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해피 아워' 판타지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
[하마구치 류스케] '해피 아워' 판타지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
  • 김민세
  • 승인 2021.12.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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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시간을 함께하는 영화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터널의 끝으로 자그마한 빛줄기가 보인다. 전차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나아가면 여름의 녹음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전차 안에는 아카리(다나카 사치에), 사쿠라코(키쿠치 하츠키), 후미(미하라 마이코), 그리고 준(카와무라 리라)이 앉아있다. 전차의 목적지를 등지고, 마치 뒷걸음질 치듯이. 산의 정상에 다다르면 그들은 챙겨 온 주먹밥과 과일을 먹는다. 안개가 자욱해 산 밑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1박으로 온천 여행을 갈 계획을 짜고 다시 전차를 타며 산 밑으로 내려온다.

 

ⓒ 트리플픽쳐스

<해피 아워>(2014)에는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기이하게 뒤틀린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 장면은 '중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신체 워크숍이다. 후미의 기획으로 나머지 세 친구들이 참여하게 되는 이 워크숍은 일상생활에서는 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간의 터치를 통해 서로를 알아간다는 취지로 이마를 서로 맞대고, 상대방의 중심선을 찾아 원을 그리며 도는 활동들을 포함하고 있다. 영화는 이들의 시간을 생략 없이 담으며 그들의 육체를 섬세하게, 동시에 놀이하듯이 탐구한다. 두 번째 장면은 소설가 코즈에의 소설 낭독회이다. 이 장면에서 자신의 소설을 낭독하고 있는 코즈에의 모습은 수 분 동안 고정된 카메라 앵글로 지속된다. 그 긴 시간 때문에 관객은 코즈에의 소설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고, 그 소설은 영화 속 소설이라는 액자식 구조 안 예술이 아니라 <해피 아워>라는 영화와 동등한 위치에 존재하는 또 다른 예술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다.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은 '시간'이라는 영화적 형식을 길게 늘어뜨림을 통해, 혹은 그 속을 유영하거나 무심하게 세워진 카메라를 통해, 일상과는 멀어진 유희로서의 시간과 허구로서의 시간을 현실의 시간 위로 쌓아간다는 것이다.

즉 '현실의 시간'에서 '판타지의 시간'으로. <아사코>(2018)에서 보았듯이―배우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을 연기한―'현실의 료헤이'에서 '판타지의 바쿠로'.(바쿠를 비현실적 인물로 해석하기보다는 비현실의 환유로 읽어내고 싶은 것) 그래서 얼핏 두 장면은 <해피 아워>가 고집스럽게 계속 이어온 318분의, 나아가 하마구치 류스케가 만들어 온 슬로 무비(slow movie)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사코>는 아사코(카타니 에리카)가 수년 동안 쌓아온 료헤이와의 시간을 뒤로하고, 돌아온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사코는 그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당황스러운 결정을 하고도 다시 료헤이에게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 하마구치 류스케가 쌓아오는 시간은 현실에서 판타지로 가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놓고 온 현실의 시간이 언젠가는 우리를 잡아당긴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의 영화는 그 순간을 위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판타지의 시간에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 이것이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라면, 그는 <해피 아워>의 첫 장면에서부터 이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일상에서 벗어나 소풍을 하러 가는 그들의 목적지는 산 정상이라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면 그들은 각자의 현실로 돌아간다. 간호사인 아카리는 병원으로 출근을 하고, 주부인 사쿠라코는 가족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며, 후미는 워크숍 관련 미팅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집으로 간다. 병원이라는 공간, 가족이라는 관계, 결혼이라는 계약. 이것들은 사회 속 여성으로서 삶(현실)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운명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이 1박으로 온천 여행을 가는 것은 전차를 타고 산 정상에 오르는 장면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에서, 가사에서, 남편에게서 멀어진 판타지의 시간.

 

ⓒ 트리플픽쳐스
ⓒ 트리플픽쳐스

하지만 그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카리는 직장에서 부하직원과 갈등을 일으키다 골절상을 입고, 사쿠라코는 여자 친구를 임신시킨 아들의 사건을 시작으로 가족 내의 균열을 마주하고, 후미는 코즈에와 묘한 기류를 갖고 있는 남편을 의심하면서 혼자서 분을 삭인다. 판타지의 시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이전처럼 현실에 동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바꾸어 놓았을까. 이들을 현실이란 운명에서 떨어지게 한 사람은 준이다. 남편과 이혼 소송 중인 준은 온천 여행을 끝내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로 돌아가지 않는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버스를 탄 채 사라져 버린다. 준이 만들어낸 현실의 균열. 그 균열로 인해 아카리는 부하직원과의 화해를, 사쿠라코는 우연히 다시 만난 젊은 남자와의 외도를, 후미는 남편과의 이혼을 선택한다.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다시 돌아온 판타지를 껴안고,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내려놓는다.

이런 선택의 과정은 과연 첫 장면에서 어떤 부분과 대응될 수 있을까. 아마 산 정상에서 전차를 타고 다시 내려오는 장면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그 장면이 어떻게 찍혔는지 떠올려보자. 카메라는 전차의 밖으로 지나가는 숲들을 바라보고 있다. 정상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을 오즈 야스지로의 대화 씬처럼 찍혔다고 가정한다면, 지나가는 숲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분위기를 환기하는 커버리지 혹은 누군가의 시점 숏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차가 내려갈 때, 현실의 균열 속 서로 다른 선택을 할 때. 숲을 바라보고 있는 자는 누구일까. 현실에서 이탈할 것임을 결심한 준의 시선이었을까. 서로의 현실에 부딪혔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두의 시선이었을까.

이 글에 자주 등장한 것처럼 <해피 아워>는 결국 '시간'의 영화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 전체의 구조를 통해 직조해내기보다는 시간을 통해 살에 맞닿는 구체로 체험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판타지의 시간에 머물 것인가, 현실의 시간을 버틸 것인가. <해피 아워>의 318분은 그들이 결국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것을 최대한 늘릴 수밖에 없는 그의 결정이다. 또는 '삶의 시간과 함께하는 영화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진정한 영화적 체험을 안기는 이 영화는 막이 내린 뒤에도 이들의 세계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할 것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트리플픽쳐스
ⓒ 트리플픽쳐스

해피 아워
Happy Hour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Hamaguchi Ryusuke

 

출연
타나카 사치에
Tanaka Sachie
기쿠치 하즈키Hazuki Kikuchi
미하라 마이코Maiko Mihara
카와무라 리라Kawamura Rira

 

수입 영화사 조아, 트리플픽쳐스
배급 트리플픽쳐스
제작연도 2015
상영시간 328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1.12.0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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