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탄'이라는 거대한 농담
'티탄'이라는 거대한 농담
  • 김민세
  • 승인 2021.12.2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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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이면서 A가 아닌, A이지만 A가 될 수 없는"

크레타섬 출신의 사람이 이런 명제를 던진다.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그리고 자신이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 맞춰보라고 한다. 만약 그가 거짓말쟁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므로 그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므로 그 역시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단순한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지만 적어도 이 가상의 상황에서 어떤 가정을 택하더라도 그는 거짓말을 하는 동시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서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를 꺼내든 것은 쥘리아 뒤쿠르노가 <티탄>(2021)을 통해 그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A이지만 A가 될 수 없는. 혹은 0이나 1이 아니라 0과 1 사이의 연속체로. 뒤쿠르노는 <티탄>에서 알렉시아(아가트 루셀)라는 경계가 지워진 인물을 통해 이 명제들을 반복한다. 알렉시아인 동시에 아드리앙이 될 수 있고, 여성인 동시에 남성이 될 수 있으며, 사람인 동시에 기계가 될 수 있다. 조금 비틀어 보자면 알렉시아지만 아드리앙이 되려고 하고 (혹은 아드리앙으로 여겨지고), 여성이지만 남성의 신체를 가지려 하고 (혹은 유사 아버지에 의해 남성이기를 요구되고), 사람이지만 기계를 지향한다.(혹은 사랑한다)

 

ⓒ (주)영화특별시SMC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따라가 다다른 결말부에서는 파격적인 이미지로 인해 혼란에 빠지다가도 왠지 모를 이상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혼란과 감동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뭐라 말하기도 힘든, 심지어 무엇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힘든 상황에 봉착한다. 주제의 측면에 있어서 <티탄>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럼에도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뱅상이 양수와 피를 대체한 오일에 뒤덮여 있는 알렉시아의 아이를 받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엔딩은 사랑이라는 말 외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불명확한 서사와 파편화된 이미지 사이로 떠오르는 이 명확해 보이는 메시지와 메타포를 이상하게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오히려 이 영화는 현대에 와서 사랑이라는 말로 다시 쓰는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 또는 서양 논리에 따른 이분법적 질서를 비트는 거대한 농담으로 다가온다.

 

<티탄>이 대상을 담는 새로운 방식

<티탄>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정해지지 않은 유희로써의 시선이다. 이는 어른이 된 알렉시아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의 롱테이크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다. 쇼걸로 일하는 알렉시아가 모터쇼에 입장하면 카메라는 알렉시아의 뒤를 쫓으며 그의 시선을 경유한다. 그러다 모터쇼 안의 다양한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더니 이내 차 위에서 춤을 추는 알렉시아를 성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찍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위로 높이 올라서서 알렉시아를 포함한 모터쇼 안의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주관적 시점에서 대상화의 시점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전지적 시점으로. 전작 <로우>(2016)에서도 얼핏 본듯한 이 롱테이크는 뒤쿠르노의 카메라가 다양한 시선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법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장면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알렉시아와 자동차의 첫 섹스 장면이다. 이 장면은 인간과 기계의 성적 관계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도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는데 그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독특한 시선에 기인한다. 만약 남성과 여성, 혹은 인간들 사이의 섹스 장면을 촬영했다면―둘 중 하나가 지배적이더라도―카메라는 필연적으로 동등한 영역의 시점에서 그 둘의 커버리지를 담거나, 투 샷을 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알렉시아는 섹스의 가능성이 있었던 남성 팬과 쥐스틴(가랑스 마릴리에)을 살해함으로써 인간 간의 욕망 실현을 포기하거나 실패한다. 반면 자동차와의 섹스 장면은 각각의 신체(차체)를 동시에 온전히 담지 못한다. 자동차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흔들리는 자동차 차체를 담을 수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알렉시아의 육체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반대로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알렉시아의 육체를 담을 수 있지만, 자동차의 차체(정확히는 자동차의 외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 (주)영화특별시SMC

알렉시아와 자동차의 불균형한 관계 속에서 카메라는 안과 밖을 유영하며 컷을 연결시키다가, 이내 열린 선루프를 프레임 속 프레임으로 삼으며 부감으로 둘의 잘린 신체를 동시에 담는다. 이러한 컷 구성은 샷과 리버스 샷의 관계로 보기도 어렵고, 마스터 샷과 커버리지의 관계로 보기도 어렵다. <티탄>이 대상을 담는 방식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연속체로써 존재할 만큼 모호하며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새롭다.

 

A가 A가 될 수 없는 비극

알렉시아가 아버지의 품에서 나와 유사 아버지 뱅상의 아들 아드리앙이 되는 이야기. <티탄>의 서사는 이렇게 요약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알렉시아에서 아드리앙으로의 변화는 어느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살인자에서 구급대원으로. 불을 붙이는 자에서 불을 끄는 자로. 아버지에서 또 다른 아버지로. 이는 결핍을 안고 있는 자의 새로운 사회화 과정처럼 보인다.

우리가 알렉시아의 신체적 변화와 사회적 위치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지켜봐야 하는 것은 다시 돌아오는 타자의 반복이다.

 

ⓒ (주)영화특별시SMC
ⓒ (주)영화특별시SMC

<티탄>의 첫 장면에서 어린 알렉시아는 운전하고 있는 아버지의 뒤에서 자동차 소리를 따라 하며 방해를 하고 아버지는 이에 맞서 음악의 볼륨을 올린다. 그 뒤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은 괴물로 재탄생한 알렉시아. 그런 그를 아버지가 묘한 얼굴로 쳐다본다.(이 장면에서 알렉시아의 아버지에게만 리버스 샷이 주어지고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는 점도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음악. 괴물의 탄생. 타자의 얼굴. 이것들과 비슷한 도식을 가진 장면이 후반부에서 반복된다. 한밤중 구급대원들의 파티에서 남자 둘이 알렉시아를 들어 소방차 위에 올려두면 음악(첫 장면 자동차에서 재생되었던 'Wayfaring Stranger'의 다른 버전)이 재생된다. 그 위에서 관능적인 춤을 추는 알렉시아. 그런 그를 쳐다보는 구급대원들의 얼굴.

다시 돌아온 타자. 모든 것은 반복된다. 그럼에도 알렉시아가 여기서 변주하고 있는 것은 어릴 적처럼 저항의 음성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화를 거치고 순응의 춤을 추고 있다는 점이다. 두 남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알렉시아를 차 위에 올리고 그 노래를 재생시켰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첫 장면에서의 아버지의 얼굴을 반복하고 있을까. 이러한 아이러니의 정답은 그들이 알렉시아가 관능의 춤을 추기를 바랐고(또는 그들에게 순응하길 바랬고), 알렉시아는 그것을 너무 잘 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다시 한번 괴물이 탄생한다. 저항함의 괴물에서 순종함의 괴물로. 타자 혹은 사회가 바라는 것을 완벽하게 하였기에 발생하는 아이러니. A가 A가 될 수 없는 비극. 거짓말이길 바라지만 그를 지독하게도 따라오는 명제. A이지만 A가 될 수 없는,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

결국, 줄리아 뒤쿠르노가 만들어낸 <티탄>의 시선, 인물, 세계는 이분법적 질서로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현실의 그러한 모순을 반복 속의 균열로써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렉시아의 얼굴에 수염이 자란 이유, 인간의 육체 안에서 차가운 금속이 정체를 드러내는 이유, 그리고 알렉시아가 낳은 신인류가 인간인 동시에 기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알렉시아의 아이는 <티탄>의 세계가 나은 양태이며 하체의 예술 그 자체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주)영화특별시SMC

티탄
TITANE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
Julia Ducournau

 

출연
벵상 링던
Vincent Lindon
아가트 루셀Agathe Rousselle
가랑스 마릴리에Garance Marillier
디옹-케바 타추Diong-Keba Tacu
미리엄 아케디우Myriem Akheddiou
베르트랑 보넬로Bertrand Bonello
도미니크 프로트Dominique Frot
라민 시소코Lamine Cissokho
플로랑스 자나스Florence Janas
프레데릭 쟈댕Frederic Jardin

 

수입 왓챠
배급 왓챠|영화특별시SMC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08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1.12.09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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