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슨'이 부재할 때
'리슨'이 부재할 때
  • 선민혁
  • 승인 2021.12.1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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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고 사실적인 연출로 관객의 강한 몰입을 이끌어낸다"

<리슨>의 시놉시스를 접했을 때, 나는 올해 국내에서 개봉한 세르게이 드보르세보이의 <아이카>(2018)와 저스틴 전의 <푸른 호수>(2021)를 떠올렸다. 두 영화가 각각 이주 노동자와 입양아가 현지 사회에서 겪는 고난을 이야기하며, 구조적·제도적 모순을 꼬집기도 한다는 점에서였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예상한 대로 <리슨>은 두 영화와 유사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 워터홀컴퍼니(주)

포르투갈에서 영국 런던 교외로 이주한 주인공 부부 벨라(루시아 모니즈)와 조타(루벤 가르시아)는 실직과 딸의 청각장애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3남매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각장애를 가진 둘째 루(메이지 슬라이)의 몸에 든 멍이 복지국의 오해를 부른다. 복지국은 벨라와 조타가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로 의심하고 부부의 자녀들을 다른 가정으로 강제 입양시키려 한다. 가정에 방문한 복지국 직원과 경찰관들에게 벨라와 조타는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지만, 복지국은 결국 아이들을 시설로 데려가 부모와 격리시킨다. <리슨>은 벨라와 조타가 복지국으로부터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 듣다', '귀 기울이다'라는 뜻의 제목 '리슨'(Listen)이 상당히 직관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리슨>의 주된 스토리가 되는 사건은 청각장애를 가진 어린 딸 루의 보청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직접적인 원인은 밝혀지지 않지만, 루의 보청기는 고장 났다. 벨라는 수리를 위해 전문가를 찾아가는데, 수리가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는 차라리 보청기를 새로 장만할 것을 제안하지만 조타가 실직한 상황이라, 벨라는 새 보청기를 구매하는 데에 필요한 금전과 서류를 준비할 여력이 없다. 보청기를 끼지 못한 루는 보통의 어린이들이 유치원에 가듯 복지시설에 맡겨진다. 이날 루는 보청기를 끼지 않았기 때문에 복지사와 제대로 소통할 수 없었고, 하필 등에도 멍이 들어있었다. 복지사는 보청기의 고장과 멍의 원인이 부모에게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들을 수 있게 해주는 보청기의 고장으로 인해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이 영화에서 '리슨'의 부재는 이어진다.

 

ⓒ 워터홀컴퍼니(주)

벨라는 복지사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름의 대비를 하지만, 벨라의 집을 찾아온 복지국 직원들은 벨라와 조타의 해명을 들어주지 않는다. 결국 벨라와 조타는 복지국 직원들이 세 자녀를 시설로 데려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벨라와 조타는 아이들을 시설에서 가정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지만 복지국은 계속해서 이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시설로 아이들을 면회하러 갈 때면 벨라와 조타는 복지국 직원들과 번번이 갈등하여 면회 시간을 다 쓰기도 전에 쫓겨나기도 한다. 사실 루의 등에 생긴 멍은 폭력으로 인한 것이 아닌, 지병에 의한 것이었다. 복지국 직원들이 벨라와 조타를 오해한 것이다.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제도인 '복지국'이 약자의 말을 '리슨'해주지 않는 모순에 대하여,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한 편으론, 영화가 소통의 부재가 일으키는 꼬이고 꼬이는 혼란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리슨'하지 않는 이들은 복지국 직원들뿐만이 아니다. 루는 보청기에 대한 일은 비밀로 하자는 벨라가 한 이야기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의사와 복지사가 부모를 의심할 만한 여지를 주게 된다. 첫째 아이 디에고는 조타에게 몸이 아프다고 이야기하지만, 조타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타는 디에고에게 목욕을 시키고, 디에고는 고통스러워한다. 복지사의 의심을 받게 된 것을 눈치챈 벨라는 가족들에게 복지국에서 방문을 하기전에 도망을 치자고 주장하고, 조타는 그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보지 않은 채 싸우기만 한다. 시설에 보내진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할 때에도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갈등하며 아이들을 면회하는 도중에 큰 소리를 내며 다투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은 '리슨'하는 이들이 행동함으로써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 워터홀컴퍼니(주)
ⓒ 워터홀컴퍼니(주)

행동의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은 앤(소피아 마일즈)이다. 복지국 출신인 앤은 벨라, 조타 부부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앤은 벨라와 조타의 말을 경청하고 믿어주며, 실질적인 솔루션을 제공한다. 벨라가 자신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더라도, 그들을 돕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앤의 도움으로 인해 벨라와 조타의 아이들을 찾기 위한 노력에는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첫째 아이인 디에고 또한 '리슨'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시설로 강제로 끌려가는 디에고에게 벨라는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주며, 외우라고 이야기한다. 디에고는 이것을 기억해 두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벨라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강제로 다른 가정에 입양되는 것을 막고 가족과 재회한다. 복지국 직원들과는 달리 법정의 판사는 벨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부부는 루 또한 시설로부터 다시 데려올 수 있게 된다.

<리슨>은 73분으로 러닝타임이 비교적 짧은 만큼, 영화의 스토리 진행에서 생략되는 부분들이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개연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대신, 스토리를 빠른 템포로 전개시키는 영화의 선택이 복지 제도의 모순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에 적합했다고 하는 것은 어렵지만 관객이 이 가족의 입장에 몰입하여 긴장감을 가지게 하기에는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할 만하다. <리슨>의 주제가 <아이카>와 <푸른 호수>를 연상시킨다면, 의도가 과하게 드러나지 않는 담담하고 사실적인 연출로 강한 몰입을 끌어낸다는 점에서는 다르덴 형제의 <소년 아메드>(2019)나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가 떠오르기도 한다. 첫 장편영화인 <리슨>으로 지난해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미래의 사자상', '오리종티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한  아나 로샤 감독.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글 선민혁, sunpool2@ccoart.com]

 

ⓒ 워터홀컴퍼니(주)

리슨
LIsten
감독
아나 로샤
Ana Rocha

 

출연
아나 호차
Ana Rocha
루치아 모니즈Lucia Moniz
소피아 마일즈Sophia Myles
루벤 가르시아Ruben Garcia
메이지 슬라이Maisie Sly
키란 소니아 사와르Kiran Sonia Sawar
제임스 펠너James Felner

 

수입|배급 워터홀컴퍼니㈜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78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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