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순간을 그리는 그 장면들
특별한 순간을 그리는 그 장면들
  • 오세준
  • 승인 2021.11.23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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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필의 영화명장면]은 '코아르CoAR'의 필진들이 본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뽑은 명장면을 소개하는 연재입니다. 이 글에는 줄거리, 해석, 비평보다는 '왜 그 장면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선명한지' 필자 스스로 되물으며, 감독의 카메라를 언어로 기록합니다.

<나의 문어 선생님 My Octopus Teacher> 제임스 리드James Reed, 피파 에리치Pippa Ehrlich|2020

ⓒ 넷플릭스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하던 다큐멘터리 감독 크레이그 포스터는 어느 순간 신체와 정신에 피로를 느끼게 되고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해안가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기억과 다큐멘터리 작업을 함께 했던 칼라하리의 전문 사냥꾼에게서 영감을 얻어,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대서양으로 간다. 해안가에 머물며 잠수를 해 바닷속 환경을 관찰하는 일상을 보내던 크레이그는, 한 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잠수복도 입지 않은 채로 문어를 만나기 위해 매일 같이 해조류를 해치고 바다 숲을 탐험한다.

그러던 중 크레이그와 문어 사이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문어가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크레이그를 알아보고,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손을 조금 뻗는 크레이그에게 문어는 수많은 다리 중 하나를 내밀어 그의 손을 잡는다. 크레이그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해 손등까지, 문어는 접촉의 범위를 넓혀간다. 크레이그와 문어는 교감한다. 문어가 크레이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이 장면 이후로 우리는 이 문어를 단지 바닷속의 흥미로운 동물 중 하나로 볼 수가 없게 된다. 이 문어는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는 이야기의 한 등장인물이 된다. 이 인물의 스토리에 이입하게 된 우리는 그가 시련을 극복하기를 바라게 되고 그의 눈에서 깊이를 느끼게 된다.

[글 선민혁]


<미스터 존스 Mr. Jones> 아그네츠카 홀란드Agnieszka Holland|2019

ⓒ 디오시네마

진실 앞에서 카메라를 내려놓다.

가레스 존스는 소련의 감시망을 뚫고 우크라이나의 한 시골 마을인 옛 유조프카, 현 '스탈리노'에 도착한다. 그는 소련이 은폐하고 있었던 기근의 참혹한 풍경을 발견해가던 중, 마을 아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홀린 듯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든다. 아이들의 노랫말은 존스가 찾아갔던 어떤 고위층도 들려주지 않았던, 그가 찾고 있는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스탈린은 왕좌에 앉아 바이올린을 켜고 있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내려다보네. 우리에게 빵을 주는 나라를 (…) 수많은 사람이 죽고 살아남은 자 얼마 없네. 굶주림과 추위가 우리 집에 찾아왔네.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구나.

가레스 존스는 그 순간 카메라를 꺼내어 겨우 사진 한 장을 찍었지만, 아이들이 가방 속의 음식을 훔쳐 가는 바람에 더는 찍지 못한다. 이윽고 그는 길가에서 아사한 여인과,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이를 다른 시신들과 함께 운반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가레스는 카메라를 들었다가는 다시 내려놓는다. 너무나 참혹한 장면 앞에서 망연자실한 것인가? 아니면 죽은 자들의 마지막 존엄을 지켜주기 위함인가? 목숨을 걸고 진실을 목도하러 간 곳인데 그토록 확실한 물증을 포기한 대가로 그는 다시 서구 세계로 돌아와서 광인이라는 오명을 견디며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존스의 진실성은 허스트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글은 마침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다. 역설적으로 가레스 존스가 현장에서 증거를 남기기에 급급했다면 소련에서 다시는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확실한 물증 없이는 자신이 믿는 대로 보고 들으려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듀런티 같은 인물은 이를 활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영악한 인물이다. 영화는 세상과 맞선 영웅 서사를 그리기보다는, 저널리즘과 문학 정신을 가진 이들의 수난사를 그리는 편에 가까웠다. 이들은 무모할 만큼 적진에 돌진하고, 순진무구할 만큼 진실을 믿으며,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한 채 광인 취급도 받는다. 그러나 이런 이들에 의해 한 장의 사진보다도 강력한 한 문장이 탄생한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글 이지영]


<암모나이트 Ammonite>프란시스 리Francis Lee|2020

ⓒ 소니픽처스코리아

그 문은 이미 오래전에 열려 있었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해변. 거친 파도 소리 사이에 화석을 찾고 있는 메리의 숨소리가 섞인다. 홀로 큰 화석을 파내다 절벽 중반에서 떨어진 그녀는, 자신보다도 서둘러 깨진 화석을 살핀다. 그리고 그 무거운 화석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3~4분여 되는 이 시간에는 오프닝 시퀀스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있다. 기다림. 직업상 매일같이 화석을 찾고 있는 그녀지만, 그녀도 모르게 마음은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다. (당신이 영화를 보았든, 보지 않았든) 당연하게도 그 무언가는 분명 '사랑'이다. 

가게 문을 닫고 깨진 암모나이트를 다듬는 중에, 로더릭과 샬롯 부부가 들이닥친다. 여기서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메리의 시선'이다. 그녀의 시선은 화석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부부로, 이어 곧장 샬롯에게 향한다. 그 순간 카메라 또한―마치 메리의 시점 쇼트라도 되는 듯―샬롯을 향한다. 이어 영화는 로더릭과 메리의 쇼트-리버스 쇼트로 두 사람의 대화를 구성한다. 이 시퀀스에는 이따금씩 로더릭을 향해 아주 잠깐 시선을 내어주지만, 화석을 작업하는 그녀의 바쁜 손이 보여주듯이 그건 예의상 그래야만 하는 기계적인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때, 메리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날 때, 하필 샬롯이 메리의 물건에 관심을 보이며 만져보려 할 때,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메리와 로더릭을 계속해서 담으며, 샬롯이 로더릭의 어깨 너머로 함께 보여질 때, "그거 만지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메리의 모습에 이어, 다시 한번―마치 메리의 시점 쇼트라도 되는 듯―메리의 시선이 샬롯에게 향하고 있음을, 무관심해 보였던 메리의 시선은 사실은 계속해서 샬롯을 포착해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는 샬롯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가 메리의 눈에 띄었다는 사실을 찰나로 묘사해낸다.

과감히 절벽에 오르며 미끄러지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화석이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 굴러떨어져 깨진 그날 아침은, 어쩌면 누구를 사랑해야 할지 내색하지 않고 버티어냈던 다소간의 긴 시간이 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과거의 실패한 사랑으로 그녀의 마음은 굳게 닫혀있었겠지만, 어쩌면 그 문은 모순적이게도 닫히지 않는 근본적인 열림이 아니었을까. 두 사람의 첫 만남 이후 어떤 이유에서든 계속되는 샬롯의 방문에 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둔 것을 보면.

<암모나이트>는 드넓게 펼쳐진 해변에서 홀로 화석을 찾는 메리의 모습으로 시작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그런 그에게 느끼는 사랑을 찾아낸 그녀가 서로 마주 보는 정경으로 끝이 난다. 여기서 '사랑'은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시선으로 조립된 몽타주, 그 안에서 진동하는 떨림에 의해 발현되어 진다. 시선이 교차하는 쇼트들의 연속은 분명 화석을 찾아서 복원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그건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이면서 찾아가는 과정이고 기억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글 오세준]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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