. <아네트 Annette> 레오 카락스Leos Carax|2021
홍상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서사를 해체하는 작업을 한다면, 레오 카락스는 자전적인 속성들을 인물로 현현하고, 무대에 세우고, 코러스를 넣는다. 'So may we start?' 노래가 시작되면 그는 기묘하고도 황홀하고, 고고하면서도 키치한 자신의 예술로 관객을 안내한다. 헐리우드 뮤지컬을 비웃는 듯한 이 안티-뮤지컬은 다분히 황홀경일 때도 있고, 고통스러울 만큼 난해하거나 음울하기도 하다. 아름답고 지고한 존재인 안은 죽고 비열하고 냉소적인 헨리는 끝까지 살아남는 것처럼, 감독의 내면에서 서로 화합하고 갈등하고 파멸하는 속성들은 서로 경쟁하다 자기모멸의 쓴맛과 허망함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그저 나의 분신에 지나지 않던 아네트는 깨어나 말을 하기 시작한다.
9. <더 파더 The Father> 플로리앙 젤러Florian Zeller|2020
노련한 연극 감독이자, 신인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플로리앙 젤레가 자신의 연극적인 DNA를 가장 영화적으로 재해석해낸 작품.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노화, 기억 상실, 트라우마, 죽음이라는 말로를 철저히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의 1인칭 시점으로 체험하도록 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출구가 없고 미로와 같은 기억의 감옥은 관객들로 하여금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도록 압박하나, 그 끝에는 태곳적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하는 듯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울러 아름다운 오페라 음악과, 여기에 의지하여 생의 리듬을 유지하려는 인물의 태도는 절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10. <쿠오바디스, 아이다 Quo vadis, Aida?> 야스밀라 즈바닉Jasmila Zbanic|2020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같은 집단 기억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스크린 위에 복원할 것인가? 마치 <언더그라운드(1995)>의 '에밀 쿠스트리차'식 캐리커쳐화된 인물들과 카니발 의식과 같은 보호제 또는 완충재 없이도, 보스니아 출신의 야스밀라 주바니치 감독은 대학살의 날을, 날 것 그대로의 사실주의적인 시선으로 대담히 재현해낸다. 전쟁의 최전선에서 운명의 키를 쥐고 있다고 믿었던 주체적인 여성 아이다가 전쟁의 야만과 폭력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고, 비통하게 울부짖는 모습은 8,327명의 아들, 남편, 이웃을 잃은 어머니들의 절규를 한 데 응축한 듯하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