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를 위한 제도 밖의 '사람'을 주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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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상현
  • 승인 2021.11.08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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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제제 타카히사 감독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서도 끔찍한 사건을 거울삼아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휴머니티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제제 타카히사 감독의 작풍은 예외 없이 유지된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서도 끔찍한 사건을 거울삼아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휴머니티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제제 타카히사 감독의 작풍은 예외 없이 유지된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6피트(약 180센티미터)의 훤칠한 신장, 살집 없는 매부리코, 각지고 돌출한 턱이 결단력을 강조하는 인상의 셜록 홈스가 등장하는 아서 코넌 도일의 소설 몇 편을 읽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최고학부 출신에 전문가 뺨치는 과학지식을 갖추고 다국어에 능통하다는 설정에서 보이듯 보통사람과 아득히 거리가 있는 히어로가 지적유희처럼 범죄현장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보다 몰입이 쉬웠던 것은 왕실의 기사작위까지 밭은 도일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이다. 1809년 1월 19일 보스턴에서 유랑극단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고아가 된다. 성장해서도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건강마저 잃고 마흔 살 되던 해 거리에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발표 당시 파리의 특정 지명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작가의 실명조차 내지 못했던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은 올해 180주년을 맞는 추리문학사의 시발점에 자리해 있다.

내용을 파고들어가 보면 차별성은 보다 극명하다. 화자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가난한 룸펜 오귀스트 뒤팽은 근대의 대명사인 합리와 이성에 근거해 사건에 다가가지만 결국 그를 기다리는 것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광명세상'이 아니라, 하위포식자의 한계로 여태 전근대의 늪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약자들과, 그들의 희생을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로 전제하는 시대의 민낯이다. 포는 그렇게 '순수문학 대 장르문학'이라는 원리주의의 이분법을 넘어, 인간과 사회를 사실적이고도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미학적 성취를 이뤄냈다.

한국의 관객들을 만날 때, 그는 늘 진지면서도 다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시절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아시아영화가 코리언뉴웨이브의 작품들이었으며, 한국의 국제영화제와도 어언 20년 넘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부산국제영화제 온라인 GV에 참가하고 있는 제제 타카히사 감독.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한국의 관객들을 만날 때, 그는 늘 진지면서도 다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시절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아시아영화가 코리언뉴웨이브의 작품들이었으며, 한국의 국제영화제와도 어언 20년 넘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부산국제영화제 온라인 GV에 참가하고 있는 제제 타카히사 감독.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상냥하고 수줍은 성격의 주인공이 예측불허의 공격적인 성격인 연인을 만나 폭주하는 내용의 장편독립영화 <히스테릭>으로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와 만난이래, 20년 이상 한국의 국제영화제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거장 제제 타카히사가 필자를 열광시키는 것도 포의 이러한 성취를 발전적으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4년 간 미궁에 빠져 있던 유괴사건은 담당 수사관들의 일상조차 앗아가고(<64 파트12>), 학창시절의 집단 괴롭힘은 '괴물'을 만들어내며(<우죄>), 고령화와 공동화로 피폐한 지역사회는 이방인을 증오의 제물로 삼는다(<약속의 땅>).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서도 끔찍한 사건을 거울삼아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제제 감독의 작풍은 예외 없이 유지된다.

내용은 이렇다.

동일본대지진 발생 9년 후의 어느 날, 피해지역인 미야기 현에서 손발이 묶인 채 아사한 구청 보건복지 담당 공무원(에이타 분)의 시신이 발견된다. 지인들에 따르면 그는 '다시없을 선인에 인격자'였다. 강력범죄 전과와 수상한 행적으로 인해 용의자로 몰린 토네(사토 타케루 분)는 사면초가의 상황. 하지만 그 자신 토네처럼 동일본대지진으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껍데기뿐인 일상을 살아온 형사 토마시노(아베 히로시 분)는 그의 모습을 담담히 주시하며 '보여주기식 약자 보호 시스템'이 배태한 악몽을 해부해나간다.

코로나 19의 와중에 부산을 찾은 제제 감독을 만났다.

핑크영화, 호러, SF, 복수의 실존인물이 등장하는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폭넓게 만들어 왔지만 역시 제제 타카히사 감독이 영화작가로서 가장 두각을 보이는 장르는 서스펜스의 요소로 관객을 몰입시키다 결말부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이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핑크영화, 호러, SF, 복수의 실존인물이 등장하는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폭넓게 만들어 왔지만 역시 제제 타카히사 감독이 영화작가로서 가장 두각을 보이는 장르는 서스펜스의 요소로 관객을 몰입시키다 결말부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이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홍상현

데뷔 30주년을 맞아 발표하신 <약속의 땅>이래 2년 만에 다시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셨습니다. 이번 초청은 인류사적 재난인 코로나 19의 와중에 이루어졌기에 더욱 감회가 특별하실 것 같은데요.

제제 타카히사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화제가 열린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간 여러 번 신세를 졌던 부산영화제가 말이죠. 전작인 <국화와 단두대>는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안프로젝트마켓(APM)의 지원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이번 초청이 더 감사하고 기쁩니다.

 

홍상현

2000년 <히스테릭>, 2001년 <러쉬>, <도쿄 X 에로티카> 등이 연속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이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 등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오고 계신데요. 한국영화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제 타카히사

20대이던 1980년대 초반, 코리언뉴웨이브로 일본에 소개되었던 배창호 감독과 이장호 감독의 작품에 열광했습니다. 특히 <고래사냥>, <바보선언> 등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영화들이었지요. 제가 처음 접했던 새롭고 자극적인 아시아영화는 흔히들 언급하는 허우 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의 타이완영화가 아니라 바로 한국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조감독 생활을 하던 1985년 무렵 참여한 한국촬영에서의 기억도 잊을 수가 없네요. 카빈총을 든 병사들이 보이던 도시의 긴장감과 대조적으로 시골풍경은 어딜 가든 농촌에서 자란 제 그리움을 자극했습니다.

당시부터 쭉 한국영화를 즐겨보고 있는데요. 새로운 재능을 가진 영화인들이 끊임없이 출현하는 현상에 큰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작품도 여러 편 봤고요. 최근에 봤던 영화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벌새>를 꼽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는 제가 활동하는 일본영화계에 주로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최근에는 모무들 엔터테인먼트와 일반성(generality)을 지니는 것들에만 집중하다 보니 작은 영화나 실험성 강한 작품의 제작이 어려워지고 있지 않나 싶어요. 오락성을 현재까지 이어져온 수준 이상으로 요구받다 보니 비즈니스, 즉, 상업적 흥행요소가 부족한 기획의 경우, 현실화시키기가 너무 어려워졌거든요. 어떻게든 상황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제 타카히사 감독의 미스터리에도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강력사건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서사의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범죄에 잔혹성’이 아니라 ‘누군가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고 가는 잔인한 사회’이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제제 타카히사 감독의 미스터리에도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강력사건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서사의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범죄에 잔혹성'이 아니라 '누군가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고 가는 잔인한 사회'이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홍상현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좀 재미있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제 타카히사라는 본명 이외에도 우스노 로, 카루라, 코가 산로, 남극1호 등의 다양한 필명을 사용해오셨는데요.

제제 타카히사

핑크영화 시절 제가 쓴 시나리오에 올린 필명입니다. (웃음)

일본영화계에서는 지금보다 조금 앞 세대 사람들이 이런 우스꽝스러운 필명을 사용했던 일이 많아요. 예컨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은 스즈키 세이준 감독은 여덟 명이 같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의미에서 구루 하치로(八郎)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역시 같은 상을 받은 와카마쓰 코지 감독의 핑크영화에 는 각본가로 아다치 마사오, 야마토야 아츠시 같은 이름이 등장하지만 다 동일인이었지요. 아마 활동에 익명성이 필요했던 학생운동 시절의 경험과 연관돼있지 않을까요? 프랑스의 장 뤽 고다르 감독이 활동하던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 그룹"처럼 말입니다.

익명을 통해 진정한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이 "정치의 시대"에는 분명 존재했습니다. 이런 영향도 있어, 기존의 사회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뜻을 담아 핑크영화를 만들던 30대 시절 다양한 필명을 썼어요.

 

홍상현

하긴, 많이들 오해하지만 결국 핑크영화란 포르노그래피로써 육체를 소비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저항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노출이나 성적인 묘사 등을 활용했으니까요.

다음은 필모그래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핑크영화, 호러, SF, 복수의 실존인물이 등장하는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폭넓게 만들어 오셨지만 역시 영화작가로서 가장 두각을 보이신 장르는 서스펜스의 요소로 관객을 몰입시키다 결말부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분야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제 타카히사

영화에 관심이 많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 특히 범죄를 다루는 일본영화에 끌렸던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청춘의 살인자>, <복수는 나의 것> 같은 것들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는데요. 실제 범죄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게 많았죠. 또한 이런 영화들은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의 사회상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경향이죠.

범죄물의 매력은 '왜 이런 비참한 사건이 일어나는 걸까?' '어째서 이런 복잡한 경위를 거쳤을까,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사회와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을까?' 등,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인생처럼. 일단 이 '수수께끼'를 풀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졌어요. 핑크영화에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오리지널 스토리 작품을 만들어 본 것도 그런 맥락에서고요.

이런 탐구가 어느 정도의 레벨에 도달했을 무렵 내놓은 작품이 <검은 드레스의 여자>입니다. 당시를 기점으로 핑크영화가 아닌 장르의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만들게 됐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파 미스테리에 해당하는 작품은 별로 많지 않았는데, 그러다 만들게 된 게 <64 파트1ㆍ2>예요. 쇼와 64년, 즉 1989년에 일어난 유괴사건에서 스토리가 시작되는 서스펜스영화죠. 저 자신의 흥미와 연출하는 작품이 일치하게 된 겁니다. 이는 말씀처럼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을 꾸준히 만들게 되는 외적요인으로도 작용했고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한다지만 결국 관성에 갇혀있을 뿐인 제도의 부조리를 부각시키기 위해, 제제 타카히사 감독은 원작에서 그저 악인으로만 묘사되던 공무원(에이타 분)을 제도의 틀 안에서 어떻게든 사회를 좋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그 부조리함으로 인해 심한 일을 저질러 버린 사람들로 그려낸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가난한 이들을 구제한다지만 결국 관성에 갇혀있을 뿐인 제도의 부조리를 부각시키기 위해, 제제 타카히사 감독은 원작에서 그저 악인으로만 묘사되던 공무원(에이타 분)을 제도의 틀 안에서 어떻게든 사회를 좋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그 부조리함으로 인해 심한 일을 저질러 버린 사람들로 그려낸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홍상현

한편, 감독께서 발표하시는 작품들은 추리물로서도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걸로도 유명한데요.

제제 타카히사

어릴 적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어요. 아가사 크리스티, 에도가와 란포, 마쓰모토 세이초 등의 소설을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즐겨 읽었습니다. 중학생 시절에는 '아가사 쿠리스케'라는 필명으로 밀실 살인을 다룬 추리소설까지 썼는데요. 이런 일들이 제 작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에 특히 관심이 있는 건,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살아가려 하는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는 한편, 결국 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건 사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일본의 1970년대는 고도성장기로 변화의 시대인 동시에 여러 가지 뒤틀림이 일어난 시대이기도 했지요. 이런 시대를 대경으로 하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지금도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를 읽는 것을 좋아하고요.

 

홍상현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안녕, 드뷔시』 등이 출판되어 다수의 팬이 존재하는 추리물의 거장 나카야마 시치리 작가의 장편소설이 원작입니다. 그러나 국제영화제에 초청될 만큼 완성도를 인정받은 작품은 감독께서 연출을 맡은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이 처음인데요. 필자로서는 원작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영화를 전혀 새로운 하나의 작품으로 재창조해내는 감독의 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을 '제제 타카히사 영화'로 재창조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에 가장 힘을 기울이셨나요.

제제 타카히사

가난한 이들을 구제한다지만 결국 관성에 갇혀있을 뿐인 제도의 부조리를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원작에서는 그저 악인으로만 묘사된 공무원들을 단순한 악인으로만 그리지 않았어요. 제도의 틀 안에서 어떻게든 사회를 좋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그 부조리함으로 인해 심한 일을 저질러 버린 사람들로 그렸지요.

또, 원작에서는 동일본 대지진은 단순한 시간적 배경으로 밖에 그려져 있지 않았는데요. 저는 이 천재가 갖는 의미를 좀 더 크게 다뤘습니다. 여기에 끔찍한 사건의 부조리함이 담겨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어요. 천재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맞서려고 해도 그저 무력함을 느낄 뿐인 상대죠. 저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인재와 천재, 즉, 제도의 부조리함과 지진이라는 두 가지 난관을 동시에 내세우고, 여기 맞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이게 영화화의 목적이기도 했고요.

제제 타카히사 감독은 말한다. “천재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맞서려고 해도 그저 무력함을 느낄 뿐인 상대죠. 저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인재와 천재, 즉, 제도의 부조리함과 지진이라는 두 가지 난관을 동시에 내세우고, 여기 맞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이게 영화화의 목적이기도 했고요.”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제제 타카히사 감독은 말한다. "천재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맞서려고 해도 그저 무력함을 느낄 뿐인 상대죠. 저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인재와 천재, 즉, 제도의 부조리함과 지진이라는 두 가지 난관을 동시에 내세우고, 여기 맞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이게 영화화의 목적이기도 했고요."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홍상현

전작인 <약속의 땅>에서는 농촌지역의 고령화 문제를 다루셨고,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나라가 이른바 '사회보장개혁'이라는 이름아래 정부가 자행한 사회안전망의 파괴를 비판하고 계신데요.

제제 타카히사

물론 격차와 분단이라는 사회적 화두가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와 관련된 양상이 특히 심각하게 불거지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이후, 그러니까 국가정책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가 채택되고 나서부터가 아닐까 해요.

정치적으로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세계 곳곳에서 독선적인 위정자가 출연하는 한편, 우경화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인류는 경제적인 성장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정책의제로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이상과 이념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이런 생각은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의 서사를 구성하는 큰 축이 되었습니다.

 

홍상현

여기 또 하나,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인도 악인도 없다는 전제하에 인물의 반전을 보여주는 감독의 세계관이 살해당한 인격자들의 이면을 통해 구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제 타카히사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제도 자체의 부조리를 부각시키기 위해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의 등장인물을 단순한 위선자나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한두 가지로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죠. 이분법적 선악구도로 구분하기도 어렵고요.

서양의 세계관은 대체로 죽음과 삶, 선과 악, 피안차안 등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편입니다. 반면, 동양의 세계관은 모든 존재와 사물에 서로 대조적인 두 가지 측면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죠. 이는 제 세계관과도 맞물리는 부분이 있고요. 따라서 제 스토리텔링 안에서도 양의적인, 혹은 다양한 측면을 가진 이야기나 인물을 그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습니다.

사토 타케루 배우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의 촬영기간 내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도 혼자 한 구석에 앉아 ‘토네 야스히사’라는 인물에서 사토 배우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사토 타케루 배우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의 촬영기간 내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도 혼자 한 구석에 앉아 '토네 야스히사'라는 인물에서 사토 배우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홍상현

현재 영화계에서 가장 핫한 젊은 배우의 한사람인 사토 타케루 배우가 열연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구라도 살인범으로 의심할만한 캐릭터로 등장해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모습으로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는데요.

제제 타카히사

사토 배우와는 <8년을 뛰어넘은 신부>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당시부터 참 명석한 연기자라고 느꼈습니다. 작품의 총체적 목표ㆍ방침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물론,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연기를 하고, 그 결과, 어디로 향해야 할지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죠. <8년을 뛰어넘은 신부>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제작에 참여했어요.

여기서 작업의 형태를 잠시 소개하면, 일단 내용과 관련한 메인아이디어와 방침이 나오면 제작진과 사토 배우가 의견을 교환해요. 그 뒤에 개고가 나오면 다시 만나는 거죠.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촬영현장에서 마주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기에 전념합니다. 현장에서는 당장 앞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반응하면서 거침없이 연기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거지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의 촬영이 진행될 때에는 내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도 혼자 한 구석에 앉아 '토네 야스히사'라는 인물에서 사토 배우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지냈어요. 그만큼 집중해서 배역에 몰입했던 겁니다.

 

홍상현

이제는 '대배우'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아베 히로시 배우가 사토 배우와 훌륭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준 게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토마시노 형사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어떤 지점에 포인트를 두셨나요.

제제 타카히사

아베 배우가 연기하는 토마시노라는 캐릭터의 열쇠는 '살아남아버린' 사람이라는 겁니다. 배우자를 잃고 아들의 생사조차 모르는, 그렇게 허공에 매달린 상태로 동일본대지진 이후 10년 세월을 보낸 사내. 살아남은 자로서 공통되는 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극중의 범인들에게도 내재적 접근이 가능하죠. 반면, 비슷한 삶의 궤적을 거쳤으되 스스로의 상실감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려는 면모 또한 보여줍니다.

드라마의 인물로 특수성을 부여했지만 실제로도 '살아남아버린' 사람의 마음은 동일본대지진을 피해지역에서 경험한 많은 분들의 공통된 정서인 것 같습니다. 물론, 비단 동일본대지진이 아니라도 갑작스런 재난을 겪은 분들의 마음속에서라면 흔히 발견되는 트라우마 일지도 모르지만요, 그런 면에서 관객에게 소구할 수 있는 보편성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베 히로시 배우가 분한 토마시노 형사라는 캐릭터의 열쇠는 ‘살아남아버린’ 사람으로서의 의식이다. 배우자를 잃고 아들의 생사조차 아직 모르는, 그렇게 허공에 매달린 상태로 동일본대지진 이후 10년 세월을 보낸 사내. 살아남은 자로서 공통되는 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극중의 범인들에게도 내재적 접근이 가능하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아베 히로시 배우가 분한 토마시노 형사라는 캐릭터의 열쇠는 '살아남아버린' 사람으로서의 의식이다. 배우자를 잃고 아들의 생사조차 아직 모르는, 그렇게 허공에 매달린 상태로 동일본대지진 이후 10년 세월을 보낸 사내. 살아남은 자로서 공통되는 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극중의 범인들에게도 내재적 접근이 가능하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홍상현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연기경력은 벌써 7년째입니다만) 키요하라 카야 배우의 연기변신이 실로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은 분명 그녀의 연기인생을 전후로 구분하는 작품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제제 타카히사

키요하라 배우는 아직 젊지요. 그래서 감각적으로 뛰어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에 자신의 역할을 명확하게 이미지화해 놓고 거기 맞춘 연기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치밀한데요. 하지만 촬영 초반에 저는 저대로 감독으로서 키요하라 카야라는 배우가 가진 다양한 면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어떤 장면을 촬영하다가 '방금 보여주신 표정과 좀 다른 표정을 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단 자신이 미리 설정해 놓은 이미지 콘셉트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그 대목에서 강하게 '이렇게 해 달라니까요'라고 밀어붙이기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랬더니 정말 대단히 기쁘게도 이런 제 예상이 들어맞았어요. 촬영이 후반으로 갈수록 '겁먹은 야수'를 연상시키는 표정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장면에 주어지는 상황이 그런 연기를 짜낼 수 있게 해준 걸까요. 혹은 때마침 키요하라 배우의 내면에서 변화가 시작되는데 이게 다른 배우들의 연기와 맞물리면서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아, 그리고 편집 과정에서 컷이 많이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테이크 시간을 항상 길게 잡고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키요하라 배우의 계획은 아마 그 시간 속에서 느껴지는 뭔가를 카메라 앞에서 풀어내는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만 19세인 키요하라 카야 배우. 아역 출신으로 이미 데뷔 7년차의 짧지 않은 경력을 가진 그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관객의 예상을 뒤집는 캐릭터로 분해 놀라운 연기변신을 보여주었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올해 만 19세인 키요하라 카야 배우. 아역 출신으로 이미 데뷔 7년차의 짧지 않은 경력을 가진 그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관객의 예상을 뒤집는 캐릭터로 분해 놀라운 연기변신을 보여주었다. (C)2021 IN THE WAKE Film Partners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10년이 어떤 시대였는지에 대해서 생활보호라는 사회제도를 통해 바라보는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코로나 19로 세계가 고통 받고 있는 지금, 국가나 행정의 대응이 추궁 받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나름 적확한 현재성을 지니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영화를 통한 교류로 평화로운 미래를 일구는데 공헌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부디 존경하는 한국 관객 여러분과 일반상영관에서 이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을 하루 앞둔 목요일, 제제 감독의 신작 <실: 인연의 시작>이 국내 개봉했다. 2019년 부산을 찾았을 당시 "사람과 사람의 유대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며 소개한 작품.

그밖에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였던 『말더듬이 선생님』을 쓴 시게마츠 기요시의 동명소설이 원작으로 아베 히로시와 키타무라 타쿠미를 부자 역으로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던 <솔개>가 개봉 대기 중이며,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구소련시절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던 실존인물들의 실화를 그린 <수용소에서 온 유서>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코로나 19의 와중에도 식을 줄 모르는 거장의 경이로운 열장.

늘 설레는 그와의 만남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어질 듯하다.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ㆍ일 양국 매체에 분석 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시미즈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 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 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새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주최 디지콘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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