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BEST] 함께 영화를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2021 BEST] 함께 영화를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 김민세
  • 승인 2021.12.23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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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김민세 영화전문기자

2021년은 어느 때보다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스크린에 걸린 많은 영화를 보지 못한 해였다. 그럼에도 극장 스크린 위로 맺히며 뇌리에 박힌 선명한 이미지들이 있기에 기억을 붙잡는다는 생각으로 올해 본 영화들을 되돌아보았다. 해당 글은 굉장히 사적인 리스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혹시 이 글을 읽다가 반문이 드는 순간이 있다면 주저 말고 각자의 의견을 펼쳐주길 바란다. 물론 필자는 선정한 영화들을 최대한 변호하려 노력할 것이다. 함께 영화를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BEST FILM OF 2021

1. <해피 아워 Happy Hour>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 | 2015

ⓒ 트리플픽쳐스
ⓒ 트리플픽쳐스

영화는 어떻게 삶을 담는가. 나아가 삶의 시간을 함께하는 영화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수많은 대사들이 난무하는 수십 분의 씬들 사이에서도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씬들이 이루는 318분의 시간 동안 한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네 명의 친구들이 함께하는 시간, 그럼에도 돌아가야 하는 현실의 시간. 그 시간을 견디다 보면 영화를 전체 구조적으로 읽으며 파악하기 이전에 가장 살에 맞닿는 구체로써 그들의 시간을 체험하게 된다. 진정한 영화적 체험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들의 세계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

 

2. <자마 Zama> 루크레시아 마르텔Lucrecia Martel | 2017

ⓒ 엠엔엠인터내셔널

역사의 시간 속에서 스러지는 자마의 육체와 영원한 대자연의 풍광. <자마>가 주는 당혹감은 우리가 그 둘 중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의 서사를 전복하는 주변의 서사. 제국주의의 눈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 시간에서 탈피함으로써 승리의 엔딩에 감탄할 것인가. 썩어가는 자마의 몸이 실려 있는 보트가 열대 우림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마지막 장면을 보다 보면, 그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이미지에 감탄하게 되다가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3. <아빠의 천국 Go Get Some Rosemary> 조쉬 사프디Josh Safdie, 베니 사프디Benny Safdie | 2009

ⓒ 영화 '아빠의 천국' 스틸컷

지금의 사프디 형제는 <굿타임>(2017), <언컷 젬스>(2019) 등의 영화들로 인정받으며 뉴욕에서 가장 핫한 감독이 됐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장르라는 틀에 갇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과소평가되거나 오해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의 단초가 된 것이 <아빠의 천국>이다. 감독의 유년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만들어진 이 자전적인 영화는 사프디 형제의 영화를 새롭게 읽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 믿는다.

 

4. <퍼스트 카우 First Cow>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 2019

ⓒ 영화사 진진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들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나약한 인간들 뒤에 무색하게 서있던 자연과 풍경. 그 거대한 풍광에 압도되어 무력감을 느끼던 때에 새롭게 찾아온 <퍼스트 카우>는 모든 의미에서 전복의 영화이다. 자본주의 역사의 다시 쓰기, 혹은 말하지 않는 자연에서 우정과 교감의 자연으로의 전복. 그런 의미에서 강 위를 미끄러지는 작은 배와 함께 오리건에 도착하는 암소의 이미지는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다. 그 변화에 무한한 지지를 보내며 그의 전작들 또한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5. <피닉스 Pheonix> 크리스티안 펫졸트Christian Petzold | 2014

ⓒ 엠엔엠 인터내셔널

익히 알고 있는 시대의 비극을 가장 개인적이면서 시대적인 딜레마와 아이러니로 다시 쓴 펫졸트의 사려 깊은 멜로 드라마이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혼란스러운 독일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는 넬리라는 인물은 '말'로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독일 군인들이 기어이 붕대를 벗겨서 보고야 만 그의 얼굴이다. 말하지 않고 단지 서있는 존재의 증명. 그것이 펫졸트가 <피닉스>라는 '예술'을 통해서 전달하려 하는 메시지이다.

 

6.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The Wind Will Carry Us>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 | 1999

ⓒ MK2 Productions

죽음을 기다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와 삶을 선물하는 왕진 의사가 함께 오토바이를 타면서 같은 시를 읊을 때. 바람에 날리는 갈대밭에서 그곳에 영원히 있을 것 같은 자연이 보일 때. 그리고 이 장면을 더 이상 분절의 쇼트로 담지 않는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이 놀라운 합일의 순간.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오랜만에 극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함께했던 올해의 가장 기이한 영화적 체험이었다.

 

7. <호수의 이방인 Stranger by the Lake> 알랭 기로디Alain Guiraudie | 2014

ⓒ Les films du Worso

다시 온 기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실수하고 실패하는 인간들. 알랭 기로디는 동성애자들이 모여드는 호수라는 공간을 통해 현실의 도피처인 판타지적 욕망의 공간을 그려낸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아무런 일 없던 듯이 호수를 찾는 게이들의 행동,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고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프랑크의 심리는 사랑으로 대표되는 욕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헤매는 우리 모두의 모습과 닮았다. 더불어 호수의 선명한 율동의 이미지는 좀처럼 잊히지가 않는다.

 

8. <티탄 Titane> 쥘리아 뒤쿠르노Julia Ducournau | 2021

ⓒ 영화특별시SMC

단순한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의 방식. 무엇을 보았다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기괴한 이미지의 향연들. 이분법의 세계 속에서 경계가 지워진 사람들. 그들 사이로 떠오르는 이상하게도 명징한 메시지. 나는 이런 방법론들을 통틀어 결과적으로 <티탄>을 뒤쿠르노가 만들어낸 거대한 농담이라고 말하고 싶다. 제74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영화의 두드러지는 급진성에 당황스럽다가도 결국에는 '이것조차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9. <당신얼굴 앞에서 Infront of Your Face> 홍상수 | 2021

ⓒ 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의 영화에서 구조는 부차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다. <도망친 여자>(2020)와 <인트로덕션>(2020)에서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 사이의 거리였고, 육체의 미세한 각도였으며, 인물 간의 섬세한 터치였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낯설게 느껴진 앞서 말한 두 편의 영화들과 결을 같이하며, 구조와 다양한 세계의 층위를 지워낸다. 그리고 스크린 안에 배우 이혜영의 육체만을 담는다. 이 새로운 영화를 통해 홍상수는 우리에게 다시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변화하는 시네 아티스트로 우리에게 남아있을 것이다.

 

10.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레쥬 리Ladj Ly | 2019

ⓒ 영화사 진진

프랑스 문학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지는 위고의 소설 원작 제목을 그대로 썼다는 점에서 감독의 패기가 온전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패기의 근거는 무엇보다 첫 장면에서부터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찰, 소년, 관찰자, 혹은 기록자의 시선을 경유하며 순간을 포착하려는 카메라의 태도는 레쥬 리가 이 극영화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빈민가의 다큐멘터리를 찍었을지 떠올리게 만든다. 이 영화가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보편까지 나아가는 현재 진행형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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