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음에 관하여' 휴머니스트의 전시관
'끝없음에 관하여' 휴머니스트의 전시관
  • 이현동
  • 승인 2021.12.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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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끝없음'과 '끝있음'의 영원한 패러독스"

스웨덴을 대표하는 로이 앤더슨 감독은 첫 번째 작품인 <스웨덴 러브스토리>(1970)의 대대적인 성공과는 반대로 두 번째 작품 <길리압>(1975)의 흥행 참패로 인해 주로 광고 제작에 전념하면서,  무려 25년 동안 몇몇 단편을 제외하고는 장편 영화를 연출하지 않았다. 이후 제작을 위해 차린 회사 '스튜디오 24'를 통해 영화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았고, 끝내 인간 3부작(<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2000), <유, 더 리빙>(2007),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2014))을 통해 그가 건재한 시네아스트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불혹에 나이에도 '아직도 관객들에게 보여줄 것이 남았다'는 로이 앤더슨. 그가 <끝없음에 관하여>(2019)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 찬란

로이 앤더슨의 영화는 마치 인류의 역사, 삶을 다루는 전시회에 온 느낌을 준다. 그것이 박물관인지, 미술관인지 알 수 없는 형태의 공간, 어떠한 핍진성도 용납하지 않는 공간에서 의미는 부유하며 방황한다. 전시된 이미지의 절편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의 영화는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모호하게 비껴가며, 개인과 사회 사이에 혼재해있는 현상들을 불가역적 이미지로 그려낸다. 카메라 앵글은 정지된 채 (인물들의) 움직임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시각적 형태로만 꿈틀거리는 그의 영화는 그 경직성을 독창적으로 드러낸다. 또 건조하고 메마른 프레임의 질감은 로이 앤더슨이 박제한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는 도구다. 이를 드러내는 파스텔의 색감, 광각렌즈를 활용한 인물들과 배경 사이의 대비, 중첩되는 대사들은 그 자체로 엑조틱(Exotics)한 그의 고유한 패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없음에 관하여>의 오프닝은 서로 몸을 포개어 활공하는 두 남녀를 지시한다. 식별할 수 없는 표정과 몸짓, 웅대한 사운드트랙의 접합은 이미지의 정체성을 유보하며, 그 의미를 대중에게 이행한다. 로이 앤더슨의 작품세계에서 대부분의 쇼트가 이러한 방식이다. '물음'과 '물음' 속에서 생성과 소멸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방식. 그리고 종국에 형체를 감추는 방식.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보편적으로 고수해왔던 의미 발화의 형식을 분산시키고, 의도적으로 구축된 단락적인 쇼트들의 연쇄로 대중들의 지평을 스스로 창조하고 결정하게 한다. 이처럼 의미와의 거리 두기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다시금 불러온다.

누군가는 물어올 것이다. '이미지의 의미가 영화에서 명시화되어야 하는 대상이어야만 하는지', 이는 고다르의 말을 인용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오직 영화뿐이라 말할 수 있겠다. 로이 앤더슨의 영화는 플랑 세캉스(Plan-sequence)로 어떠한 편집도 개입할 수 없는 형태로 구현된다. 그 과정에서 허락하는 효과는 극히 제한되며 이미지는 재현의 역할로 강제된다. 고다르의 직설적인 말과는 반대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기법을 다른 형태로 구사하는 테오 앙겔로풀로스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을 떠올릴 때, (보이는) 공간의 깊이와 쇼트의 길이는 무한대로 확장되거나 축소되면서 영상이란 매체의 또 다른 가능성을 잉태한다.

 

ⓒ 찬란

또한, (고정된) 회화와 (움직임) 영화의 그 층위에서 로이 앤더슨의 영화는 자유로운 구성물로 존재한다. 인생 3부작에 이어 <끝없음에 관하여>는―주요 인물들 몇 명을 제외하고―서사의 흐름을 쫓아갈 수 없는 상태에 머문다. 먼저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이름이 아닌 고유명사로만 지칭된다. 한 남자, 한 여자, 한 청년, 한 연인, 한 아빠와 딸 등을 보았다는 것과 각각의 배경들을 감정 없는 어조로 설명하는 보이스 오버는 삶의 보편성이 특정한 대상에게 귀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오브제다. 로이 앤더슨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연기를 전문으로 하는 배우들을 섭외하지 않음으로써 영화로부터 향유하게 될 잠재적인 영향력들을 매설해 놓았다. 그들이 읊조리는 대사는 프레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내 바스러지고 소멸되는 소각의 언어와 같다.

<끝없음에 관하여>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언급되는 장면인 초반부 쇼트에서조차 대사를 하는 인물은 언급되지 않고, 친구 이름은 스벤커라는 인물의 정보만이 입술을 통해 전달된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건넨 인사말도 세월의 무상함 때문인지 아는 체도 안하는 스벤커는 끝내 그의 환대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주관적 샷이 침투해 들어와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이 남자는 누구인가. 이 영화의 사회자인 로이 앤더슨은 아닌가. 외로움과 고독이 주변을 횡횡할 때 이 영화는 인간 3부작에서 등장했던 몇몇의 유머와 상반된 이미지, 염세적인 이미지가 깃들어 있는 영화기도 하다.

 

ⓒ 찬란

인류의 구원자를 지칭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메고 구타와 조롱당하며 언덕을 올라가는 한 남자는, 꿈에서 깨어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신과에서 상담을 청한다. 그 남자는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목사로 밥벌이를 하는 정도로의 직업의식으로부터 초래된 현상이 아닌가를 의심한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믿음 없는 성찬의식을 행하면서 주체를 상실한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고백하지 않고, 다시 한번 정신과 상담을 요청한다. "믿음을 잃었을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의사를 향해 외치는 목사의 반복적인 어구 속 절망은, '믿음'이란 것이 의지로 교정될 수 없기 때문에 도래하는 절망이다.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앞에 두기 전까지도 무수히 생성되는 의문의 윤곽들. 그걸 우린 절망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는 영화를 통해 인생의 궤적처럼 이어진다. 

아까 상술했듯이 각각의 쇼트가 종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의 영화는 화면 밖이 더 중요한 영화가 된다. 인간 3부작도 그러하지만, 중간마다 인류가 자행했던 참혹했던 역사를 배치함으로써 로이 앤더슨의 영화는 계속해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끝없음에 관하여>에서는 장 폴 샤르트르의 『벽』(1939)을 연상시키듯이 보이는 사행 집행전의 과정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되고, 곧 무너질 듯이 보이는 건물 안에서 히틀러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수많은 패잔병들이 눈이 오는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장면들은 그 이후가 묘사되지 않는다. 문제가 생긴 자동차를 수리하는 마지막 장면에도 해결되지 못한 채 이 영화는 종결된다.  무한히 생성되는 인생의 의미를 우리가 피상적으로 파악할 수 '없음'으로 남겨두는 로이 앤더슨의 기발한 상상력이 동원된 <끝없음에 관하여>는 우리가 앞으로 떠날 삶이란 목적지에서 이정표를 남겨놓는다. 종식되지 않을 것만 같던 무한의 삶이 끝날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이 영화를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하지만 여행하기 위해서는 지도와 나침반이 있어야 하죠. 없으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를 테니까. 우리의 지도와 나침반은 우리의 전통이고 우리의 유산, 우리의 역사죠. 우리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린 어둠 속에서 헤맬 겁니다.", 영화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 中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찬란

끝없음에 관하여
About Endlessness
감독
로이 앤더슨
Roy Andersson

 

출연 
마르틴 세르너
Martin Serner
얀-에예 페를링Jan-Eje Ferling
토레 프뤼겔Thore Flygel
아니아 노바Ania Nova
타티아나 델레우나이Tatiana Delaunay

 

배급|수입 찬란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7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12.16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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