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의 경계가 사라진 시공의 피안에서
모든 예술의 경계가 사라진 시공의 피안에서
  • 홍상현
  • 승인 2021.11.29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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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언네임어블 댄스> 이누도 잇신 감독
타나카 민 배우는 1966년 데뷔 이래 세계적인 무용가로 활약하다 2002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된 「황혼의 사무라이」로 은막에 데뷔했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타나카 민 배우는 1966년 데뷔 이래 세계적인 무용가로 활약하다 2002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된 「황혼의 사무라이」로 은막에 데뷔했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 시작해야지...?"

"어? 어, 그래."

멀뚱히 마주서있던 무용과 동기가 조심스런 어조로 운을 떼었다.

쑥스러운 마음에 잠시 유체이탈을 경험하던 필자의 정신이 돌아온 건 바로 그때다. 해야지. 며칠을 졸라 얻어낸 개인레슨의 기회인데.

"나 이거 추워서 닭살 돋은 거 봐. 첫날이니까 가볍게. 나 하는 거 먼저 보고?"

"응, 그런데, 음악을 준비 못 해서."

아침부터 허둥대다 챙겨둔 음원을 깜빡한 채 등교해버린 저주스런 건망증. 하지만 자책만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너무 뻔할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요전에 얘기한 대로 기쁨, 분노, 슬픔, 그리고 즐거움 순으로, 오케이?"

"... 아... 자... 잠깐만."

"됐고. 스트레칭을 언제 했는데 여태 꾸물거리나?!"

투명한 얼굴 위로 스치는 장난스런 미소. 리모컨 스위치를 누르자 심장박동을 연상시키는 타악기의 리듬이 들린다. 재즈팬츠에 라운드티셔츠, 머리를 질끈 동여맨 A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이내믹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실내의 공기를 가르는 몸. 통학버스가 한 시간 반을 달리는 동안 필자의 말에 그저 서너 마디 대꾸하는 게 전부일 만큼 과묵한 그가 이내 다른 사람, 아니, 존재가 되어있었다.

양적인 차이는 있을망정 이누도 잇신 감독과 나눈 이야기가 매번 특별하게 기억된다. 한 두 마디 정도로 지나쳐버릴 수 있는 질문에도 대답이 늘 성실하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양적인 차이는 있을망정 이누도 잇신 감독과 나눈 이야기가 매번 특별하게 기억된다. 한 두 마디 정도로 지나쳐버릴 수 있는 질문에도 대답이 늘 성실하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제의나 수렵, 심지어 전쟁에까지 이르는 인류활동의 중추에 자리해있던 몸짓을 따라하다 보니 장거리 질주 끝에 느끼는 것과 같은 묘한 쾌감ㆍ해방감에 휩싸였다. 인간의 본능적 표현욕구로부터 비롯된 무용. 이를 구성하는 율동(rhythm)을 '인체 내부의 주요 요소이자 우주적인 질서의 한 요소'라 규정했던 피타고라스의 언명이 피부로 느껴지던 순간.

부산국제영화제에 와이드앵글 부문에 초청된 이누도 잇신 감독의 장편다큐멘터리영화 <언네임어블 댄스>를 보는 내내, 연극영화학과를 다니던 시절의 이 기억이 떠올랐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구구는 고양이다> 등, 2000년대 초반 청년기를 보낸 관객들의 '인생영화'로 필모그래피가 채워져 있는 거장, 이누도 감독은 <언네임어블 댄스>를 통해 세계적인 무용가로 활약하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황혼의 사무라이>로 은막에 데뷔, (또 다른 자신의 대표작) <메종 드 히미코>는 물론 한국영화 <사바하>에까지 출연하며 어느새 대배우의 반열에 오른 일흔 여섯의 사내, 타나카 민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한다. 여기서 '다큐멘터리인데 주인공을 잘 모르면 살짝 따분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은 문자 그대로 '기우' 2017년부터 3년간 5개국을 돌며 이뤄진 90회의 공연을 팔로우하는 여정은 근 20년간 한국의 수많은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던 귀재, 야마무라 코지의 애니메이션과 뒤섞이며 어떤 장르라 함부로 '명명할 수 없는(unnameable)'춤의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그리하여 영화는 등장하는 모든 공간을 무대 삼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실사와 애니메이션, 일상과 픽션, 연기와 무용의 벽을 허물어뜨린다.

「언네임어블 댄스」는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 다큐멘터리 경쟁작으로 초청되었다. 그러나 이누도 잇신 감독의 생각은 다르다. 그의 영화세계에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언네임어블 댄스」는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 다큐멘터리 경쟁작으로 초청되었다. 그러나 이누도 잇신 감독의 생각은 다르다. 그의 영화세계에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홍상현

특히 1980년대 이후 태어난 관객들 사이에서 감독의 위상은 독보적입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메종 드 히미코>가 인생영화인 분들이 많아서인데요. 그런 감독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생각되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코로나 19 사태 와중에 초청되셨습니다.

이누도 잇신

부산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었던 추억으로 가득한 도시입니다. 게다가, 영화제에서 뵈었던 분들의 열기와 친절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영화를 사랑하시는 분들을 만나 자유로운 공간이 주는 안도감ㆍ해방감 속에서 지낸 시간을 돌아보면서 언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고요.

이번에 직접 가서 여러분을 뵐 수는 없지만, 아무쪼록 타나카 민 씨의 춤을 생생하게 지켜봐주셨으면 했습니다.

 

홍상현

2004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된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영화도 변화를 거듭해 왔는데요.

이누도 잇신

한국영화의 놀라운 성취는 감독들뿐만 아니라 제작자들의 뜨겁고 진정성 있는 영화 사랑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기술 스태프 여러분의 전문성 또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있죠. 촬영, 조명은 물론 메이크업에 이르기까지 기준 자체가 워낙 높으니까요.

한편, 일본의 영화제작자는 회사원이 주어진 범위 내에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감독이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요. 스태프도 섣불리 무리를 했다간 다음에 자리에서 그 위치에서 일하게 될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위축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요. 비유하자면 겉보기엔 어른이라도 내면은 어린아이인 사람 같다고 할까요. 이런 상황이다 보니 기준 자체를 끌어올리기가 힘든 겁니다.

「언네임어블 댄스」에 등장하는 익스트림 롱 쇼트를 바라보노라면 느낄 수 있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던 우리가 어느새 참혹하고 번잡스러운 일상 너머 어딘가에 서 있음을.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언네임어블 댄스」에 등장하는 익스트림 롱 쇼트를 바라보노라면 느낄 수 있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던 우리가 어느새 참혹하고 번잡스러운 일상 너머 어딘가에 서 있음을.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홍상현

최근 배우자 분과 함께 제작사인 주식회사 스카이드럼을 창립하셨죠.

이누도 잇신

기본적으로 이번 작품, <언네임어블 댄스>을 자체제작으로 만들기 위해 설립한 프로덕션입니다.

그 뒤로 다큐멘터리를 한해 두 편 정도 찍고 있는데요. 영화적으로 흥미를 이끌어낼 요소가 있고, 평소 인간적인 친분도 있어 가까이에서 충분히 지켜볼 수 있는 인물을 골라 작품을 만들죠. <언네임어블 댄스> 외에도 한국 관객 여러분께는 <남자는 괴로워>, <가족은 괴로워>, <동경가족>, <황혼의 사무라이> 같은 작품들로 알려진 야마다 요지 감독과 일본의 전통연희인 교겐 배우 노무라 만사이 등이 등장하는 차기작이 라인업 되어 있습니다. 우연찮은 계기로 설립한 제작사가 어느새 다큐멘터리 전문이 되어버린 거죠. (웃음)

현재는 메이저스튜디오와 신작 극영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스카이드럼 작품은 잠시 쉬고 있는데요. 창작욕을 자극하는 인물이 눈에 띄면 다시 움직여야죠.

 

홍상현

제가 특히 흥미를 느낀 지점은 말씀처럼 배우자 분과 감독님이 함께 이름을 내걸고 만든 제작사의 창립 작품이 그간 거장으로서의 포지션을 확보해 오신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누도 잇신

음... 이 부분과 관련한 제 의견은 다른데요. 저는 원래 극영화도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큐멘터리를 찍는 걸 '새로운 도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웃음)

여하튼 요즘 배우들을 보면 연기 자체에 부담감이나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워낙 일 자체가 쉽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죠.

또, 저로서도 뭔가 좀 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기도 했는데, 그래서 강아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신작을 찍고 있어요. 그 전에는 고양이가 등장하는 아홉 편의 드라마를 찍었고요. 젊은 시절 모델로 유명했던 미야자와 리에 배우가 주연을 맡은 <구구는 고양이다>라는 작품이었는데요. 2008년에 영화판을 먼저 만들었죠. 그렇다 보니 제가 연출을 맡은 드라마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타나카 민의 집은 후지산이 모이는 야마나시 현의 산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작은 농가다. 그는 배우나 무용가로서 대외활동을 할 때 이외의 시간을 농사일로 보낸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타나카 민의 집은 후지산이 모이는 야마나시 현의 산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작은 농가다. 그는 배우나 무용가로서 대외활동을 할 때 이외의 시간을 농사일로 보낸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홍상현

그럼 본격적으로 <언네임어블 댄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 자체 영화의 한 장면 같을 것 같습니다만, 혹시 주인공인 타나카 민 씨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누도 잇신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좀 긴 스토리가 있습니다.

우선 무용가이던 타나카 민 씨를 '배우'로 인식하게 된 건 야마다 요지 감독의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 작품 <황혼의 사무라이>를 통해서였습니다. 이 영화는 일본 아카데미상 수상작이기도 한데 저도 마침 시상식에 참석했거든요.

당시 저는 <메종 드 히미코>라는 작품에서 아버지 역을 맡아 줄 배우를 찾고 있었습니다. 주인공 '사오리' (시바사키 코우 분)에게는 가족을 저버린 원망스러운 존재지만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아름다운 카리스마로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입체적인 캐릭터였지요. 다만, 많은 장면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만 비쳐지는 데다 대사 또한 많지 않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어 숱한 명배우들을 물망에 올려놓고도 좀처럼 결심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베이지색 양복을 입고 시상식장에 와 홀로 앉아있던 타나카 씨가 눈에 들어온 거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그 아름다운 실루엣이 제 마음에 각인되었습니다. 아직 수상작 소개 전이라 타나카 씨가 배우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죠. 게다가 배우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동도 전혀 없었거든요.

저는 어느새 '아마추어라도 좋아. 저 사람을 아버지역으로 캐스팅해야겠어!'라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가가 말을 걸 타이밍을 옅보고 있는데 바로 그때 사회자가 타나카 씨를 호명하는 거예요. 데뷔작에서 광기가 번득이는 무사를 연기, 무려 남우조연상을 받은 거죠.

 

홍상현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 타나카 씨를 알아보지 못하신 건 아니고요?

이누도 잇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바로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황혼의 사무라이>를 봤지만 오랜 낭인생활에 지쳐 폐인이 되어버린 영화 속 사무라이와, 제 눈앞의 그 아름답고 우아한 사내를 매치시키지 못했던 거예요. <황혼의 사무라이>는 마흔 아홉 살에 출연한 그의 데뷔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한번 영화에 출연했으니 최소한 교섭 정도는 해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죠. 해서, 섣불리 다가가기보다 타나카 씨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타나카 씨가 일본을 대표하는 무용가의 한사람으로 부토라는 모던댄스의 장르를 창시한 히지카타 타츠미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죠. 그런 연후에 캐스팅 디렉터에게 급히 교섭을 부탁하면서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답이 오지 않더라고요. 일본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여기저기서 출연제의를 많이 받고 있지만 시나리오를 읽어보고는 모두 거절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멋진 시나리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저는 연기를 할 줄 몰라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무조건 상관없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다음 대답이 또 인상적이었습니다. ‘연기는 못 하지만 각각의 장면에서 「열심히 있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누도 감독의 술회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멋진 시나리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저는 연기를 할 줄 몰라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무조건 상관없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다음 대답이 또 인상적이었습니다. '연기는 못 하지만 각각의 장면에서 「열심히 있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누도 감독의 술회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홍상현

뭔가, 일반적인 캐스팅의 과정과는 상당한 차이가 보이는데요?

이누도 잇신

그렇죠? (웃음) 보통은 감독의 오디션을 통해 캐스트를 선발하는데, 도리어 제가 오디션을 보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웃음) 어쨌든 또 그 와중에 대답이 오기는 왔는데 이게 또 좀 애매하더라고요.

 

홍상현

어떤 답이 도착했습니까?

이누도 잇신

'좋은 각본이라고는 생각하는데, 감독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눈 연후에 답을 드리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웃음)

야마나시 현의 산 속에 있는 타나카 씨 댁으로 프로듀서랑 둘이서 찾아갔죠. 도쿄에서 차로 2시간 반 거리. 평소에는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거예요. 보내 준 주소 근처에 도착했는데 산을 오를수록 길은 좁아지고 인가도 자취를 감추더라고요. 그렇게 산속을 헤매는데 이거 무슨 <지옥의 묵시록>에서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 분)을 만나러 가는 윌라드 대위(마틴 쉰 분)가 된 느낌이었다니까요. (웃음) '혹시 집에 못 돌아가는 거 아냐?' 싶어서 막 불안해지고. (웃음) 그러다 급기야 숲 속에 있는 밭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데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누가 보더라도 농군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을 사내가 우렁차고도 맑은 목소리로 말을 거는 거예요. "이누도 씨이신가요?"라고.

「언네임어블 댄스」는 2017년부터 3년간 5개국을 돌며 총 90회에 걸쳐 이루어진 타나카 민의 공연을 팔로우한다. 하지만 단지 카메라로 기록하지 않았을 뿐  이누도 잇신 감독이 그의 춤을 지켜본 세월은 15년이 넘는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언네임어블 댄스」는 2017년부터 3년간 5개국을 돌며 총 90회에 걸쳐 이루어진 타나카 민의 공연을 팔로우한다. 하지만 단지 카메라로 기록하지 않았을 뿐 이누도 잇신 감독이 그의 춤을 지켜본 세월은 15년이 넘는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홍상현

와, 지금까지 들어본 중 가장 드라마틱한 캐스팅 스토리입니다! (웃음)

이누도 잇신

(웃음) 타나카 씨는 전형적인 단층집 농가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다다미방에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는데 조금 있다가 운을 떼시더라고요.

"멋진 시나리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저는 연기를 할 줄 몰라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무조건 상관없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다음 대답이 또 인상적이었습니다.

"연기는 못 하지만 각각의 장면에서 '열심히 있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뭔가 독특한 느낌의 대답이었어요. '열심히 있어 드릴 수'는 있다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타나카 씨가 말을 잇는 거예요.

"저는 춤으로 내내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나중에 직접 촬영을 진행하면서 저는 비로소 그가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홍상현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던 거네요. 무려 십년도 넘은 과거의 일인데 말씀을 듣다보니 마치 저도 함께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누도 잇신

네. 저 역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으니까요. (웃음)

그때를 기점으로 타나카 민의 춤을 반복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매력에 사로잡힌 거죠. 폭포수 아래서 수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이 정화되는 경험도 했고요. 그렇게 15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타나카 씨가 당신의 자택에서 해주었던 말, 다름 아닌 '열심히 있어 드린'다는 표현의 근원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가 보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언네임어블 댄스>라는 영화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타나카 민을 그가 「황혼의 사무라이」로 일본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시상식에서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오랜 낭인생활에 지쳐 폐인이 되어버린 영화 속 사무라이와 눈 앞의 아름답고 우아한 사내를 매치시키지 못해서였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이누도 잇신 감독은 타나카 민을 그가 「황혼의 사무라이」로 일본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시상식에서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오랜 낭인생활에 지쳐 폐인이 되어버린 영화 속 사무라이와 눈 앞의 아름답고 우아한 사내를 매치시키지 못해서였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홍상현

다시 한 번 비슷한 취지의 말씀들 드리게 되는데요. 정말 이 모든 과정이 한편의 영화 같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로 돌아와 볼까요. 당시 타나카 씨는 당신의 제안으로 댄스 퍼포먼스를 위해 포르투갈에 갔을 때 이누도 감독을 대동한 것이 아마도 <언네임어블 댄스> 시작 아니었을까 한다고 술회하셨습니다. 당시 감독께서도 그 촬영분이 장편다큐멘터리 기획으로 이어지게 될 거라 예상하셨나요?

이누도 잇신

포르투갈에서 촬영할 당시까지만 해도 그 촬영 분량으로 장편 영화까지 만들게 될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어요

그러다가 도쿄로 돌아와서 15분 정도의 분량을 편집해 붙이는데 '이거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댄스영화를 만들어 볼 수도 있겠는데?' 싶더라고요. 프레드 아스테어나 마이클 잭슨이 나오는 작품들처럼.

 

홍상현

다음 질문은 바로 그 말씀과도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큐멘터리에는 흔히 시나리오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죠. 오히려 일상의 모습을 단순히 기록해 나가는 간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으니까요. 특히 인생 자체가 예술, 즉 댄스인 타나카 민이라는 인물의 2년 3개월에 걸친 거대한 퍼포먼스 중 일부를 또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에는 분명 정교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누도 잇신

인터뷰는 아예 하지 않고 2년 동안 춤추는 모습만 촬영했습니다.

그러면서 타나카 씨를 계속 관찰했죠. 물론 사이사이 잡담을 하거나 들려주시는 옛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인터뷰의 형태는 아니었어요. 별도의 설명이나 정보를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런 과정을 거친 뒤 타나카 씨가 과거에 쓰신 저서나 글들을 참고해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제가 타나카 씨의 공연 대본 하나를 새로 써 본다는 생각으로. 그의 라이브 공연을 보며 느낀 시간을 스크린에 재현해보고 싶었으니까요.

이누도 잇신 감독은 2년간 타나카 민의 춤추는 모습을 촬영할 뿐 별다른 인터뷰를 하지 않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타나카가 과거에 쓴 저서와 글들을 참고해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이누도 잇신 감독은 2년간 타나카 민의 춤추는 모습을 촬영할 뿐 별다른 인터뷰를 하지 않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타나카가 과거에 쓴 저서와 글들을 참고해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홍상현

<언네임어블 댄스>를 보고 난 제 소감은 '역시 타나카 민의 영화인 동시에 이누도 잇신의 영화이기도 하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풍부한 미적요소와 아름다운 미장센이 돋보이는 감독의 스타일이 충분히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인데요.

이누도 잇신

그의 춤은 아무리 자주 보더라도 매번 다른 느낌이 듭니다. 아니, 오히려 각각의 타나카 민이 자기가 추는 춤과 대치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요, 이 영화는 '그가 보여주려 한 어떤 것'이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보고 느낀 타나카 민의 춤에 관한 작품입니다. 관찰자의 눈과 마음을 통해 그의 춤을 재편성한 거지요.

또, 타나카 씨는 사전에 어떤 춤을 출 건지 가르쳐주지 않고, 카메라를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그를 카메라 안에 담아내기 위해 본인은 물론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장소 또한 늘 의식했습니다. 카메라의 위치라든가 렌즈를 통해 타나카 씨의 댄스와 마주한 겁니다.

 

홍상현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을 느끼는 장면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누도 잇신

중유 속에서 춤을 추는 오일 풀 장면입니다.

내레이션에서도 언급되는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는 의식의 깊이"까지 스스로를 내려 보내는 과정을 아주 잘 묘사ㆍ구성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사운드와도 맞아떨어지고요.

어느 틈엔가 등장하는 야마무라 코지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언네임어블 댄스」의 내러티브와 자연스럽게 뒤섞이면서 영화의 재미를 더해준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야마무라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건네기는 했지만 그 내용에 따르지 말고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어느 틈엔가 등장하는 야마무라 코지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언네임어블 댄스」의 내러티브와 자연스럽게 뒤섞이면서 영화의 재미를 더해준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야마무라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건네기는 했지만 그 내용에 따르지 말고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홍상현

인디애니페스트 등 한국의 수많은 페스티벌에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는 야마무라 코지 감독의 애니메이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조화에 실패할 경우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언네임어블 댄스>의 애니메이션 삽입은 정말 거의 완벽한 성공사례였어요.

이누도 잇신

야마모토 씨에게 시나리오를 넘기긴 했습니다만, 그 내용에 따르지 말고, 전혀 다른 작품이 되더라도 상관없으니 자유롭게 만들어 주십사 부탁했어요.

야마무라 씨의 작품은 즉흥성과 메타모르포스(metamorfose)에 대한 당신의 욕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극중의 애니메이션도 타나카 씨의 춤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나지요. 이렇듯 타나카 민에게 맞서는 에너지가 없었다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물론 저 역시 야마무라 코지라면 절대로지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홍상현

<언네임어블 댄스>의 제작기는 4년 이상에 걸친 장대한 여정이었을 겁니다. 타나카 씨와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많이 있으셨을 텐데,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누도 잇신

저는 특정한 에피소드 보다 프레임 밖, 그러니까 표현의 장 바깥의 타나카 씨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특유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많이들 오해하시는데, 타나카 민 씨는 퍼포먼스를 시작하기 전해 무척 긴장하시기도 하고, 옷을 벗을 때도 무척 부끄러워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오일 풀 공연 때도 굉장히 무서워하셨어요.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 그 자체이시죠.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어느 순간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이겨내 버리시죠. 이런 반전이 무척 재미있기도 할뿐더러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말한다. “특유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많이들 오해하시는데, 타나카 민 씨는 퍼포먼스를 시작하기 전해 무척 긴장하시기도 하고, 옷을 벗을 때도 무척 부끄러워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오일 풀 공연 때도 굉장히 무서워하셨어요.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 그 자체이시죠.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어느 순간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이겨내 버리시죠. 이런 반전이 무척 재미있기도 할뿐더러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이누도 잇신 감독은 말한다. "특유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많이들 오해하시는데, 타나카 민 씨는 퍼포먼스를 시작하기 전해 무척 긴장하시기도 하고, 옷을 벗을 때도 무척 부끄러워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오일 풀 공연 때도 굉장히 무서워하셨어요.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 그 자체이시죠.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어느 순간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이겨내 버리시죠. 이런 반전이 무척 재미있기도 할뿐더러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C)2021 The Unnameable Dance Film Partners

이누도 감독과의 소통은 이번 인터뷰가 처음이 아니다. 양적인 차이는 있을망정 그와 나눈 이야기가 매번 특별하게 기억된 이유는 따로 있다. 한 두 마디 정도로 지나쳐버릴 수 있는 질문에도 답이 언제나 성실하며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필자로부터의 요청이 있은 지 대략 2주쯤 뒤에 이뤄진 이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에도 그는 '기다리게 해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신작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당나귀를 데리고 자신의 영화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당나귀 발티자르>)를 만든 로베르 브레송처럼 강아지를 주인공으로 지금까지 만들어 온 것들과 차별화되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는 것. 아울러 촬영이 진행되는 내내 존 어빙의 소설 같은 '이야기의 맛'과 속도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고백도 이어졌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필자가 던진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질문에도 특유의 성실함과 다정함은 예외 없이 드러났다.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 사람들, 그리고 한국의 거리를 좀 더 깊이 접해보고 싶은데, 이미 작품의 제목까지 정해놓았단다. 이에 필자 역시 끓어오르는 궁금증을 느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일부러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지 않았다. 어느덧 환갑을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수많은 아이디어와 이야기가 넘치는 그와, 새 작품을 통해 재회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ㆍ일 양국 매체에 분석 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시미즈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 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 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주최 디지콘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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