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데타' 폭력과 성스러움: 신화는 어떻게 가공되는가
'베네데타' 폭력과 성스러움: 신화는 어떻게 가공되는가
  • 이지영
  • 승인 2021.12.22 13: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뷰] "순수한 성스러움이라는 신화"

성모를 상징하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성모상에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도적 떼가 들이닥친다. 도적은 칼로 소녀 어머니의 금목걸이를 낚아챈다. 목걸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라는 아이의 순수한 외침에 화답하듯, 나무가 흔들리면서 새의 배설물이 도적의 한쪽 눈에 떨어진다. 순간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목걸이를 돌려준다. 신이 아이를 통해 행한 기적의 내용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떠나서,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한 이들은 아이의 '순수한 성스러움' 앞에 무력으로 갈취한 것을 다시 내놓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강력하고, 타인의 의지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힘은 언제나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순수한 성스러움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신이라는 말보다 덜 신화적이지만 또 달리 보면 그보다 더 신화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제 희생물의 흔적들을 제거하여 모든 성스러움에는 항상 희생물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2000, 김진식-박무호 옮김, 민음사, p.390)

프랑스 학자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순수한 성스러움의 이면에는 언제나 희생양이 존재하고, 신화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희생양들의 흔적은 사라진다. 이 점을 상기할 때, 우리는 '성녀 베네데타'라는 신화가 만들어지기까지 그 서사 속에서 희생된 대상들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인 차원의 '희생'으로는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가 수녀원에 입성하자마자 가족이 지불해야하는 기부금을 들 수 있다. 실리에 밝은 펠리시타 원장수녀(샬롯 램플링)는 부유한 베네데타의 아버지와 딸의 몸값을 능숙하게 흥정한다. 종교적인 형식을 갖췄으나 지극히 세속적인 거래가 성사된다. 반면 천민 출신인 바르톨로메아(다프네 파타키아)가 수녀원으로 도망쳐왔을 때 그녀는 "수녀원은 자선단체가 아니다"라며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때도 베네데타의 아버지가 딸의 청에 따라서 바르톨로메아의 몸값 역시 지불한다. 즉, 펠리시타 수녀가 관장하고 있는 수도원은 누구나 관습에 따라서 암암리에 협상이 가능한 나름의 규율을 갖추고 있다. 베네데타가 성장하기 전까지, 이들 사회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희생이나 폭력 없이도 사회 질서는 언제나 유지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 팝엔터테인먼트

대의를 위한 희생, 그 폭력이 증폭되는 양상

18년 뒤 성인이 된 베네데타는, 신의 계시를 받기 시작하는데 이는 다소 드라마틱한 비전으로 제시된다. 특히 자신은 예수의 '신부'로서, 특히 섹슈얼리티가 있는 관계로 묘사된다. 이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나아가 성스러운 추앙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 준다. 한편으로 바르톨로메아를 향한 동성애적인 욕망은 뱀(사탄)의 유혹으로 현현한다. 이러한 비전들은 베네데타가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스크린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원장 수녀가 되기 전까지 마치 영매처럼 신의 뜻을 전하던 그녀는 이제 자의적으로(이를테면 크리스티나를 저녁 기도에 부르지 않는 장면) 신과 자신이 한뜻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대조는 이전 행적들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스스로 창조해낸 것이었다는 반증이며, 이러한 의심은 크리스티나(루이스 샤빌롯)의 입으로 주장된다.

이제 수녀원을 중심으로 번져가는 폭력의 양상들을 보자. 다시 한번 지라르를 인용한다면, 성스러움과 폭력은 그가 같은 장에서 인용한 외디푸스라는 혼종 괴물처럼 복잡다단하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스러운 것의 작용과 폭력의 작용은 같은 것이다. 민족학적 사고는 분명 성스러운 것 속에는 폭력이라는 말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잘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는 곧바로 성스러운 것 속에서, 다른 것 심지어 폭력과 정반대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덧붙일 것이다. 무질서 뿐 아니라 창조도 있다. 성스러운 것 속에는, 전문가들도 그 혼란을 풀기를 단념했을 정도로 이질적이고 대립적이며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아주 많이 있다.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2000, 김진식-박무호 옮김, 민음사, p.390)

폭력은 1차적으로 가장 취약한 대상인 바르톨로메아에게 가해진다. 베네데타는 예수를 직접 보았다는 고해성사를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며 신에게 고난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는 답을 듣는다. 다음 씬에서 베네데타는 실패를 실수로 빠뜨린 바르톨로메아에게 끓는 물에 손을 넣어 건지게 하는 벌을 주는데, 이것은 타인을 시험에 들게 하고 고난과 고통을 주는 것, 신성성과는 멀어지는 행동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베네데타는 어느 날부터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게 되고, 실제로 성흔을 얻기에 이른다.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으면서 원장 수녀 지위에까지 오른 그녀는 기득권인 펠리시타와 크리스티나의 견제와 의심을 받는다. 베네데타와 두 모녀는 광신도와 불신자라는 두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이며, 이들의 첨예한 대립은 페샤라는 도시에 거대한 위기를 몰고 오게 된다.

 

ⓒ 팝엔터테인먼트

위증을 해서라도 베네데타의 실체를 밝히려는 크리스티나는 수녀원 내 질서 유지와 규율을 중시하는 어머니(펠리시타)에게 부정당한다. 결과적으로 크리스티나는 스스로를 벌하며 몸을 채찍질하게 되고, 모욕감을 못 견딘 나머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를 희생하기에 이른다. 대의적으로는 베네데타를 위한 첫 번째 희생양이 탄생한 것이다. 크리스티나 수녀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신성성에 대한 의구심을 누구도 제시할 수 없게 되며, 전국적으로 페스트가 퍼지는 상황에서 성녀를 향한 대중의 믿음은 점차 맹목적이고 광신도적으로 변해간다. 딸의 죽음을 목격한 데서 오는 증오와 경멸, 복수심에 불타는 펠리시타는 교황 대사(랑베르 윌슨)를 만나 고발문을 들고 페샤로 들어오는 역공을 펼치고, 희생 제의는 그 뒤로 더욱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크리스티나에 이은 두 번째 희생양은 다름 아닌 베네데타의 연인인 바르톨로메아이다. 그녀는 처음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의 가축 무리 사이에 있다가 탈출한 만큼 인간 문명보다는 자연 상태에 가까운 인물이다. 생리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이기도 하고, 거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거나 글과 숫자를 모르는 등,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만큼의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기도 하다. 바르톨로메아가 아버지와의 근친상간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며 "내가 아니었다면 염소와도 했을 것이다"라고 증언하듯이, 그녀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도 인간이 아닌 짐승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다.

이렇듯 외지에서 들어온 이단아인 바르톨로메아와 베네데타가 가지는 성적인 관계는, 성과 속, 문명과 자연이 뒤섞이는 듯한 혼종의 느낌을 자아낸다. 이후 바르톨로메아는 연인과 있었던 신성모독 행위를 증언하기까지 끔찍한 고문을 받게 된다. 마치 제단 위에 바쳐진 한 마리의 짐승처럼 그녀의 육체는 고통으로 몸부림치지만, 베네데타는 딱히 애석함이나 비통함을 표현하지 않는다. 아마도 타인이 처한 고통 또한 신께서 예비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팝엔터테인먼트

민중이여, 죽음의 얼굴을 보라

앞서 우리는 크리스티나와 바르톨로메아라는 두 젊은 육체의 소유자가 신화를 위해 제단에 올려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전복시킬 역병, 페스트라는 거대한 천재지변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역병은 페샤라는 작은 도시의 입구까지 들이닥친다. 교황 대사와 펠리시타 수녀가 페스트로 병든 거리를 지날 때, 늙은 교구 사제의 부패한 육체가 처음으로 카메라의 시선에 들어온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가공할 만한―그러나 누구에게나 공평한―죽음의 힘과, 부패하는 육신에 대한 본능적인 메스꺼움을 체험하게 된다. 펠리시타 수녀와 교황 대사는 성 안으로 돌아와 신성모독을 벌인 베네데타를 공개 처형하기로 결정하고, 바르톨로메아라는 이단아를 추방하여 자신의 원래 지위를 복권하려고 한다.

그러나 마치 신 또는 운명의 장난처럼, 역병은 이를 집행하는 제사장들의 목숨부터 앗아간다. 부패한 노인들의 육체는 광장에 모인 대중에게 또 한 번 충격과 메스꺼움을 자아낸다. 눈앞에 보이는 '성흔'으로 입증된 성녀를 불길에서 구하는 대신, 두 사람을 대리 희생하기로 대중들은 합의한다. 페스트는 곧 이 공동체의 죽음을 뜻하므로, 교황 대사의 옷을 벗기고 가슴에 칼을 꽂는 행위는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의식으로 기능한다. 이때 교황 대사는 죽어가면서도 냉소를 던지며 진정한 세속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펠리시타 수녀는 죽음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두려움을 못 이기고 베네데타의 뜻에 따른다. 그녀는 스스로 화형대에 뛰어들어 병든 육신을 불로써 정화한다.

카오스를 피해 도시를 빠져나온 두 연인, 베네데타와 바르톨로메아는 이제 마지막으로 밝혀야 할 마지막 진실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명백한 가짜 성흔의 증거마저도 부인하면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서, 영원히 그녀의 진실에 가 닿을 수 없는 연인은 좌절하며 울부짖는다. 베네데타의 서사는 그녀가 바르톨로메아를 저버리고 한번 더 페샤로 돌아가서 평생을 수녀원에 갇혀 지냄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마지막 뒷모습에서 우리는 성녀와 이단아, 광인의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듯, 인간이 가졌던 신념은 한순간 쉽게 깨진다. 반대로 그 맹목적인 신념을 어느 누구도 깨지 못할 때 그는 신화, 또는 괴물이 된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팝엔터테인먼트

베네데타
Benedetta
감독
폴 버호벤
Paul Verhoeven

 

출연
비르지니 에피라
Virginie Efira
다프네 파타키아Daphne Patakia
샬롯 램플링Charlotte Rampling
램버트 윌슨Lambert Wilson
클로틸드 쿠로Clotilde Courau

 

수입 컴퍼니엘론
배급 팝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31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1.12.0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