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시, 카메라 저편에서 생명을 얻다
[interview] 시, 카메라 저편에서 생명을 얻다
  • 홍상현
  • 승인 2021.12.2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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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하루하라상의 리코더> 스기타 교시 감독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 직전 스기타 교시 감독에게 마르세유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안겨준 작품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 직전 스기타 교시 감독에게 마르세유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안겨준 작품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열세 살에 시를 짓고 문학서적을 탐독했으며, 열여덟 살이 되면서부터 문단의 기대주로 부상했던 이력은 차라리 평범하다. 그의 진가는 스무 살 무렵 '지적 모험'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시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살아가는 동안 발휘되었다. 절필을 한 게 아니다. 당시를 기점으로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논문을 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구가 이어지는 방대한 저술의 일부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 수많은 세계문화유산을 남긴 인류사의 천재를 못지않은 통찰력으로 해부한 명저다.

폴 발레리 이야기다. 미의 세계를 창조하는 기하학자요 건축가며 지성인으로 칭송받는 이 프랑스 문호를 떠올린 건, 시의 성격에 관한 언명 때문이다. 발레리는 시와 산문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전자를 무용에, 후자를 보행에 비유했다. 산문은 보행과 같이 명확한 하나의 대상을 가지고 어떤 대상을 향한 한 행위로서 그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 시는 무용과 같이 그것도 행위의 한 체계이기는 하지만 도리어 그 행위 자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구로사와 기요시, 스와 노부히로 등 거장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스기타 교시 감독은 현재 대안학교인 다이나고야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C)Genuine Light Pictures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구로사와 기요시, 스와 노부히로 등 거장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스기타 교시 감독은 현재 대안학교인 다이나고야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C)Genuine Light Pictures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은 맡은 스기타 교시 감독이 단가(thirty-one syllables'poem)로부터 모티브를 얻었음을 천명하는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위에서 발레리가 언급한 시의 특성을 충실히 구현한다.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구로사와 기요시, 스와 노부히로 등 거장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 한국과는 두 번째 장편독립영화 <빛의 노래>가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인연을 맺은 스기타 감독에게 마르세유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안긴 이 영화는 주인공의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별다른 연결고리 없이 그저 펼쳐놓을 뿐이다.

주인공 사치(아라키 치카 분)는 화랑을 그만둔 뒤 변두리 동네로 이사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 살게 된 아파트의 옛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을 맞는다. 어느 날 숙모가 집으로 찾아오고, 이 사실을 모르는 삼촌도 사치의 집을 방문하지만 단순한 우연일 뿐이다. 스기타 감독은 이 모든 행동의 동기를 밝히지 않고 순차적으로 나열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관객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사의 행간에서 배어 나오는 사람을 배려하고 위로하며 아끼는 마음에 젖어든다.

갑작스러운 비극을 매개로 만난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하나의 노래>, 말하기 힘든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가는 세 소녀의 일상을 그린 <빛의 노래>로 이어지는 '노래 시리즈'를 그리움 가득한 여름날의 삽화(<하루하라상의 리코더>의 원제는 <하루하라상의 노래>이다)로 마무리한 스기타 감독을 만났다.

 

스기타 교시 감독은 두 번째 장편독립영화 「빛의 노래」(사진)가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C)Genuine Light Pictures
스기타 교시 감독은 두 번째 장편독립영화 「빛의 노래」(사진)가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C)Genuine Light Pictures

홍상현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빛의 노래> 이후, 3년 만의 신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셨습니다. 특히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코로나 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데요.

스기타 교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일은 지금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명감독에 불과하던 제 작품을 많은 분들이 보러 와 주셨고 열띤 분위기에서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되었죠.

그밖에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었는데요. 카페에서 우연하게 인사를 나누게 된 어느 연세 드신 남성분께서 영화를 보러와 주시고, 그날 저녁 술자리까지 동석하게 되었던 일입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광주 출신으로 5ㆍ18 민주화운동 경험자이셨습니다. 당시의 경험을 차분한 어조로 들려주시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홍상현

무척 강렬한 경험이셨겠네요.

스기타 교시

그렇죠. 만난 지 얼마 안 된,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온 저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셨던 마음의 크기ㆍ깊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라도 꼭 다시 한번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초청도 너무 기뻤고요. 코로나 19 때문에 오프라인 참가는 어려웠지만요.

<하루하라상의 리코더> 출연자 중 한 친구가 한국에 살고 있는데. 상영광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었거든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신 걸 보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아울러, 이런 한국 관객 여러분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차기작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의도 다졌고요.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주인공의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별다른 연결고리 없이 그저 펼쳐놓을 뿐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주인공의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별다른 연결고리 없이 그저 펼쳐놓을 뿐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홍상현

부산국제영화제 남동철 프로그래머는 이번 작품을 "순하고 착한 버전의 홍상수 영화"라고 언급하기도 했는데요.

스기타 교시

그간 초청된 국제영화제 관객들의 감상평을 찾아 읽었는데요.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셨던 관객 분들은 남 프로그래머의 코멘트 때문인지 아무래도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와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비교하시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또 홍상수 감독 영화를 워낙 좋아하거든요. (웃음) 학생들을 가르칠 때(그는 대안학교인 다이나고야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친다. ※ 주) 작품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따로 소개를 해 줄 정도로요. 그런 홍 감독의 영화에 빗대어 이야기를 해주시다니 저로서는 정말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지요.

다만, 홍 감독의 영화에서는 종종 대화극(dialogic play)의 요소가 강한 부분이 등장하는데,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그런 장면이 거의 없고, 영화적 시간의 연결방식 등 차이점도 많은지라 연관을 지어주신 게 좀 놀랍기도 했습니다. 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공통점을 찾아주신 거니까요.

 

홍상현

대화극에 관한 말씀을 하시니 생각이 나는데요. 지금까지 발표하신 세 편의 영화가 모두 '언어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의 범주를 넘어서는 서사를 중심에 두고 있었는데요.

스기타 교시

저는 영화가 무성영화 시대부터 바로 '말할 수 있는 무엇'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들을 시각화함으로써 발전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무성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었잖아요. 그래서 자막으로 대사를 전달했지만 한계가 있어서 결국 토키가 등장하게 된 거죠.

물론 카메라가 사람의 내면ㆍ마음까지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고자 할 때, 사람들은 신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요. 시선의 미세한 흔들림도 그 하나일 수 있고,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든지 반대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변화들은 카메라로 얼마든지 기록이 가능하죠.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바람을 직접 찍을 수 없지만, 그로 인한 호수면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실제성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화사 초기와 비교하면 실로 눈부신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이루어져 있는 오늘날에도 감각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영화적 표현의 근간입니다. 저 역시 이와 관련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고요. 그러니 그 흔적이 작품에서도 당연히 나타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스기타 교시 감독은 영화 속 행동의 동기를 밝히지 않고 순차적으로 나열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관객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사의 행간에서 배어나오는 사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며 아끼는 마음에 젖어든다. (C)Genuine Light Pictures
스기타 교시 감독은 영화 속 행동의 동기를 밝히지 않고 순차적으로 나열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관객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사의 행간에서 배어나오는 사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며 아끼는 마음에 젖어든다. (C)Genuine Light Pictures

홍상현

다음 주제는 원작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대단히 짧은 시인 단가를 원작으로 합니다. 그런데 예전 인터뷰에서 이 단가와 영화가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셔서 흥미로웠는데요.

스기타 교시

그렇습니다. 이 기회에 다시 말씀드리자면, 정확하게는 31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단가는 영화와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요. 한 인물의 기나긴 삶 속에서 어느 해, 어느 날의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그린다는 점에서요.

영화는 한 인물의 어느 해, 어느 날의 한 순간을 몇 번 정도 반복하고, 그렇게 모인 순간들을 이어 붙여서 완성됩니다. 인생 속 시간의 프레임을 잘라, 최대한 세심하게 건져내는 거죠. 단 한 번의 순간이냐, 그 이상의 순간이냐 하는 건 중요치 않아요.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게 몇 초이든, 대략 90분 정도이든 큰 차이가 없거든요. 중요한 건 여기 인생이 있다는 점 아닐까요? 그러니 어디를 잘라내든 상관이 없고요. 인생은 꿈쩍도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물론 어디를 잘라낼지를 선택하는 데는 창작자의 인생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요.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도 마찬가지였고요.

 

홍상현

그밖에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의 스토리텔링이 갖는 또 한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요. 주인공의 일상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관조하는 느낌으로 다가간다는 겁니다.

스기타 교시

영화를 만들다 보면 항상 실감하는 일이지만, 중요한 것들은 모두 카메라 저편에 있습니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감독은 물리적으로 카메라의 옆이나 뒤에 머물러 있을 뿐이죠. 이건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마찬가지인데요. 다만 그런 순간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응시하는 거죠. 렌즈 너머의 세계를.

스토리는 하나의 정보죠. 정보란 컨트롤하기 쉽습니다. 아울러,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이 세상을 관리하는 데 있어 무척 유용하지요. 경찰관이 거리의 행인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에요. 관리를 위해서 우선은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거리에서 맞닥뜨려 말을 걸게 되기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날 아침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은 신분증에 적혀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생 자체를 관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영화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분증처럼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작품의 스토리 또한 정보일 수 있으니까요. 금방 말씀드린 것처럼 컨트롤하기 쉽다 보니까 이래저래 끼워 맞추고 싶어지죠.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31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인 단가가 원작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31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인 단가가 원작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홍상현

그런데 한편으로 또 경찰관이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행인의 삶과 같은 부분도 있을 수 있겠네요. (웃음)

스기타 교시

바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제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라 할지라도 그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제게 미지의 존재들인 거지요. 완전히 독립된 세계에 있는. 그렇다 보니 등장인물의 대사를 써놓고 혼자 '아, 이 사람! 어떻게 이런 말을 하지?'하면서 놀라는 순간이 있어요. 이렇게 태어난 시나리오를 놓고 촬영을 진행하는 현장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뭘까요? 카메라 옆에서 그 '미지의 존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응시하는 겁니다.

 

홍상현

단순한 '작업의 결과물'을 넘어선 '생명체'로서의 창작물이라.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다음 주제인데요. 전반적인 분위기를 생각할 때 조금 생뚱맞은 것 같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서사적 긴장감을 더해주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희극적 표현 또한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의 매력 아닐까 하는데요.

스기타 교시

현실 세계에서도 희극 같은 일들은 언제나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나죠.

다소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르겠지만 더러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유족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잖아요. 그렇다고 그분들이 고인을 애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우울한 사람들이라고 내내 우울해하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고요. 더없이 즐거운 상황 속에서 예상치 못한 쓸쓸함이 찾아오기도 하잖아요. 이런 '불균형 현상'은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스기타 교시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묘사하지 않는다. 관조하는 느낌으로 다가갈 뿐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스기타 교시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묘사하지 않는다. 관조하는 느낌으로 다가갈 뿐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홍상현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에는 사람들의 화상이나 동영상을 기록하는 신이 몇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 함의가 궁금한데요.

스기타 교시

시나리오를 쓸 당시만 해도 왜 그런 신이 반복되는지 저도 몰랐습니다. 그러다 촬영을 하는데 느껴지더라고요. 영화를 다 만들고 나서 이 부분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 볼 기회도 있었고요. 주인공인 사치가 주변 사람들에 대해 '내내 그저 지나치다 보면 그냥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렌즈를 들이대고 있었던 것 아닐까 합니다.

 

홍상현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에서는 더는 만날 수 없는 사치의 파트너 '유키(니베 미나코 분)'가 환영(illusion)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요. 별다른 효과 없이 건조하게 표현됨으로써 오히려 극적인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 같습니다.

스기타 교시

그녀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파악해서 어떤 촬영기법으로 표현하면 좋을지 사전에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직접 등장하는 신을 촬영하는 현장에 가야만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실제로도 그랬지요. 사치가 살고 있는 걸로 설정된 방에 아라키 배우가 있고, 거기 유키 역을 맡은 니베 배우가 함께 서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 장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가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구체적인 영상언어를 지정한 건 아니었고요. 그냥 다른 작품에서 두 사람의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을 표현하는 촬영의 방식을 따라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해서, 일반적인 카메라워크 등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면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런 제 심리상태가 간절히 원하지만 결코 유키를 다시 만날 수는 없는 사치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에서는 더는 만날 수 없는 사치의 파트너 유키(사진)가 환영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스기타 교시 감독은 그를 별다른 효과 없이 건조하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극적효과를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거둔다. (C)Genuine Light Pictures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에서는 더는 만날 수 없는 사치의 파트너 유키(사진)가 환영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스기타 교시 감독은 그를 별다른 효과 없이 건조하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극적효과를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거둔다. (C)Genuine Light Pictures

홍상현

그런 의도에서 이루어진 촬영이라면 결과가 충분이 성공적이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은 연기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죠.

주연을 맡은 아라키 치카 배우가 마르세유국제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하셨는데요. <하루하라상의 리코더>가 데뷔작이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랐습니다.

스기타 교시

아라키 배우는 소극장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제가 예전에 출연작의 기록영상을 담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만난 게 전작인 <빛의 노래>가 개봉했을 무렵이었어요. 영화를 보러 와주었죠. 로비에서 저한테 말을 건네는데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커다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는데 간신히 웃고 있는 눈만 보이더라고요.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물으니 악골(jawbone)에 생명에 지장이 있을 만큼 문제가 생겨서 큰 수술을 받았다는 거예요.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상황에서, 극심한 통증을 참아가며 제 작품의 상영관에 와 주셨던 겁니다. 이후로도 반년 동안이나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완치하시고 나면 축하하는 의미에서 당신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작품을 만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실현한 아라키 배우의 '완치 축하 선물'이 바로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아라키 배우의 스크린 데뷔작이었다는 것과 관련한 코멘트를 하면, 저는 도리어 그 점이 감사했습니다. 영화 출연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카메라가 어디 놓여 있고, 어떤 사이즈로 촬영하는지 등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사치가 되어 현장에서 함께해주었으니까요.

 

홍상현

"사치가 되어 현장에서 함께해주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캐스트들에게 어떤 디렉션을 하셨는지가 궁금해지는데요.

스기타 교시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의 캐스트 여러분은 대단히 정성스럽게, 시나리오에 적혀 있는 그대로의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현장에서 액션이나 대사에 약간씩 수정이 가해지기도 했지만 말이죠. 특히 결말부에 사치의 방에 찾아와 같이 노래를 부르는 '유키코'로 분한 노지마 미즈호 배우는 조금의 즉흥연기도 없이 각본에 적어놓은 대사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않게 말해주셨어요.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를 만들기 전까지 저는 항상 캐스트의 절반은 직업 연기자, 나머지 절반은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분들로 채워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코로나 19 때문에 연기를 업으로 하지 않는 출연자 분들을 모실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배우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치의 방에 있는 벽장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촬영하는데 리얼함에 몰입되어 저도 모르는 새 울고 웃으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더라고요. 물론 저는 어떤 지시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카메라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그저 즐기고 있었던 거지요.

 

“중요한 것들은 모두 카메라 저편에 있습니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감독은 물리적으로 카메라의 옆이나 뒤에 머물러 있을 뿐이죠. 이건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마찬가지인데요. 다만 그런 순간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응시하는 거죠. 렌즈 너머의 세계를.”스기타 감독의 말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중요한 것들은 모두 카메라 저편에 있습니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감독은 물리적으로 카메라의 옆이나 뒤에 머물러 있을 뿐이죠. 이건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마찬가지인데요. 다만 그런 순간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응시하는 거죠. 렌즈 너머의 세계를."스기타 감독의 말이다. (C)Genuine Light Pictures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코로나 19로 우리 가까이에서 슬픈 일들이 이어지고 더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얼굴을 맞대기 힘들어진 괴로운 나날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면서 조금이나마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서요. 예전에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일수록 타인에게 전해지기 쉽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런 맥락에서 이 작품도 여러분의 삶과 맞물리며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와 작품을 보러 와 주신 관객 여러분, 아울러, 영화를 보셨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제 인터뷰 기사를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언젠가 제가 만든 또 다른 작품으로 찾아뵙고 집접 인사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스기타 감독은 최근에 일어난 모든 비극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보다 절실하게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에 임할 수 있게 만들어준 요인 역시 ― 아이러니하게도 ― 코로나 19였다고 첨언했다. 지금껏 발표한 모든 장편 독립영화의 촬영을 맡았던 파트너, 이오카 사치코 촬영감독이 힘겨운 현실에 위축되어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주 4회 촬영, 심야 촬영 금지'라는 조건까지 내걸어 설득했단다. 이렇게 '노래 시리즈'를 마무리하고 장편상업영화 크랭크인이 예정되어 있는 내년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음에도 억지로 붙들려하는 게 아니라 거절의 이유에 겸허히 귀 기울이던 프로듀서의 태도에 감독 제안을 수락했다는 신작이 기대된다. 물론 먼저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의 국내 개봉이 순서겠지만.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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