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트' 나쁜 아버지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아네트' 나쁜 아버지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 이현동
  • 승인 2021.11.02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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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네트의 탄생과 레오 카락스"

"오직 머릿속에서만"라는 보이스오버를 장착한 <아네트>(2021)의 서두는 레오 카락스와 그의 딸인 나스탸 골루베바 카락스의 지휘로 시작된다. 곧이어 이어지는 사운드트랙 'So May We Start?'과 배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2의 장 뤽 고다르로 지목된 레오 카락스의 또 다른 변주된 방식의 영화가 탄생했음을 목도하게 한다. <아네트>가 <홀리 모터스>(2013)의 후발주자로 그의 필모를 통틀어 독특한 장르적 변용을 뮤지컬로 연계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가 오래전부터 바랬던 소망(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 연출)을 성취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주제를 추동하는 오프닝은 분명히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반추하는 내용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번 영화의 이야기를 한마디로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나쁜 아버지의 이야기'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놀이'를 위한 목적주의의 종말

남성의 전형성을 상기시키는 헨리(아담 드라이버)의 장대한 신체는 스탠드 코미디언의 우스꽝스러운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결을 달리한다. 초록색 목욕 가운을 입고 무대를 활보하는 헨리의 자극적인 자기 과시는 자기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드러내는―남성성을 필두로 한―허위의식의 집합체로 자리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코미디의 왕>(1983)에서 루퍼트 펍킨(로버트 드 니로)의 코미디가 자기를 파괴하는 형태의 코미디였다면, 헨리는 정반대로 야생의 형태로 관객들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헨리의 무대와는 다르게 안(마리옹 꼬띠아르)은 우아한 움직임과 음률로 관객들을 매혹하는 오페라 가수이다. 전통·보편적 장르인 오페라를 구사하는 안은 철저한 자기 관리를 위해 사과와 물을 지속해서 먹고 마신다.

두 남녀의 이미지의 극명한 대비는 암묵적으로 전개될 비극적 서사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도시를 상징하는 무대와 자연을 경관으로 묘사되는 집이 나타내는 이질적인 배치는 그들의 직업과 분위기, 즉 이미지의 관계를 지목하는 상징적 장소다. 이와 유사하게 <퐁네프의 연인들>(1991)에서 노숙자로 등장하는 알렉스와 미쉘이 거주하는 장소가 파리를 상징하는 '퐁네프'라는 지점은 레오 카락스의 장소 사용법이 인물의 결핍을 전략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상이한 이미지의 장력만큼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르의 옷과 이미지는 판이한 차이의 착상은 혼재된 관계를 형상화하는 물질들이다.

헨리와 안의 관계는 초반에 로맨틱한 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사랑의 동기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우발적이며, 어찌 보면 운명적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는, 두 사람의 관점과 태도의 차이만큼이나 긴 유통기한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들의 성관계는 그저 본능을 충족하려는 희락의 순간으로 작동하며, 이 둘의 양태를 고스란히 갖고 태어난 아네트의 외형에는 살덩이가 아닌 놀이를 위해 제작된 인형의 모습이 실체화된다. 아네트는 둘의 사랑이 '놀이'의 오브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아이의 출생 이후에 헨리의 코미디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는다.

 

헨리는 가장 낭만적인 장면이었던 성관계를 회상하며, 안을 당시에 발로 간지럽혀서 죽이려고 했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이제 헨리의 코미디를 납득할 수 없는 범위로 여기고 욕을 퍼붓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만적인 행위는 안을 향한 잠재적인 태도와 밀접하게 조응하고 있으며, 파국적인 종국을 가리키는 예고이다.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자는 이유를 빌미로 아네트와 부부는 요트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헨리는 요트 안에서 잔뜩 술을 마시고, 안과 춤을 추다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로 안을 떨어뜨린다.

이후 어떠한 슬픔도 간직하지 않은 헨리의 잔혹한 내면에는 이미 '안'의 위치가 그의 또 다른 성공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그의 성공은 아네트가 안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이용한 것이다. 살해 의혹을 품고 있었던 이전에 안과 연인 사이였던 지휘자(사이몬 헬버그)는 헨리에게 접근하지만 그 역시 헨리의 이용 수단일 뿐 그 이하도 아니다. 안의 죽음을 추궁하는 지휘자에게 주어지는 헨리의 답변은 죽음이다. 이런 걷잡을 수 없는 헨리를 멈추게 하는 건 아네트다. 마지막 공연에서 녹색 복장을 하고 있는 자신의 페르소나인 아네트를 감격하며 지켜보던 헨리에게 돌아오는 건 다음과 같은 아이의 침착하고 고요한 음성이다.

"아빠는 사람들을 죽여요."

헨리를 면회 온 유일한 대상인 아네트는 인형의 모습을 탈피한 인간이 되어 그와 마주한다. 이 서사는 마치 <피노키오>(1940)에서 제페토의 정성 어린 사랑으로 인해 피노키오가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를 전복시키는 잔혹한 동화로 비춰진다. 결국, 아네트가 인간이 되는 건 헨리의 사랑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정되었을 때이고, 더 나아가 이제는 더 이상 아네트를 목적주의, 즉 '놀이'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인형으로 취급할 수 없는 아빠의 처지에 대한 관점의 변화이기도 하다. 아네트는 헨리를 향해 '어떻게 당신을 용서할 수 있겠냐'며, 그를 똑똑히 보며 노래한다. 헨리의 '사랑할 수 없겠냐'는 물음을 단박에 받아치는 아네트의 음성은 레오 카락스의 자기반성이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누벨바그) 뮤지컬인가?

이전 레오 카락스와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아네트>는 상징적인 숏들을 비롯하여 디졸브 등을 삽입하여 규정되지 않은 이미지의 파열들을 지속적으로 생성해놓았다. 그의 영화에서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숏은 감각을 교란시킴으로 예술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누벨바그 감독으로 분류되는 그가 근본적으로 영화가 상정하는 리얼리즘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근래의 작품이었던 <홀리 모터스>에서는 그에게 '영화'가 인생을 어떻게 추동했는지를 다채롭게 표현해낸 작품이라면 <아네트>는 자신의 딸을 응시하면서 체감한 처연하게 그지없는 아버지를 자각하는 일상의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아네트>의 순간순간을 장식하는 뉴스들은 시간의 흐름과 시퀀스의 단락을 명료하게 구성하는 뮤지컬의 극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적 변용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더불어 헨리와 안의 스캔들을 시작하여 감옥에 수감되기 직전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을 시사하는 건 결과적으로 정돈된 하나의 서사적인 총체를 형성하는 역할로써 현실과 가상의 허구화된 세계를 해체하는 카락스의 유머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아네트>의 흥행과는 별개로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는 대중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것일까. 자크 데미의 <셀부르의 우산>(1965)을 시작으로 가장 최근에 평론가를 비롯한 대중들의 찬사를 받았던 데미안 셔젤의 <라라랜드>(2016)까지의 그 여정에서 주요했던 건 뛰어난 미장센과 진부하지만 익숙한 이야기를 담아 대중들의 공감을 일으키는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아네트>는 이러한 기대를 불식시키는 작품이다. 낭만적이거나 아련한 사랑의 기억을 회상하게 하지 않는 무척이나 불친절한 영화이기도 하다. 살인자인 아빠를 일말의 용서도 없이 원망하는 비극적인 결말에서 대중들은 무엇을 볼 수 있는 걸까. <아네트>에서 우린 레오 카락스의 영화와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본다. 그는 계속해서 말해왔다. 모든 영화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듯이 자신도 그러하다고 말이다. 흥행과는 상관없이 그는 그가 추구하는 영화를 이번에도 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서 여전히 독보적인 영감이 뚜렷하게 각인되는 건 무엇보다 '영화가 무엇인지'라는 물음에 이전처럼 동일하게 대답하고 있어서는 아닐까. 그는 분명히 <아네트>를 찍고 딸에게 달려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아네트
ANNETTE
감독
레오 까락스
Leos Carax

 

출연
아담 드라이버
Adam Driver
마리옹 꼬띠아르Marion Cotillard
사이먼 헬버그Simon Helberg

 

수입 왓챠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4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1.10.27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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