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십개월의 미래' 등을 떠미는 곳과 짐을 지우는 곳 사이에서
[신년기획] '십개월의 미래' 등을 떠미는 곳과 짐을 지우는 곳 사이에서
  • 배명현
  • 승인 2022.01.1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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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예술영화 비평 특집 ①

<코아르CoAR>가 2022년을 맞아 신년기획으로 '한국 독립·예술영화 비평 특집'을 준비했다. 이번 특집은 OTT시장의 급성장·코로나19 장기화 속에서 어렵고 힘들게 개봉한 한국 독립·예술영화들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코로나 19 확산 이후 현격히 줄어든 관객수와 한국영화 실질개봉편수, 지난 2년 동안 우울한 극장가의 빈자리를 꿋꿋이 버티며, 관객들의 발걸음을 기다린 한국 독립예술영화들 중에는 과연 어떤 작품이 있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특집의 첫 번째는 남궁선 감독의 <십개월의 미래>(2020)로, 갑작스레 자신이 임신 10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프로그램 개발자 29살 최미래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배명현 기자는 임신을 사건이 아닌, 한 대상의 감정 혹은 단어가 품고 있는 '공포'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바라본다. 그는 공포(임신)가 어떤 식으로 영화 속에서 자리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서, 영화 밖에 있는 관객인 우리에게 '그 공포를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하는지' 선택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주인공 '미래'의 미래를 점치도록 한다. 어쩌면 영화는 당신이 그려낼 '미래의 미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편집자 주]

 

'임신'이란 생물학적 태생이 남성인 내게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어떠한 형식으로든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는 것. 왜인가. 당연히 애당초 가능성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임신은 구체적인 그 무엇이 된다. 경험해보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십개월의 미래>는 그런 임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몸으로 이해해야 하는 영화. 이전까지 임신에 대한 영화는 많았지만(가장 최근 한국작품으로는 <애비규환> 정도), 그 초점은 임신을 경유한 '사건'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이를 보다 급진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임신에 대한 영화는 없었다'고.

그렇기에 <십개월의 미래>는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사건'이 아니라 '임신'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예기치 못한 임신. 완벽하게 안정적―경제, 정서, 양육 등―이지도 완벽하게 불완전하지도 않은, 누군가의 시선에선 '적절한 때'로 보일 수 있는 그 나이에 임신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임신은 이 영화 안에서 '공포'로 작동한다.

 

마크피셔는 그의 저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 한 것』(구픽, 2019)에서 으스스한 것을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질문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들과 관계가 있다. 아무 것도 없어야 하는 때에 어째서 무언가가 있는가?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때에 어째서 여기 아무것도 없는가? 죽은 자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 기억상실증 환자의 당혹스러운 눈―이런 것들은 버려진 마을 혹은 환상열석이 그러하듯 으스스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p.15)

마크 피셔의 정의가 타당하다면 <십개월의 미래>를 공포영화로 감상하는 독법 또한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없어야 할 나의 몸에 어째서 어떤 생명체가 자라고 있는가. 이는 에일리언 시리즈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의 '나'의 존재가 위협받는 상황 거기에 심지어 다른 부가적인 공격까지 들어온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예기치 못한 임신. 출산의 고통. 양육. 남편과 시부모. 시선. 책임. 사회. 직장. 나의 몸.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등등등. 이는 그동안 임신을 다루었던 공포영화의 독법과는 완벽하게 그 궤를 달리한다. 낳고 보니 인간이 아닌(소설 『로즈메리의 아기』, 아이라 레빈, 1967), 왜곡된 모성과 연결된 신체 훼손(영화 <인사이드>, 줄리앙 모리·알렉상드로 부스티요, 2007)와 같은 일방적 공포가 아닌, 여성의 삶과 임신이라는 표면 안에 내포되어 있는 현실 그 자체의 공포, 혹은 (관람자가) 포착해야 하는 공포라는 장르로서.

 

ⓒ 그린나래미디어

미래의 미래

<십개월의 미래>의 첫 쇼트는 하늘이다. 무거운 하얀 구름은 파란 하늘을 잡아먹을 듯 거대하고 파란색은 그 틈새로만 보일 뿐이다. 그와 상응하는 컷으로는 누워있는 미래(최성은)가 보인다. 미래는 어딘가 불편하지만 유야무야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남자들의 시끌벅적한 이야기가 들려오고 미래의 옆에서 친구 김김(유이든)이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아무런 긴장도 없을 것만 같은 이 풍경은 곧 하강의 이미지로 바뀐다. 미래가 계단을 통해 아래로, 아래로 걸어 내려간다. 오래된 건물에 키치하게 붙여놓은 계단은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답답하다. 이 느낌은 첫 쇼트인 하늘과 대조를 이루기에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그 하늘조차 구름이 화면에 가득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아마 대조인 동시에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층에 도착한 미래는 낡은 차를 타고 이동한다. 그리고 도착한 집. 아파트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이다. 화면은 잠시 블랙 아웃이되고 'home(s)'이라는 글자가 뜬다.

이 첫 시퀀스에서 느껴지는 지배적 이미지는 '불안의 시각화'이다. 서른이라는 나이(바로 다음 시퀀스의 시작부터 '이제 네 나이를 생각하라'며 타박하는 아버지의 말에 미래는 집에서 나와 자신의 애인의 집으로 향한다)는 통속적으로 표현되는 '현실적' 삶과 지향하는 삶의 방향의 어긋남, 불일치가 느껴진다. 그 목표점이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답답함과 막연한 두려움을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다. 영화의 첫 시퀀스가 그 영화의 전체를 암시 혹은 축약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 시작은 그 후의 이야기인 임신과도 연결된다. 미래는 약국에서의 대화를 통해 불안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다음 쇼트는 공중화장실로 보이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얼굴을 구긴 채 좌우를 둘러보는 미래의 모습에서 영화는 장르를 바꾼다. 음악은 어딘가 유쾌하지만, 그 유쾌함 때문에 오히려 기이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미래는 임신테스터기를 하나씩 내민다. 총 열다섯 개의 임신테스터기를 김김에게 들이밀며 미래는 말한다. "무서워"

 

ⓒ 그린나래미디어

미래는 자신의 무게조차 온전하게 지탱하지 못하는 상황에 다른 생명의 무게까지 얹혀졌다. 이 생명은 왜 있는가. 심지어 그 어떤 가능성조차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 시작조차 불확실함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한다. "이게 무슨 외계에서 침공한 악마의 씨 같은 건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제가 외계인이라도 낳아서 지구가 멸망이라도 하면 그건 법적으로 어떻게 책임져요?"라고 말하는 미래. 이다음부터 그녀는 시간과 싸움에 돌입한다. 아니, 다시 말해야겠다. 싸움이 아닌, 일방적이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한다.

<십개월의 미래>의 긴장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은 '시간'이다. 미래는 11주 차에 임신 사실을 알았고, 13주 차에 아이를 왜 낳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서 병원 코디네이터가 '생각을 하면 시간이 사라진다'라고 말한 것은 일종의 선언으로 작용한다. 이후의 러닝타임은 미래에게 살인적인 압박으로 밀려들어 온다. 이때 한 주가 갈 때마다 블랙 아웃된 화면에 화이트 폰트가 얹어지는 단절 효과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임신 그 자체는 단일 서사가 아닌 여러 복합적인 문제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엮어 들어가는 그 어떤 것으로 느끼게 작용한다. 시간은 미래를 고통스럽게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래의 선택을 고통스럽게 한다. 생각을 해야 하지만 그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생명체는 시간을 먹으며 자라난다. 생각을 할수록 생명체는 자라난다. 그 생명체는 왜 여기에 있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고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계속 자랄 뿐이다. 몸 안에서.

 

ⓒ 그린나래미디어

 

결국, 미래는 하나의 거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아이를 낳는 것. 그 선택이 어쩔 수 없는 혹은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든 자포자기의 심정이든, 그 무엇이었든 미래는 그 선택을 함으로써 아이에게 고백한다. '이 선택에 어떤 의미를 담을지'에 따라 이 영화의 결말은 완벽하게 달라질 것이다. 공포 끝에 만난 희망의 긍정,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모종의 연대일 수도 혹은 이 사회가 다시 어떤 끔찍한, 그러면서도 책임지는 이 없는 적극적인 가해를 감당해야 할지. 그것은 관객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 같다.(물론 전자이기를 희망하긴 하지만...) 

『미래의 미래』라는 이 글의 소제목은 그렇기에 여기서 더 빛을 낸다. 이 해석은 우리의 현실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서 이야기되는 시간은 2019년임을 고려해 볼 때 낙태가 불법(이지만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그래서 그 처벌과 무게는 온전히 아이를 가진 당사자에게 지워져 있던 때)이었다. 아직도 생명과 몸의 선택이란 문제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긴 하지만, 법적으로라도 불법이 아니게 된 이 자리에서 이 영화의 결말은 조금 더 낙관적인 미래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모 방송인의 비혼모임을 주체적으로 공개하며 방송에서도 점차 이를 비추고 있다. 한 발자국의 진전과 그 발자국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지하며 낙관을 바랄 수 있는 방향으로 오늘이 나아가는 것. <십개월의 미래>는 오늘의 한국의 기준점을 다시금 측정하게 한다. 그 때문에 이 영화의 진짜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2021년 '한국의 몸'을 기록하는 이 영화는 다음해 그리고 그다음 해로 이어진다. 아직 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를 기록하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 그린나래미디어

십개월의 미래
Ten Months
감독
남궁선

 

출연
최성은
백현진
서영주
유이든
권아름
손성찬
김근영
오태은
송경의

 

제작 K'ARTS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9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10.14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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