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라이트] 스크린은 에드가의 실험실
[에드가 라이트] 스크린은 에드가의 실험실
  • 배명현
  • 승인 2021.12.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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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력은 형식 실험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될…지도?"
ⓒ 유니버설 픽쳐스

1. '에드가 라이트'의 세계로 들어가기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를 볼 때면, 현실 안에서 불가능한 어떤 것들을 구현해내려 분투하는 자의 유쾌한 웃음을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애잔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위트 넘치는 슬픔. 이 기묘한 감각을 주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아직까지는) 몇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이 글의 주인공인 '에드가 라이트'는 그중 한 명이다. 그가 설계한 영상은 유려하고 아름답다. 빠를 때도 그렇고 느릴 때도 그렇다. 탁월한 리듬이 만들어내는 컷들의 춤은 웃음을 유발하지만 결코 경박하지 않다. 오히려 우아하다. 이 애호를 '덕심'에 기인한 설명이라고 말해야 할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이 기분을 느낄 수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는 그의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니까. 그리고 이 차이는 얼마냐 '알고 있느냐'의 차이가 아닌 단지 개인의 '성향'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호불호가 강하게 나뉘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도 없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에드가의 전작들과 달리, 공포영화이다. 코미디만을 만들던 그가 갑자기 '왜?'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뽑은 인생 영화 리스트―이를테면 <쳐다보지 마라>(1973), <이블 데드2>(1987), <캐리>(2013) 등―을 본다면 오히려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공포영화인가일 것이다. 영상미(너무나 빈번하게 쓰여 이제는 그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조차 헷갈리긴 하지만)적 관점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지알로(giallo) 호러이다. 초반 서사로 보자면 오컬트에 기반한 심리 사이코 공포이다. 그렇다면 가장 비판이 거센 후반부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무어라 형언하기 힘들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형언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는 형언할 수 없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영화를 관람하는 데 있어 성향은 중요하다.

 

2. 기시감이 느껴지는 비현실감. 익숙하지 않은 장르감각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장르'를 건드리지 않고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는 늘 장르적이었다. 장편영화 데뷔작인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을 시작으로 <뜨거운 녀석들>(2007), <지구가 끝장나는 날>(2013)까지. 여전히 그의 대표작이 되어주는 코르네토 3부작(또는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데뷔 초에서 현재까지 점점 과장을 줄이고는 있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색'은 공고했다. 이 지점이 장르를 중심으로 다루는 감독 사이에서 돋보이는 이유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적극적으로 패러디와 오마주를 집어넣는 감독이기 전에 영화광이다. 그는 장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 유니버설 픽쳐스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플롯을 들여다보자. 영적 기운을 가지고 있는 시골의 순진한 '소녀'가 대도지인 런던의 패션 학교로 '이동'한다. 그녀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환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이 환상의 세계는 어두운 이면을 가진 끔찍한 공간이었다. 마치 <캐리>를 경유한 것만 같은 세 줄의 시놉시스는 장르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다만 그가 돋보이는 감독이된 데에는 이유가 있듯, 그는 장르의 법칙에서 더 나아간다.

공포영화에서 고통을 당하는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하면 대부분 그 주체성을 반동인물에게 넘겨주기 쉽다. 가장 쉬우면서 게으른 장르법칙. 그러나 그는 주인공 엘로이즈 터너(토마신 맥킨지)를 관찰자로 다루었다. 이 관찰자는 샌디(안냐테이러 조이)가 겪는 사건들을 시각이 아닌 '몸'으로 겪는다. 포인트는 이 몸이 자신의 몸이 아닌 타인의 몸이라는 데 있다. 여기서 관객은 '거울'이라는 시각적 정보의 매질로 전달되는 정보를 통해 멜로이즈가 샌디와 이상한 합치를 이루고 있다고 지각할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재미있는 점은 이 합치가 '게임'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데 있다.

 

3. '스크린'은 에드가의 실험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에서 에드가 라이트는 게임의 화면을 스크린에 구현해놓는데 중심을 두었다. 화면 위 에너지바와 캐릭터의 스킬이 CG로 그려진다. 충분히 괜찮은 실험이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런 과장된 연출은 대개 소격효과를 낳는다. 관객이 영화가 아닌 다른 곳에 집중을 하게 한다. 이렇게 영화의 밖에서 경험한 기억을 영화로 끌어오게 함으로써, 관객은 잠시 스크린이 아닌 기억을 감상하고 돌아온다. 약점이라면 약점일 수 있는 그의 과장은 근래 작품에 들어올수록 한껏 차분해지고 세련된 형태로 변주되었다. 그는 똑같이 게임을 영화와 연결 짓지만, 이는 은밀하게 연출된다.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잠시 이야기를 복기해보자. 엘로이는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시점으로 대리 경험한다. 이 대리경험은 가장 안전한 거리를 두는 동시에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하는 이상한 형태로 변화해간다. 이는 일종의 병리적 과몰입(게임중독이 아닌)의 증세를 은유하는 듯 보인다. 실제로 샌디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엘로이는 자신이 샌디에게서 빠져나와 그 광경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본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다했다 하더라도 게이머의 생명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거리감은 다시 거울과 칼에 얼굴을 '비춤'으로써 유지된다.

 

ⓒ 유니버설 픽쳐스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서 '거울'은 자신을 비추는 동시에 자신이 가장 애정하는 '분신'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본다'는 감각은 서로의 싱크로율을 높이고 하나 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하나 됨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 엘로이즈에서 샌디로만 가능하다.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거울'이란 일종의 모니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꿈으로 접속한 뒤 거울로 자신의 분신을 바라보며, 환상이 깨질 때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 이 모든 것이 <라스트 나잇 인 소호>라는 작품 내부를 추동하게끔 하는 힘이다. '우리에게 왜 게임을 하는가?'라고 물어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단지 재미가 있어서일 뿐인 것처럼. 엘로이즈가 작품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그녀가 찾는 흥미에서 나온다.(존- "오늘 저녁에 할 일 있어?" 엘로이즈- "응")

이 영화는 런던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강박적으로 언급한다. 60년대의 런던과 지금의 런던을 오가며 그 명과 암을 비교하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여기에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사실은, 진짜 두려운 존재가 60년대 퇴락한 향흥문화가 아닌, 런던이라는 공간으로 부각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은 다시 게임의 논리로 이어져 런던, 그중에서도 소호라는 공간이 게임의 맵(map)으로 은유되며, 정확하게는 던전이 된다. 계속해서 유령(mob)이 등장하는 이곳은 주인공이 살기 위해선 이행해야 하는 퀘스트(quest)판인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의 결말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패션쇼를 마친 엘로이즈는 거울 안에서 엄마를 본다. 이어 남자친구가 된 존과 포옹을 한 뒤 할머니와 포옹한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있던 그 거울 안에는 샌디가 자리해있다. 이는 <캐리>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을 게임의 논리로 접근한다면 다른 독법으로 영화를 읽는 게 가능해진다. 엘로이즈와 샌디는 자신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싱크를 맞추며 거울을 두드린다. 이는 두 인물이 분명하게 서로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전까지 거울은 플레이어만이 캐릭터를 인지할 수 있었다. 분명,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샌디는 죽는 마지막까지 엘로이즈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하필 이 마지막 장면에서 이 '모니터'를 뚫고 이 인물들이 서로를 인지하게 된다.

 

ⓒ 유니버설 픽쳐스

4. 게임은 어떻게 끝나지?

얼핏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엔딩은 기존의 공포영화 엔딩에서 보여준 열린 결말의 방법론 중 하나로 보인다. '이 사건이 결국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반복될 것이다'식의 방법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가 플레이어를 인지하는 것은 매우 뒤틀린 서사의 방법론이다. 흔히 '메타적'이라 표현하는 방법 말이다. 여기서 나는 한 게임이 떠오른다.

<더 스탠리 패러블>(2013)은 메타픽션 장르의 게임이다. 이 게임은 스탠리라는 인물이 겪는 비현실에 대한 게임으로, 어느 날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그 자체인 놀이이다. 플레이는 간단하다. 주어진 환경에서 플레이어는 나래이션의 반응을 보며 그저 어디로 갈지를 '선택'을 하면 된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곧 이 선택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래이션이 시키는대로 혹은 그 반대로 게임을 진행해도 당신은 설계자가 만들어 놓은 구조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카프카스러운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무한하게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게 한다. 당신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자가 미처 예상치 못한 구멍을 찾기 위해 게임을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수긍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언가 다른 의미 있는 선택'을 찾을 것인가.(이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유튜브에 스탠리 패러블 리뷰를 검색해보길 추천한다)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와 게임 <더 스탠리 패러블>의 근본적인 세계관은 같다고 볼 수 있다. 관객(플레이어)에게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 결말을 모르는 관객은 감독(설계자)이 짜놓은 설계에서 서스펜스를 느끼며 주인공을 나-플레이어와 동일시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엔딩에서 감독(설계자)은 관객이 기대하던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린다. 엔딩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에드가가 설계한 이 영화에서 우리는 '농락'을 능동적으로 감상(플레이)하고 즐기며 체험했다. 어쩌면 이 설계 자체가 에드가의 공포가 아닐까? 심지어 이 농락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그 사실 자체로 더욱 섬뜩하게.

 

ⓒ 유니버설 픽쳐스

5. 실험 결과

에드가 라이트가 만화의 논리를 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흔히 '쩌는 편집'이라고 이야기하는 스피디한 몽타주는 그가 공간을 이동하거나 시간을 단축시킬 때 주로 사용하는 대표 시그니처일 것이다. 허나 이는 영화의 요소이지 그 형식 자체에 대한 시그니처는 아니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만화를 넘어 게임의 논리를 영화에 적용시키는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시도는 꽤나 현시점에서 유효해 보인다.

아마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2019) 이후 영화와 게임의 만남을 다룬 형식 실험에 있어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의 영화 팬인 동시에 게임의 팬으로서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적 야심을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런 영화를 볼 때면 진심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상투적인 문장이기에, 이렇게밖에 마무리할 수밖에 없음이 아쉽다. "에드가 라이트의 다음 영화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유니버설 픽쳐스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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