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둘이 되려면 '하나 그리고 둘'
하나가 둘이 되려면 '하나 그리고 둘'
  • 이현동
  • 승인 2021.11.1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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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없는 것을 위해 간직해야 할 것"

내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영화로 타이베이시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나는 최근 타이베이에 변화가 발생한 방식과 이들 변화가 '타이베이 시민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탐구하려 한다.

대만 영화감독 에드워드 양(Edward Yang, 楊德昌)

'에드워드 양'은 인간의 보편성과 자신이 경험한 세계(타이베이)의 융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자신만의 '정직'한 방식으로 탐구하는 감독이다. 필자는 그의 영화를 무심코 보다가 로베르 브레송과 나루세 미키오 영화를 떠올린 적이 있다. 그가 그들을 언급한 인터뷰를 찾아보지도 않고 이 두 감독의 감성을 동시에 포착해낸 건 착잡하게 종결되던 인물들의 세상을 향한 공허하고도 비관적인 응시가 그의 영화에서도 여실히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브레송의 유작인 <돈>(1983)은 미시적인 동기에서 출발하여 자본이 도달하게 될 비극적인 결말을 연쇄적으로 묘사하고, 나루세 미키오의 <흐트러진 구름>(1967)에서는 남편을 죽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촉발된 사랑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지점에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들에서 삶이란 실체를 보게 된다. 또 촬영에 있어서 카메라의 시각효과들을 최대한 배제한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화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흥미롭게도 이전 작품인 <마작>(1996)에서 타이베이의 치부를 날카롭게 도려내던 것과는 별개로 장르적으로 로맨스로의 변용을 시도하면서 또 다른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점에서 그의 유작인 <하나, 그리고 둘>이 구축한 서사는 <마작>에 이어 이례적이며 비상한 구석이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연출했던 영화들의 주제와 감성들을 광의적으로 종합한 부분들이 유독 눈에 띈다. 특히, 중화민국이 건립된 직후를 살았던(추정되는) 할머니를 비롯한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의 모습까지의 연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과 그 연대를 지탱하던 할머니의 죽음 속에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은 태도는 인륜성에 대한 온당한 시선이자 에드워드 양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리틀빅픽처스

인간상에 대한 숙고

축복으로 가득 차야 할 결혼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건 상실의 아픔을 강렬하게 호소하는 이들의 음성이다. 아디(진희성)의 전 애인인 윤윤과 NJ(오념진)과 셰리(가소운)의 재회는 왜곡된 관계 속에 응집되어 있던 타이베이의 자화상과 연관된다. 거짓과 허위, 위선으로 점철된 세상을 남녀 관계를 통해 관철시켰던 에드워드 양의 영화코드는 타이베이가 갖고 있는 자본의 순환논리의 길에서 겪는 충돌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하나, 그리고 둘>에선 이 점을 약간 비스듬하게 내딛는다. 이를 비관적으로 대표하는 캐릭터가 아디라면 이를 약간 빗겨나가는 건 NJ이다. 허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아디는 병상에 누워 있는 할머니를 향하여 "사람들이 돈 빌리러 나한테 온다니까요. (…) 부자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어요"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을 위장하기 위한 거짓말이고, 친구가 3배로 돈을 불려준다는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그는 한낱 미신을 의지하며 자신의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도 망설이고 있는 무력한 전근대를 상징하는 인간상이다.

반면에 NJ는 정직한 인간상을 대변한다. NJ의 동료들은 일본인 사업가인 오타를 속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는 그러한 논지에 거리감을 둔다. 오타(이세이 오가타)의 발표가 끝나고 그의 계획을 평가하는 친구들과 분리된 채 생각에 잠긴 NJ는 분명히 다른 인간상을 지시하고 있다. 그는 동료들의 술책에 실망하고 장모에게 자신을 정직하게 털어놓는다. "제가 충분히 정직한 지도 모르겠어요. 솔직히 요즘 제가 확신하는 게 거의 없네요"라고 말하는 그는 아디와는 다른 인간상이다. 어쩌면 아디와 NJ의 인간상에서 인간의 앞과 뒤를 양면을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에드워드 양은 이를 양양이 촬영하는 카메라라는 장치로 훌륭하게 설명해낸다.

 

양양의 카메라

<하나, 그리고 둘>의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가족' 혹은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주제를 놀라울 정도로 집약하여 이미지화하는 건 바로 양양의 대사일 것이다. 양양(조나단 창)은 옆집에서 밤마다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듣고,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옆집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고 그 행위를 나무라는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뒤에선 알 수 없잖아요. 아빠가 보는 걸 난 못 보고, 난 보는데 아빤 못 봐요. 우린 반쪽짜리 진실만 볼 수 있나요?"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니까 반쪽짜리 진실만 보이는 거죠."

 

ⓒ 리틀빅픽처스

양양은 이 시점부터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기 시작한다. 이 행위는 카메라의 역할, 즉 영화의 역할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바로 영화인 것이다. 선생님은 양양이 촬영한 사진들을 보고 전위 예술이라면서 조롱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예술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태도로도 읽힌다. 이는 팅팅과 팡쯔(위방)가 나눴던 대화와도 대응된다. 팡쯔는 영화를 통해 2배의 삶을 더 경험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팅팅은 이를 부정하면서 현실주의를 내세운다. 그럼에도 팅팅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형상과 마주하는 건 현실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도달하는 영화적 환영으로 종결된다.

또한, 오타가 NJ을 향해 카드 마술을 하는 긴 롱테이크 장면에서 그 뒷면을 오랫동안 지켜보게 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그것이 단순히 겉보기엔 속임수에 불과할지라도 그 마술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마술을 당하는 대상자가 그 마술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부터 그 마술은 완성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오브제이다. 이는 대중들이 영화를 보는 시선과도 밀착되어 있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식별하지 못했던 사각지대(영화)와 개인을 마찰시킴으로 우리는 하나에서 둘을 보고, 둘에서 하나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교차 편집과 보이스오버

<하나, 그리고 둘>에서 등장하는 교차 편집은 흥미로운 접점을 양산한다. NJ와 셰리가 일본에서 재회하여 여행을 떠나는 장면과 타이베이에서 데이트하는 팅팅과 팡쯔, 이어지는 이성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양양이 구심점으로 연결된다. 첫 데이트를 회상하는 셰리와 NJ의 화면은 첫 데이트를 준비하는 팅팅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팡쯔와 팅팅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중년 남녀가 있는 화면으로 다시금 바뀐다. NJ가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화면이 영화관 앞에서 마주하는 팅팅과 팡쯔를 비추며, 보이스오버로 도쿄와 시카고 타이베이의 시간이 언급되면서 다시금 화면은 도쿄로 변한다. NJ는 "내가 처음 당신 손을 잡았을 때, 영화 보러 가려고 철도 건널목에 있었잖아"라고 말할 때, 화면은 타이베이 시먼딩 앞 횡단보도를 기다리던 팅팅과 팡쯔가 등장하고, 팡쯔가 손을 잡는 모습에서 도쿄로 넘어가 철도 건널목에서 손을 잡는 NJ와 셰리가 등장한다.

 

ⓒ 리틀빅픽처스
ⓒ 리틀빅픽처스

다시 카메라 구도가 팡쯔와 팅팅으로 전환될 때 나오는 "다른 시간, 다른 나이에, 하지만 땀이 배인 손은 똑같아"라는 중년 남녀의 화외음은 외화면밖으로 모든이의 풋풋했던 사랑의 회상을 동시에 점멸하면서도 시공간을 넘어선 보편에 대한 이야기로 점철된다. 그다음 날에 산사를 산책하면서 NJ는 초등학교 때부터 셰리를 좋아했었다고 말할 때, 초등학생인 양양으로 화면이 옮겨간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생긴 양양은 수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집에 돌아와 수영 연습을 한다. 이어서 팅팅과 팡쯔가 음악회를 관람한 후 호텔에 가는 과정에서 팡쯔는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도망가 버리게 되는데, 이는 NJ와 셰리가 연애시절 때에 NJ가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것과 동일한 모양새다. 실패에 대한 회상은 딸에게 전이되고 있음을 교차 편집하여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기억은 <하나, 그리고 둘>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연령에서 '보편적'으로 착상하는 사랑이란 이미지를 구현해 내고자 하는 에드워드 양의 기지가 단단하게 활용됐다. 그의 데뷔작이었던 <해탄적일천>(1983)에서 플래시백이라는 장치가 특정한 인물의 서사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데에 집중했던 것에 비해 유작인 <하나, 그리고 둘>에선 기존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중산층의 인물을 통해 느슨하면서도 시청각적으로도 유연한 방식으로 일상을 표출해냈다. 특히나 교차 편집에서 드러난 개별적인 쇼트를 하나로 잇는 편집 기술인 몽타주의 활용은 <전함 포템킨>(1925)의 에이젠슈테인이 보이는 것(쇼트)들의 결합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것(주제)을 창출해낸다는 도식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리고 둘>(2000)에서 '영화가 생겨난 후로 인간의 수명은 3배 늘어났다'는 팡쯔의 말과는 다르게 이 영화를 끝으로 에드워드 양은 생을 빨리 마감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삶의 경험이란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는 말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어 제목인 이이(一一)는 하나하나가 합쳐진 단어로 개체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이 나열된 개체가 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하나, 그리고 둘>의 균질적으로 드러났던 장면들을 회고한다면 각각의 시간과 공간을 경유하는 삶의 결말이란 것은 어쩌면 동일한 것으로 작동하는 것일 테다. 그렇게 양양의 편지에 "나도 다 컸나 보다"라는 말마따나 인간은 결국 그렇게 회상하면서 성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리틀빅픽처스

하나 그리고 둘
A One And A Two
감독
에드워드 양
Edward Yang

 

출연
오념진
Wu Nian Zhen
금연령Elaine Jin
켈리 리Kelly Lee
조나단 창Jonathan Chang
이세이 오가타Issei Ogata
진희성Hsi-Sheng Chen

 

수입|배급 리틀빅픽처스
제작연도 2000
상영시간 173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00.10.28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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