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3] '당신얼굴 앞에서' 육체만이 남았다
[홍상수 #3] '당신얼굴 앞에서' 육체만이 남았다
  • 김민세
  • 승인 2024.04.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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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는 아직까지도 새로운 영화를 만든다"

홍상수는 의미라는 것과 가장 반대편에 있는 듯한 영화들을 찍어왔다. 그의 영화들은 내용보다 형식이 앞섰으며, 기승전결이 말하는 교훈보다는 구조가 만드는 인상만이 남았다. <오! 수정>(2000)의 반복과 시선에 따른 차이, <북촌방향>(2011)의 미로 같이 얽혀있는 시간 구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4)의 두 가지 평행 세계, <강변호텔>(2018)의 미끄러지는 공간들과 운명적인 만남들. 그래서 그가 만든 일련의 영화들을 명확하게 관통하는 주제와 핵심을 개념화하려고 하면 번번이 실패하고야 만다. 홍상수 스스로가 했던 말처럼 그의 개별 영화에서도, 일련의 영화들 사이에서도 전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야기해보자면 '중요한 것은 구조다' 정도가 될 수 있겠다.

그러고 나서 <도망친 여자>(2020)를 보았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그 전의 영화들이 의미라는 것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그것을 도출해내려는 시도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면, <도망친 여자>는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배우라는 육체와 자연이라는 이미지와 인물 간 거리라는 공간으로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올해 초 개봉한 <인트로덕션>(2020) 또한 그러했다. 논리적으로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의 경과와 공간의 전환 사이에 존재하는 3막 구조는 극단적 단순화를 통해서 오히려 구조를 지우고 있다고 느껴졌다. 점점 최소한의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해가며 영화적 요소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영화 매체에 대해 질문하던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구조 또한 쌓아 올리지 않기 시작했다. 반면 <도망친 여자>와 <인트로덕션>의 비평들에서는 구조라는 말보다 몸의 각도, 포옹 같은 단어들이 더 잦게 눈에 띄게 되었다. 그 어떤 홍상수의 영화보다 낯선 두 편의 영화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영화 세계를 휩쓸고 간 것일까. 구조는 사라지고 육체만이 남았다. 혹은 육체만을 읽을 수 있다.

 

ⓒ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당신얼굴 앞에서>(2021)는 <도망친 여자>와 <인트로덕션>에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육체라는 존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영화다.(혹은 육체를 읽을 수 있는 영화다) 상옥(이혜영)은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심호흡을 한다. 정옥(조윤희)은 살이 쪘다는 상옥의 말에 반박하며 몸이 야위어 보인다고 말한다. 아침으로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먹자는 정옥의 말에 상옥은 온몸을 지탱하듯 양손으로 허리를 붙잡고 일어난다. 그 뒤로 정옥과 함께 공원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햇빛을 손으로 가릴 때, 공원의 다리 아래에 들어가 어정쩡한 자세로 담배를 피울 때, 옷에 묻은 떡볶이 국물을 가리기 위해 몸을 움츠리며 코트를 여밀 때, 자신이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을 찾아와 2층에서 옛집 주인(김새벽)과 아이(최재현)의 대화를 내려다볼 때, 귀신처럼 나타난 지은(김시하)을 양팔로 안을 때.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에서 등장했던 욕망과 자기 파괴로서의 남성의 육체, 모든 것을 버티고 굳건하게 서 있는 듯했던 김민희의 육체와 달리 상옥의 몸은 그 어떤 것보다 불안하고 나약해 보인다.

그런 상옥이 재원(권해효)과의 술자리에서 건네받은 기타를 치는 장면과 재원과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이전의 홍상수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던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길고 얇은 손으로 기타 줄을 하나씩 누르고 반대 손으로는 기타 줄을 튕기며 어설픈 연주를 이어나가는 상옥. 밖으로 나온 뒤에는 그 손으로 우산을 붙잡고 반대 손으로는 담배를 건네받으며 술에 취해 위태롭게 서 있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며 세상이 흔들리지만 섬세한 손가락의 운동과 선명하게 들리는 기타 선율은 그가 죽을 미래에도 불구하고 앙상하게나마 남아있는 현재의 육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붙잡는 행위(우산을 잡고, 담배를 입에 물고, 재원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듯한 행위)'는 그 나약한 몸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의지를 대변한다.

그렇게 다리를 하나하나씩 내디디며 세상에 꼿꼿이 서 있으려 하는 상옥의 육체는 다음 날이 되어 소파에 뉘어있다. 종의 육체에서 횡의 육체로. 영화가 소파에 누워있던 상옥으로부터 시작해서 서 있는 상옥을 거쳐 다시 누워있는 상옥으로 돌아오는 점에서 보았을 때, <당신얼굴 앞에서>는 서 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려는 상옥이 누워있음으로 미래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야 마는 영화이다. 마치 재원이 온몸으로 눈을 맞으며 서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을 설명했던 것처럼, 상옥은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사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가 이내 다시 쓰러져 버린다.

 

ⓒ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세계를 자의적으로 구성하는 메타적인 구조로 작동했던 홍상수의 영화는 <도망친 여자>와 <인트로덕션>을 거쳐, <당신얼굴 앞에서>에 이르러서야 현존하는 육체라는 구체적 존재에 도달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소거하고 남은 순수한 이미지. 지금까지의 홍상수의 영화가 '영화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해왔다면, <당신얼굴 앞에서>는 '이것만으로 영화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아가 구조라는 추상적 기호를 통해 말해왔던 것과 달리 육체라는 현실을 통해 직관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를 증명하듯 <당신얼굴 앞에서>는 그의 어떤 영화보다 살에 맞닿는 두려움과 연민의 정서를 안긴다.

적어도 <도망친 여자>와 <인트로덕션>까지 최소한의 구조를 통해 세계를 다층적으로 구성하던 그가 <당신얼굴 앞에서>에서 새로운 층위의 시공간을 쌓아 올리려 하지 않은 점도 주목할만하다. 정옥의 꿈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불러오려는 상옥의 시도가 현재의 시간으로 인해 실패하는 모습들은 오히려 현실과 비현실,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오로지 현재와 육체로만 존재하는 영화. '구조'라는 해석의 틀에 익숙해질 즈음에 홍상수는 한 발자국 더 우리에게서 도망쳤다. 지금 이때가 홍상수의 전성기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아직까지도 변화하고 있는 진정한 시네아티스트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어 보인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당신얼굴 앞에서
In Front of Your Face
감독
홍상수

 

출연
이혜영
조윤희
권해효
김새벽
신석호
하성국
서영화
이은미
강이서

 

제작 영화제작전원사
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85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1.10.21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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