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우연처럼 다가 온 영화가 운명처럼
[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우연처럼 다가 온 영화가 운명처럼
  • 이현동
  • 승인 2021.12.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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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출몰하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들"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의 영화는 책을 닮아 있다. 이 말은 영화를 축조하는 공식들이 무엇과 밀착되어 있는가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물음에서 출발한다. 영화보다 책으로부터 수용하는 정보량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대조해 보면 대부분의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체감되는 막대한 분량의 대사들은 책의 특성과도 그 방식을 공유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몇 편의 단편소설을 집필하면서 떠오른 생각이지만 언어가 세공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상상'이란 것은 불현듯이 번뜩이는 우연들의 이야기들이자 잠재적인 움직임으로 꿈틀거리는 생명체와 같다. 마치 위에 하마구치 류스케가 언급한 우연의 예들처럼 말이다.

<우연과 상상>(2021)을 감상하면서 프랑스 영화의 묘한 영화적 농도를 떠올렸다. 그가 자주 언급하고 영향을 받았다는 장 르누아르나 에릭 로메르, 로베르 브레송과 같은 대가들의 영화가 하마구치를 경유하여 묘하게 발산하는 에너지들은 그 자체로 독특한 감성으로 다가온다. 세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는 금방이라도 책에서 꺼낸 대사들이 넘실거리면서 생생한 감응으로 영화의 여백을 채색한다. 특히 그의 작업은 이를 증폭시킨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시나리오를 쓸 때는 텍스트에만 집중하지만, 현장에 들어가면 연기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텍스트의 변화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촬영을 한다고 한다. 또 긴 대사량을 배우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배우들이 대사를 몸에 익을 정도로 암기할 때 비로소 배우의 것으로 동화될 수 있다고 그 나름의 디렉션 노하우를 밝히기도 했다.

 

ⓒ NEOPA & Fictive

첫 번째 우연 : 누구나 겪어보았을 법한 우연

'우연'과 '상상'이라는 단어가 배우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와 츠구미(현리)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메이코는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익숙한 이름을 듣게 된다. 선수를 싫어한다는 츠구미는, 선수 같지만 서로 잡담을 할 정도로 잘 맞는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와의 강렬했던 만남의 순간들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이야기 도중에 무엇보다 메이코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츠구미에게 2년 전 바람피운 전 여친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구미와 헤어지고 곧장 메이코는 '카즈아키'의 회사로 쳐들어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필자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입문하면서 충격을 받았던 장 뤽 고다르의 <경멸>(1963) 속 대화와 유사해 보였다. 경멸의 원인이 무엇인 지 파악할 수 없도록 의도하는 영화 기법(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선취했던 소격효과와 같은)과 동시에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목소리, "사랑해"라는 공허한 대답은 메이코와 카즈아키의 대화 안에 내재하는 부조화한 어떤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불균질한 대화의 리듬은 어느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스팬스를 유도하고, 결과적으로 규칙 없이 난무하는 모호한 감정으로 치환된다.

긴 대화 끝에 포옹하기는 했지만, 함께 일하는 비서에게 그들의 관계를 들통나버린 메이코는 즉시 도망가버리고 애매한 감정으로 가진 채 관계는 끝이 나버리고 만다. 3일 후에 메이코와 구미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창문 밖으로 지나가던 츠와 눈이 마주치곤 함께 어색한 만남을 갖게 된다. "최악의 우연"이자 "카즈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라는 메이코의 말은 플래쉬 벡으로 점멸하고, 메이코는 상상의 말을 머금고 그 자리를 떠난다. 이 과정에서 메이코를 향해 갑작스레 등장하는 줌 아웃은 '우연'이란 운동성이 작동하는 순간을 포착해 내는 음울하면서 해학적인 유머가 집약되어 있는 장면이다. 이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줌 인·아웃이 의도적으로 계산된 어떠한 도식적인 측면이 있다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감정이 요동하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떠난 메이코는 공사장 현장을 찍은 다음에 공간은 철도와 연결되어 서서히 하늘 위로 향한다. 이 틸 업(til-up) 과정의 종국에 이르러 첫 장면에 등장했던 나뭇잎과 대비하여 풍성한 나뭇잎으로 변화를 이루는 건, 메이코가 체감했던 감정의 풍요로움 혹은 성장이 깃들어 있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 2021 NEOPA & Fictive
ⓒ NEOPA & Fictive

두 번째 우연 : 보이는 문과 보이지 않는 문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먼저 스승과 제자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비밀적인 감각이 '문'이라는 오브제로부터 설정된다. 우선 '문'이란 건 개인과 공동체의 질서를 형성하는 공간이며 반대로 질서가 파괴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것은 선(line)에 해당하고, 그 선은 결국 물리적인 것과 관념적인 두 가지의 팽팽한 에너지를 병렬시키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낙제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학생이 교수인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 앞에서 빌고 있을 때 강의실 옆에 수업을 진행하던 한 강사가 다가와 "문을 닫을까요?"라고 묻는다. 교수는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문을 열어두라고 일러둔다. 문은 교수의 무의식과 의식을 담지하는 정체성의 표지로 발휘된다. 그러니까 원칙적이라는 사람으로 추측되는 교수에게 이 문의 의미는 잠재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시퀀스가 끝나고 바로 5개월이 지난 후 문 앞에서 다짜고짜 여자의 옷을 벗기는 남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들의 몸의 대화는 단순히 성욕을 위한 목적으로만 소비되고 있는 것을 짐작하게 될 때, 각각의 '문'은 서사를 구축하는 구심점이라는 사실이 각인된다.

이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문'은 닫혀 있는 상태이며 교수의 개방된 문과는 판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낙제를 받은 그 학생은 나오(모리 카츠키)의 미인계를 이용해 교수를 골탕 먹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교수가 출판한 책에 사인을 받기 위한 명분으로 대화를 이어가려는 그녀는 우선, 문을 닫고 은밀한 유혹을 개시하려 한다. 그 행위는 교수로부터 봉쇄를 당하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차 느슨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잠시 동안 문이 닫히게 된다. 문이 닫히는 과정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건 교수의 책을 낭독하는 그녀의 음성이다. 다소 농도가 짙은 외설적인 내용들은 외화면 밖에 존재하는 판타지로 우리에게 침투한다. 낭독 장면은 <해피아워>(2015),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서도 실험적인 기법으로 사용된 바 있다.

필자는 이 낭독 장면에서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생각났다. '섹스'라는 행위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바심을 빼앗았다'라는 한 구절 속에 담긴 이미지를 상상할 때 느끼는 극한의 희락과 같은 것이 동시에 느껴졌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섹스'라는 어쩌면 영화나 문학에 있어서 '제의'라고까지 느껴지는 관습적인 행위를 보여주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움직임의 제약을 요청하는 그 좁은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동선으로만 생동하는 감정의 세계를 구현해 낸다. 낭독한 음성과 대화내용을 전부 전송해달라는 교수의 요청에, 그녀는 그의 이름인 세가와가 아닌 사가와라는 이름을 무심결에 입력하여 전송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메시지에는 은밀하게 약속한 성적인 대화내용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결국 그녀는 이혼을 당하고, 교수는 실직을 당하고 만다. 5년 후에 그녀는 우연히 성적인 유희를 나누었던 과거의 남자와 버스에서 마주친다. 결혼을 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나오는 대화 도중에 그전까지 주지 않았던 명함을 주고는 키스를 하고 버스에서 내리며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보이지 않는 선을 넘을 때 발생하는 우연을 유머로 승화시킨다.

 

ⓒ NEOPA & Fictive

세 번째 우연 : 연기와 연기가 만날 때

마지막은 '망각된 기억을 어떻게 애도하고 복원하느냐'라는 다소 연극적인 톤이 강한 에피소드이다.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해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는 우편으로만 소통해야 하는 세계관은 그 자체로 독특성을 부여한다. 이와 반대로 책을 소유한 것 자체가 범죄로 치부되는 세상을 디스토피아의 소재로 차용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화씨 451>(1966)은 비록 장르와 메시지는 다를지언정 활자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는 지점에서 시대와 상관없이 흥미롭게 읽히기도 한다. 중년이 된 모카(우라베 후사코)는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퇴색된 기억의 파편들을 움켜쥐려 노력하지만, 그가 고향을 떠나온 시간은 아득히 좌초된 시간의 거리와 비례하는 것이었다. 역에 당도하여 도쿄로 돌아가려는 도중에 모카는 과거에 표류하고 첫사랑의 기억과 마주한다. 서로의 통성명도 없이 모카와 나나(카와이 아오바)는 어렴풋이 인상착의만을 간직한 채 함께 기억을 더듬어가기 시작한다.

나나의 집에서 과거를 나누던 도중에 "너도 날 기억했잖아"라고 말하는 모카에게 당혹스럽게 답변하는 나나. '당신이 생각하는 유키라는 이름의 동창이 아니'라고 말할 때, 이 에피소드에서도 '우연'이 발동된다. 이 계기로 인해 그 둘의 만남에서 개입되는 롤플레잉(Role-Playing)은 자신으로부터 이방인이 된 '연기자'들이 그 안에서 또 다른 '연기'를 펼치는 기묘하고도 묘한 상황을 관객들은 목격하게 된다. 이는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2012)에서와 같이 기억의 불완전한 상태와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내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지시되는 연기들은 방법론적으로 유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기억을 연기하는 둘의 연기의 형질은 마치 유령화된 연극 톤으로써 공허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처럼 관측된다. 그들이 표정이 클로즈업 될때, 카메라 앵글을 돌연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카와 나나에겐 필사적으로 감정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연기'가 있을 뿐이다. 이를 극복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역할극이 소거되지 않고 다시금 소환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름'을 인식할 때였다는 것을 상고한다면 이것은 '연기'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외화면 밖에서 증발할 위기에 처한 우리의 기억들을 되새김질하는 것과도 이 의미를 공유하게 된다는 지점에서 그 의미를 찾게 되기도 한다.

<우연과 상상>은 청년, 청년과 중년, 중년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한 편의 성장 드라마처럼 이어진다. 각기 다른 매혹적인 조립물들이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구축하는 기반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건 인상적으로 직조된 대사와 관련이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다소 긴 상영시간인 <해피아워>(2016)와 같은 작품도 대사만으로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상을 만들어내는 그의 장기는 모두 '일상'에서 존재하는 갈등관계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에 등장했던 "우연이 계속되면 운명이 된다"라는 대사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관통하는 힌트라는 걸 그는 <우연과 상상>을 통해 직관적인 방식으로, 혹은 접근하기가 쉬운 방식의 영화로 나열해놓았다. 이 영화는 '그의 영화적 특성을 밀도 있게 압축해놓았다'는 측면에서 입문작으로 추천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보는 이들은 모두 앞으로 마주하게 될 우연적인 일상을 묵도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NEOPA & Fictive​
​ⓒ NEOPA & Fictive​

우연과 상상
Wheel of Fortune and Fantasy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HAMAGUCHI Ryusuke

 

출연
후루카와 코토네
Furukawa Kotone
나카지마 아유무Ayumu Nakajima
현리Hyunri
시부카와 키요히코Shibukawa Kiyohiko
모리 카츠키Katsuki Mori
카이 쇼마Kai Shouma
우라베 후사코Urabe Fusako
카와이 아오바Kawai Aoba

 

공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해외초청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22분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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