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77년 작 <결투자들>과 비교하여
리들리 스콧의 <라스트 듀얼>(2021)은 그의 1977년 데뷔작 <결투자들 The Duelists>(1977)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는 1800년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보나파르티즘의 열렬한 신봉자 페로우와 현실주의자인 두베르의 사소한 계기로 시작된 15년에 걸친 지독한 악연을 따라간다.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감독 특유의 촬영 기법으로 바로크 회화적인 영상미를 구현해 냈으며, 그의 할리우드 출세작인 <에일리언 1>(1979)의 감독을 맡게 된 첫 번째 발판이 된 영화이기도 했다. 특히, <결투자들>에서는 무려 5차례에 걸친 두 주인공의 결투 씬이 인상적으로 제시된다. 귀족들의 명예를 걸고 시작된 결투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고결하거나 우아하지 않다. 특히 진흙탕에서 벌어지는 결투 장면들은, 질긴 악연이 긴 세월에 걸쳐 인물을 모두 파국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40여 년이 지나 개봉한 <라스트 듀얼> 역시, 14세기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장 드 카루주(맷 데이먼)와 자크 르그리(아담 드라이버)라는 두 라이벌의 오랜 세월에 걸친 악연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결투자들>과 <라스트 듀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제3의 관점,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라는 여성의 시선이 두 남성 결투자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투자들>이 두 인물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2차원의 바로크 회화였다면, <라스트 듀얼>은 여기에 제3의 축을 더한다. 이로써 누구도 진실의 내막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먼 중세의 한 기이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해석하고, 그 속에 담긴 인물들의 욕망을 끄집어낸다.
SF 호러부터 디스토피아, 현대의 전쟁, 시대를 넘나드는 역사극까지 장르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돌파해 온 리들리 스콧이 이번 신작에서 어떤 새로운 시도를 했을지는 <라스트 듀얼>에서 기대되는 첫 번째 관전 포인트였다. 영화 외적인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면, 84세 현역인 노장 감독은 이번에는 14세기 중세 배경인 역사극에서 대부분 유럽 배우들이 아닌,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작업하는 도전을 감행했다. 특히,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으며 <굿 윌 헌팅>(1997) 이후 24년 만에 공동 각본을 맡게 된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중세 기사와 영주로 분해서 한 스크린에 같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되었다. 이들은 카루주와 르그리라는 두 남성 캐릭터의 관점으로 각본을 집필하고 연기했으며 (미국식 발음을 제외하면) 중세 시대의 캐릭터에 충실히 녹아드는 데 다분히 성공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감독은 여성 각본가이자 감독인 '니콜 홀로프세너'를 기용하여, 마르그리트 드 카루주의 입장에서 남성 중심의 서사를 전복하는 여성 입장의 대안 서사를 제시하도록 한다. 홀로프세너는 한 인터뷰에서 "모든 남성 중심 서사를 여성의 시선으로 바꿔보고 싶다"고 언급하며 각본 작업에 특별한 애착을 보이기도 했다.(Rotten Tomatoes) 가장 핵심 인물인 마르그리트를 연기한 조디 코머는 매 챕터마다 누구의 시점인지에 따라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표정 연기를 소화해내며 TV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 스크린에서도 존재감을 입증했다. 예컨대 조디 코머는 여러 매체에서, 다시 원정을 떠나는 장에게 "가지 마세요"(Oh no, please stay)라고 말하는 대사를 다양한 뉘앙스로 연기하며 마르그리트의 본심을 어느 순간에 드러내는 연기가 즐거웠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SCREEN RANT)
여성 서사에 '진실'이라는 방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라스트 듀얼>은 리들리 스콧의 다채로운 필모그라피 중 여성주의 장르의 계보를 잇는다. 리들리 스콧은 <에일리언1>에서 기존에 남성 중심이었던 SF 영화의 틀을 깨고 무명이었던 여성 배우 시고니 위버를 캐스팅한 일화로 유명하고, 가부장제의 궤도를 이탈한 두 여성이 허공으로 질주하며 진한 카타르시스를 남겼던 <델마와 루이스>(1991)는 여성주의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바 있다. 이제 그 계보를 잇는 다음 작품은 <라스트 듀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여성 인권에 있어서 최악의 시대였던 중세를 배경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복구해내는 작업은 여러모로 전작들과 궤를 같이한다. 또 한편으로, 이 영화는 약자층 혹은 소수자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도 자신만의 역사관을 구축하고자 해온 감독의 역사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십자군 전쟁을 기독교와 이슬람 양측에서 동등한 시각으로 다룬 <킹덤 오븐 헤븐>(2005)이 한 예일 것이다. 종합해 보면 <라스트 듀얼>은 리들리 스콧의 기존 역사적 관점과 여성주의적 관점을 흥미롭게 종합한 작품이다.
2. 적색 인물과 회색 인물의 충돌
<라스트 듀얼>의 내러티브는 동일한 하나의 서사가 각 인물의 시점으로 3번씩 반복되면서 점차 관객을 진실로 이끄는 구조이다. 주지하듯이 형식적으로나 소재적으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을 오마주 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첫 번째 챕터는 철저히 장 드 카루주의 관점에서 전쟁 영웅의 일대기, 순수했던 우정의 배신, 정숙한 아내와의 순결한 사랑, 정의를 되찾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로 그려진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같은 이야기가 상대편인 자크 르그리의 관점으로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그는 궁정의 전략가로 활약하고 억울한 중상모략과 싸우는 한편, 귀부인과 아름다운 로맨스에 빠진 기사로 자신을 스스로 묘사한다. 마지막 장인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은 이들과는 전혀 상반되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데, 챕터 제목에서 '진실(Truth)'이라는 글자가 끝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영화는 명백히 그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챕터 1과 2, 즉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과 '자크 르그리가 말하는 진실'은 그들의 이름처럼 서로 융화되지 못하고 서로 대척점에 있다. '카루주'의 이름에 담긴 붉은 색(rouge)은 피가 튀는 전장의 장수이자 무공을 세워 출세하려고 하는 태도와 동시에 그의 급한 성미와 혈기 넘치는 습성을 보여준다. 이와 반대로 '르그리'의 회색(gris)은 전형적으로 성직자의 무채색 복장을 떠오르게 한다. 이 색은 교회에서 글을 배우고, 무훈을 쌓지 않고도 궁정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는 르그리라는 인물을 상징한다. 또 한편으로는 음침하고 어두운 그의 비뚤어진 욕망을 표방하기도 한다. 아버지를 따라서 무훈을 세워 기사 작위를 받은 카루주와 달리 르그리는 영주 피에르(벤 애플렉)의 신임을 얻어, 카루주의 아내가 지참금으로 가져오기로 했던 가장 비옥한 오누르푸콩 땅을 피에르에게 하사받는가 하면, 벨렘 성 영주 자리를 카루주 대신 물려받기도 한다.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 둘의 악감정은 서서히 증폭되다가, 마르그리트에 대한 르그리의 강간 사실이 밝혀졌을 때 최고조에 이른다. 이때도 두 남성의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누구도 마르그리트를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르그리는 마르그리트를 연모하다가 벌어진 사고로 스스로를 변명하고, 카루주는 자신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자 재산권 침해라고 이야기한다.
제3장에서는 1, 2장에서 서술된 남성 화자의 내러티브들이 다시 번복된다. 카루주와 르그리 두 인물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마르그리트이다. 특히 마르그리트가 겪은 일들을 따라가다 보면 앞선 1, 2장이 자기애가 넘치는 남성들이 만들어낸 주관적인 신화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게 된다. 처음 등장 시에 그녀는, 결혼함과 동시에 중세의 관습대로 남편의 재산으로 귀속되고, 어떠한 발언권도 없이 닥쳐오는 상황을 목격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 현실적으로 실리를 취하기도 하고(남편을 크레스팽의 초대에 응하도록 부추기는 장면), 인물을 파악하고 나름대로 평가하기도 하는 등(친구와 르그리의 인물 됨됨이를 파악하는 창가 장면), 자신만의 관점과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르그리트의 서사가 이 중에서 가장 '진실'인 편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라스트 듀얼>의 원전으로 돌아가 보자면, 원 작가 에릭 재거는 이 세 인물의 속사정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철저한 고증은 물론이고 인물들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던져가면서 있는 그대로 진실에 다가가려 했다. 한 예시로, 르그리가 강간죄를 저지른 직후 당당하게 입막음하려 했던 의도를 작가는 르그리의 입장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르그리는 마르그리트가 친정 가문의 과거사에 대해 느끼고 있는 께름칙한 감정을 의도적으로 악용했을 수도 있다. 애당초 르그리가 마르그리트를 희생자로 점찍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가문의 오명에 덧칠하고 싶지 않은 마르그리트가, 이번 추문에 대해서도 침묵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 피에르 백작의 총신인 르그리가 아르장탕의 법정에서 우대받으리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에 비해 대역죄인 로베르 드 티부빌의 딸이자 백작의 가장 골치 아프고 반항적인 봉신 중 한 명인 장 드 카루주의 아내인 마르그리트는 처음부터 편견에 직면할 것이 뻔했다.
『라스트 듀얼』, 에릭 제거, orangeD, pp.116-117
이렇듯 마르그리트가 피해자가 된 배경에는 복잡하게 얽힌 권력 구조와 반역자 가문이라는 사회적 낙인 효과, 남성 귀족과 성직자가 누렸던 특권, 무지몽매했던 당대의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작가는 직접적으로 해설한다. 카루주보다 지능적이었던 르그리는 계산을 다 마친 후 마르그리트에게 진실을 덮고 침묵하라고 통보한 것이다.(현대 사회에서도 경제적인 이권이 걸렸거나, 가족의 불명예 때문에 덮여지는 성폭력 사건이 건재하고 그것을 다루는 영화들도 여전히 나온다는 것을 상기할 때, 이 문제는 동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최근 한국 독립 영화계에서는 김미조 감독의 <갈매기>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한 사건에 대한 각 인물들의 심리와 맥락을 작가가 홀로 서술하는 원전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가는 대신에, 영화는 세 인물의 관점을 연기의 뉘앙스나 연출로 재해석한다. 그중에서도 인물들의 속내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기능, 작가의 전지적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인물은 물론 두 남성 캐릭터가 아닌, 마르그리트라고 할 수 있다.
3. 진실이 돌려주는 대가
남편의 의심, 주변의 의혹, 시어머니의 만류, 무고죄 판결 났을 경우에 화형이라는 리스크까지 감수하면서도 마르그리트는 끝까지 진실을 증언한다. 그전까지는 마치 누군가가 번식을 위해 소유한 '암말'처럼 기능하기 위해 성안에 갇혀 있던 마르그리트는 처음으로 운명의 키를 쥐게 된다. 르그리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하게 된 장 드 카루주는 왕에게 상고하여 르그리와의 결투 재판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투 재판이란, 결투에서 이긴 자는 신이 도와준 자이므로 옳다는 중세식 사고관에서 나온 결투 방식이다. 카루주-르그리의 결투가 워낙 처참했기 때문에 이 재판은 프랑스에서 있었던 마지막 결투 재판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오프닝에서 비장하게 결투에 참가하는 모습은, 이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에, 인물들의 욕망처럼 잔인하고 폭력적인 결투로 변질된다. 두 기사가 서로를 창(랜스)으로 말에서 떨어트리고 나자, 이들은 본격적으로 처절하고 무자비한 육박전을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결투자들>이 그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결투는 명예를 되찾기 위한 고결한 기사들의 전투가 아니라, 탐욕과 무지 그리고 비열함과 위선으로 가득 찬 두 인간이 서로를 향한 살의를 가감없이 내뿜는 자리다. 끝까지 진실을 외치는 마르그리트의 두려움에 찬 표정과, 죽기 전까지도 끝까지 진실을 부정하는 르그리의 태도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 할 수밖에 없다. 이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에, 우리는 모두 진실이 묻히고 무고한 자가 무지몽매한 이유로 벌을 받는, 최악의 결과를 걱정하게 된다.
다행히도 마르그리트는 운명을 건 내면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쥔다. 하지만 결투의 결말을 알고도 신과 사회가 되찾아준 정의가 과연 무엇인지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승리에 취해있는 장을 뒤따라가는 마르그리트의 어두운 표정이 모든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장 드 카루주는 몇 년 내에 십자군 전쟁에서 사망하고 마르그리트는 살아남는다. 그녀는 배 속의 아이를 지켜 내고, 능력을 발휘해 성지를 번영으로 이끌며 끝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마치 그녀의 윗세대 여성(시어머니)처럼, 진실을 함구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닌, 진실을 통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극적인 한 사례를 만든 것이다. 이렇듯 유럽에서 가장 어두웠던 천 년의 암흑기가 저물고 새로운 여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마지막 결투>는 장중히 한 시대의 막을 내린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The Last Duel
감독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출연
맷 데이먼Matt Damon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
조디 코머Jodie Comer
벤 애플렉Ben Affleck
해리엇 월터Harriet Walter
나다니엘 파커Nathaniel Parker
샘 하젤딘Sam Hazeldine
이안 피리Ian Pirie
수입|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52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1.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