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얼굴 앞에서' 그곳에는 현재뿐이다
'당신얼굴 앞에서' 그곳에는 현재뿐이다
  • 선민혁
  • 승인 2021.11.18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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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이지도, 희망적이지도 않은 순간을 절묘하게 담아내었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그의 영화에서 항상 의미 있는 장면이나 주제의식을 발견한다는 뜻은 아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전에 보았던 그의 영화를 다시 보곤 하지만, 심지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사가 <우리, 선희>(2013)에 나온 것인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에 나온 것인지 구별해내지 못하기도 한다.

홍상수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씨네필들은 이번 작품이 이전의 영화들에 비교해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나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당신얼굴 앞에서>(2020)를 보고 난 직후인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이전작과 비교했을 때 분명히 낯선 부분이 있긴 하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이러한 내용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배우 활동을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상옥(이혜영)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와 동생 정옥(조윤희)의 집에 머문다. '왜 갑자기 돌아왔느냐'는 정옥의 질문에는 동생과 조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 답한다. 동생은 언니에게 정말 그 이유가 전부이냐고 묻는다. 관객들이 보기에도 무언가 다른 사정이 있어 보이는 상옥은 아침부터 낮까지 서울 근교의 신도시인 것으로 보이는 동생이 사는 동네에서 동생과 시간을 보내고 보고 싶었던 조카도 만난 뒤 다른 누군가를 만나러 서울로 떠난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 콘텐츠판다

그런데 약속장소인 인사동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상옥은 약속 시간을 조금 미루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고, 인사동 대신 이태원으로 향한다. 약속 시간까지 비게 된 시간에 어린 시절 살던 집을 방문해보기로 한 것이다. 집 건물은 그대로이며 현재는 누군가가 영업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집주인은 마당에서 추억에 잠겨 있던 상옥을 발견하고 마실 것을 재차 권하며 옛날에 이곳에 살던 분을 만나 너무 신기하다고, 잠깐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상옥은 약속 시간이 되기까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집주인의 어린 딸을 안아 주기도 한다.

인사동에서 상옥이 만나기로 한 것은 영화감독 재원(권해효)이었다. 이들은 술을 마신다. 재원은 과거에 상옥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며 자신의 신작에 출연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 제안으로 인해 상옥이 한국에 돌아온 이유가 밝혀진다. 상옥은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촬영을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물은 뒤, 제의를 거절하는데, 상옥이 살 수 있는 날이 그만큼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옥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재원은 충격을 받아 울기도 하며, 여태까지 보았던 상옥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된 관객들은 그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간 홍상수 영화에서 드물게 나타난 ‘반전’이 발생한 후, 상옥이라는 인물은 관객들에게 급격히 가까워진다. 왜인지 모르게 처연해 보였던 상옥의 모습이 이해되기 시작하고,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혈육과 과거를 찾은 그녀가 더욱 궁금해진다. 최근의 '홍상수 영화들'과는 달리 <당신얼굴 앞에서>의 경우 시기의 선후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시간적 배경 안에서 진행되는데,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태연하게 지나간 상옥의 하루-이틀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이러한 고민 이후에 내게 찾아온 것은 영화가 상옥의 하루-이틀을 꽤나 멋지게 그렸다는 생각이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 콘텐츠판다

상옥은 쓸쓸해 보이지만 슬퍼하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이후 좌절에 빠진 순간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러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곧 죽게 될 그녀는 태연하다. 경험한 적 없어 명확하게는 보이지 않는 죽음이라는 얼굴 앞에서 상옥은 태연하게 서 있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받아들이기로 한 상옥은 화창한 공원의 작은 다리 밑에서 몸을 웅크리고 담배를 피우거나, 생명력이 넘치는 어린아이를 안아주고 '예쁘다'고 말하거나 하며 그냥 현재를 산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 상옥이 주어진 현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한 인물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아름다운 드라마를 그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상옥이 현재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현재에서만 살아간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태연한 태도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상옥은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것을 기다릴 수 없고, 술을 마시며 다음 날 어디론가 함께 떠나 단편영화를 찍자고 약속한 재원은 술이 깨고 난 뒤에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통보한다.

오직 현재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옥의 모습은 그렇게 절망적이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이 모호한 순간에 처한 인물을 영화는 태연하게 담는다.  담담한 카메라에 담긴 상옥은 화려해 보였다가, 쓸쓸해 보였다가 한다. <당신얼굴 앞에서>에서 이러한 장면들을 경험하는 것은 분명히 인상적이다.

[글 선민혁, sunpool2@ccoart.com]

 

 

당신얼굴 앞에서
In Front of Your Face
감독
홍상수

 

출연
이혜영
조윤희
권해효
김새벽
신석호
하성국
서영화
이은미
강이서

 

제작 영화제작전원사
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85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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